23잔. 사업가와 바텐더.
4.
드라이 진 30ml에 베르무트 15ml, 마지막으로 크렘 드 카시스 15ml까지.
파리지앵이라는 칵테일은 재료를 용량에 맞게 넣어 준 후 믹싱 글라스에 스터하면 끝인 간단한 칵테일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스탠다드일 때의 이야기.
바텐더는 상황에 따라 각 술의 용량을 다르게 조절하기도 하고 또 만드는 방법을 바꾸기도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손님에 따라 취향이 다를 수도 있고, 또는 바의 운영 상황에 따라 단가 때문에 용량이 바뀔 수도 있다.
카시스의 용량을 높여 파리지앵을 만들려는 재훈의 의도는 무엇일까.
반대편에서 재훈을 지켜보던 정환의 눈은, 그의 속내를 읽으려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다.
‘단가일까···?’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은 안 좋은 경우 쪽이다. 아무래도 청담동 쪽 바랑 달리 한남동의 바들은 단가에 더욱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흔히들 말하는 커버 차지.
즉, 자릿세라는 게 한남동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청담동의 바는 앉아서 물을 한 잔만 마셔도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이만원까지의 비용이 발생한다.
이는 서비스의 품질을 보장하고 바에는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강남의 바는 술의 단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다.
반면 강 건너에 있는 한남동은 커버 차지가 없는 만큼 술의 양이나 단가에 있어서는 칼같이 단호한 면이 있다.
사업으로 성공한 바텐더였고 이를 통해 이름을 날린 바텐더가 저 임재훈이라는 바텐더였다.
정환은 카시스를 많이 넣어 술을 만들려는 그의 행동이 단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시스는 달달한 맛에 도수도 제법 높은 좋은 술이다. 다만, 술의 원가만큼은 증류가 필요 없는 리큐르란 특성상 높지 않았다.
진과 베르무트, 그리고 카시스라는 파리지앵의 재료 중, 가장 원가가 싼 술이 바로 카시스였다.
카시스를 많이 넣고 또 진과 베르무트를 줄이면 한 잔에 들어가는 코스트는 자연스레 절감된다.
한 잔으로 봤을 때야 몇백 원의 차이겠지만 이를 수십, 수백의 잔으로 봤을 때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커지는 금액.
정환은 재훈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우선 이렇게 해서 해봐요. 아마 될 거야.”
강무성 바텐더는 자신이 없는 듯 말만 남기며 결과물은 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답을 찾지 못해 본전도 건지지 못한 그의 표정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네.”
이는 재훈 역시 마찬가지. 혹시나 하며 무성의 말에 집중했던 그였으나, 딱히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자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만 흘렀다.
무성이 떠난 후에도 재훈은 계속해서 믹싱 글라스를 노려보며 머리를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카시스의 단맛과 신맛을 살리면서도 파리지앵 특유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그의 고민이 제법 진중함에 달할 무렵.
“고민이 많으신가 봐요.”
누군가 낯선 목소리가 재훈의 곁으로 다가섰다.
“네?”
“아,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저쪽 반대편에 앉아 있던. 아르센의 신입이구요.”
반대편에서 재훈을 살펴보던, 정환이다.
궁금하게 있으면 어떻게 해야겠나.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기는 바라는 곳이고 여기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바텐더란 사람들이다.
바에서 모르는 게 있으면 바텐더에게 묻는 건 당연한 상식. 정문은 망설임 없이 재훈을 향해 직진했다.
“마리너스 3년 차 임재훈입니다. 오늘 새로 오셨다는 분이시군요.”
“네, 이렇게 뵙게 되네요.”
비극이 없었다면, 정환의 추락이 시작되지만 않았다면. 정환이 그대로 문을 열었던 바가 성공적으로 달렸다면.
둘은 어쩌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됐을 수도 있다.
바씬이라는 곳이 좁고, 또 거기서 유명한 이들이 한 번쯤 안면을 트는 건 더러 있는 일이니까.
이렇게 뵙게 되었다는 정환의 말이 조금 의미심장하게 그의 입에서 나왔다.
