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잔. 싱가폴 슬링.
3.
“아니, 바야 어디든 있는 건데 뭘 강남까지 굳이 오고 그러나. 이 친구도 참···”
옆으로 길게 늘어선 바.
수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바의 좌석인 만큼 수많은 말과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 바로 바라는 곳이다.
오늘은 한기준이라는 바텐더가 데뷔전을 치르는 날.
즐겁고 축하하는 말만이 가득할 거 같던 바 테이블 위에도. 조금은 불평과 불만, 그리고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어허, 참. 내가 사과했지 않나. 선약이 있었대도. 이런 기회가 흔치 않네. 누군가의 시작을 보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쳇. 잘났군그래. 시간은 시간대로 잡아먹고.”
2부 손님들이 입장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타났던 한 손님. 그리고 그 손님이 동행으로 데려온 다른 일행은 서로가 풀리지 않은 감정이 있는 듯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말투였다.
“제발 적당히 하세. 기왕에 왔지 않나?”
“아, 그래. 왔으니 문제지.”
일행으로 온 사내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강남까지 온 것이 못내 짜증 나는 모양이었다.
“종로에도 명동에도 널린 게 바가 아닌가. 잘 먹던 술을 두고 왜 강남까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지 않나. 어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뭐라고 하나? 알겠네, 술이나 마시세.”
남성은 참 중년이 되어도 변하는 게 없다. 나이가 제법 들어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의 정장을 걸친 이들도, 나누는 대화는 결국 20대 대학생들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기준 씨. 미안해요. 이 친구가 멀리서 와서 기분이 좀 그래. 내가 축하하러 온다는 게 참···”
“괜찮습니다, 강 사장님.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당연히 와야지. 허허. 기준 씨도 말하는 거 하고는.”
강 사장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깍듯이 대해주는 바텐더를 보며 기분이 조금 풀렸다. 여전히 옆에는 뾰루퉁한 일행이 함께였지만.
“고상한 바구만.”
“그럼. 긴자 출신 바텐더에 그 제자들이네. 고상하고말고.”
“바가 거기서 거기지 않고. 나도 바 제법 다녀봤네. 흥,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내가 다니는 곳만 해도···”
“실력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지. 자네 같은 진상이 쫓겨날 수 있다는 것도 다르고.”
딱히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이상 직접 손님을 쫓아내진 않는다.
하지만 강 사장은 애써 데려온 일행이 무례를 더 범하기 전에 강한 말로 경고를 한 번 남긴다.
“수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체이서는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정환은 슬쩍 눈치를 보다 두 사내의 대화가 끊길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건넸다.
애써 대화를 끊지도 않았고 또 분위기가 무거워지려 하는 적절한 순간에 잘 끼어들었다.
“아. 정환 씨. 그러고 보니 바 안에 있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벌써 바백이라니.”
“얼마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이제 배워가는 중이에요.”
“잘할 걸세. 암. 잘해야지. 체이서는 탄산수로 주게. 여기 이 친구는···”
“찬물.”
“그래, 냉수로 주고.”
“네, 알겠습니다.”
정환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기준에게 웃음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 만큼 기준이 긴장할 수도 있기에 애써 그를 풀어주려던 정환이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천 좀 해줘요. 특별한 날이니까, 기준 씨 안목을 믿어야지.”
“난 아일라 위스키를 더블로.”
손님들은 상반된 주문을 내어 왔다. 강 사장은 다분히 배려심이 담긴 주문을, 함께 온 일행은 잔뜩 뾰로퉁함이 담긴 주문이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오늘 이쪽 좌석은 따로 위스키를 판매하진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위스키 베이스의 칵테일은 어떠신지요?”
기준은 고개를 푹 숙이며 뾰루퉁한 손님의 주문을 반려했다. 오늘은 바텐더로서 데뷔전. 이런 날에는 위스키를 잔술로 따로 판매하지 않는다.
명진과 정우가 있는 반대편은 몰라도, 기준이 있는 초대석만은 기준의 칵테일을 맛보라는 취지였다.
“흠. 따지는 게 많은 곳이군.”
“오늘만 그렇습니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칵테일을 적당한 걸 시켜보게.”
“강 사장님께서는 평소 즐겨 드시는 브랜디 베이스가 어떨까요?”
“좋네. 사이드카만 아니면 될 거 같은데. 이제 질려서 말이지.”
“스팅어는 어떠신가요? 2차로 오신 거니 강한 맛도 괜찮을 듯합니다.”
“좋네. 그럼 스팅어로 부탁하지.”
강 사장은 무난한 손님이었다. 일행을 다독이며 적당히 바텐더를 배려하는 말 그대로 단골에 어울리는 손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데려오긴 했지만, 그게 악의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환은 스팅어라는 단어가 들리자 서둘러 브랜디와 민트 