“파리지앵···, 인가요?”
정환은 재훈의 손이 닿은 믹싱 글라스를 가리켰다. 능청스럽게 말을 묻는 그의 태도가 자연스럽다.
“네. 나름 트위스트를 해보려고 하는 데 잘 안 되네요.”
“혹시 어떤 트위스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카시스를 조금 늘여 보려구요.”
“파리지앵은 충분히 좋은 칵테일이지 않나요? 굳이 카시스를 늘리시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정환의 너스레가 제법 유려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연기하는 정환의 모습.
정환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가며 눈을 껌뻑였다.
재훈은 그저 신입이라. 아무것도 모르기에 묻는 거라. 그런 생각에 조금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환의 물음에 하나씩 답을 들려줬다.
“맛이 좋다고 그대로만 만드는 바텐더는 역량 부족이죠.”
“그런가요?”
과연 저 말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 이 임재훈이라는 바텐더는 사업가일까, 아니면 바텐더일까.
그를 가늠하려는 정환의 눈빛이 그의 얼굴을 스칠 때.
재훈의 입은 덤덤히 자신의 철학을 뱉어갔다.
“파리지앵은 카시스가 들어갔지만, 여전히 독한 술에 속합니다. 기본 베이스가 마티니이니까요. 술이 약한 사람들은 잘 마시질 못하는 편이죠.”
“흠, 마티니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긴 하죠.”
신입이고 청담동에서 이제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재훈은 정환을 보며 세상 물정 모르는 바텐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선배의 입장에서 말을 전했다.
“여러 바를 다녀보시면 알 겁니다. 바라는 곳이···, 전부 같지는 않거든요.”
이건 무슨 뜻일까. 재훈의 입에서 경영과 관련된 말이 나오자 정환은 눈을 고쳐 뜨고 청각을 집중했다.
어쩌면, 여기서 재훈의 가치관을 전부 들여다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청담동의 바와 한남동의 바는 다르다. 이 말씀인가요?”
“네. 다릅니다.”
단호한 재훈의 말.
서로 입을 닫고 바라보는 둘의 눈빛이 가운데서 마주쳤다.
“기분 나쁘게 들으시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아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아, 아닙니다.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잘 몰라서요.”
팽팽한 긴장감은 한 수씩 물러남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재훈의 말.
“청담동 바를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바에 대해 해박한 분들이 많겠죠.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또 확고한 취향을 가진 분들도 많을 테고.”
“그런 경향이 없진 않죠.”
“한남동은 다릅니다. 아무래도···, 청담동보다는 바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그럼···?”
“네. 아무래도 마티니 맛에 익숙하지 않을 분들이 많으실 거 같아서요.”
!
정환은 순간 둔탁한 무언가에 머리를 크게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 속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고 또 얼얼한 뒤통수의 느낌.
정환을 직접 후려친 사람은, 다름 아닌 정환 자신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임재훈이라는 바텐더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이전 생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 잘 나가는 사업가이자 바텐더였기에?
정환은 사업가라는 말 속에 가려진 바텐더란 말을 보지 못했던 자신을 쓰리게 책망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한 말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 바텐더라면 자신의 바가 있는 곳, 또 그곳을 찾는 손님들.
그리고 그 손님의 취향까지.
이 모든 걸 고려해 내놓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저 임재훈이라는 바텐더의 미래 모습만을 보고 그를 예단한 것 같아, 정환의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 아렸다.
“마티니 맛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마티니야 칵테일의 제왕이라 불리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칵테일을 제법 마셔봤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도는 이야기다.
처음 바에 방문한 이에게 마티니를 내어놓는다면, 대부분은 그 쓴맛을 보며 도망갈 게 불 보듯 뻔했다.
“네. 한남동 바에 찾는 분들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분들입니다. 마티니보다는 가벼운 칵테일을 선호하시는 법이죠.”
“······.”
사업이라는 게 그렇다. 무엇이 잘 팔리고 자신이 팔아야 할 시장에서 통하는 아이템이 무엇인지를 제일 먼저 파악하는 것.
그게 사업의 시작인 법이다.
임재훈이라는 사람이 바를 3개나 운영하며 그 모두를 일정 퀄리티 이상의 바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바텐더로서의 역량 역시 사업가의 역량만큼 받쳐줬기 때문이다.
정환은.
임재훈이라는 사람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도.
“···트위스트가 어렵나 보군요.”
“쉽지는 않네요. 도움도 받아봤지만···, 마티니가 워낙에 성격이 강해서요.”
“잠시···, 괜찮을까요?”
정환은 재훈이 만들어 둔 파리지앵의 잔을 들며 재훈을 향해 마셔도 되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제 막 바에 발을 들인 신입이 마셔봐야 무엇을 알겠냐마는. 재훈은 이를 부담 없이 허락했다.
“한번 평가해주시죠. 이쪽은 제가 만든 거고, 저쪽은 강무성 바텐더님이 트위스트 해주신 겁니다. 사실 맛은 비슷합니다···. 정환 씨가 한번 평가해봐 줘요. 그나마 손님 입장에 제일 가까울지도 모르니까요.”
“네, 그럼.”
정환은 두 개의 잔 중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훈이 만든 잔을 들어 올렸다. 강무성이 만든 잔은, 이미 맛볼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 호르르륵.
재훈이 만든 파리지앵이 정환의 목으로 넘어갔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파리지앵. 카시스의 달콤함과 진득함이 마티니 특유의 강함을 중화시켜 부담스럽지 않은 맛이 정환의 혀를 자극했다.
이 자체로도. 충분히 잘 만든 파리지앵임은 분명했다.
“부드럽네요. 확실히 가볍고.”
“하지만 부족하죠.”
“네. 확실히.”
무언가 알고 하는 말일까. 재훈은 자신의 말에 그대로 맞장구치는 정환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의 의미를 정환이 알 거란 생각은 그의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재훈 씨는 여기에 마티니 특유의 풍미를 주고 싶으신 거잖아요. 달콤한 칵테일이지만 여전히 마티니의 향은 남아 있는 파리지앵. 그걸 원하시는 거고요.”
“정확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지만 정환의 이어지는 말이 재훈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재훈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환이 어찌 그를 아느냐 묻는 표정이다.
어떻게 알겠나. 정환 역시.
바텐더니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정환은 믹싱 글라스가 아닌 셰이커를 가져와 파리지앵의 재료를 계량하기 시작했다.
스탠다드가 아닌, 카시스의 양을 늘린 재훈의 레시피대로 계량하는 정환.
파리지앵은 분명 스터로 만드는 칵테일이다. 그럼에도 셰이커를 준비하는 생뚱맞은 상황에 재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지금 뭘 하시려는···?”
“꼭 스터로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네?”
신입의 패기일까. 아니면 무지에서 나오는 용기?
그래, 용량이야 제멋대로 바꿀 수는 있다.
허나, 만드는 기술까지 바꾸는 건 그보다 훨씬 깊은 경지에서나 가능한 영역.
3년 차에 프론트에 나선 지 1년이 넘은 재훈조차. 이는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영역이다.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오늘은 연습하는 날이잖아요. 그냥 한 번 해볼게요.”
연습이니까. 또 손님에게 내는 게 아니니까. 정환은 가벼운 말투로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그냥 한 번 해본다는 말만 했다.
재훈은 진지하지 않은 거라. 그렇게 여기며 조금 표정을 꾸기며 정환의 바텐딩을 지켜봤다.
- 탁, 탁, 탓.
- 툭.
재료를 모두 넣고 닫히는 셰이커의 뚜겅.
이제 저걸 흔들어 셰이킹으로 파리지앵을 만들겠지. 셰이킹 실력이나 지켜보자며 재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셰이킹은 스터에 비해 술의 맛을 더욱 흐리게 만들어주는 기법이다.
스터가 술 고유의 맛을 살리며 묵직한 느낌을 준다면 셰이킹은 이를 가볍게 만드는 기법.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부담 없는 마티니의 풍미를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훈이 정환의 모습을 응시할 때.
정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자세로, 셰이커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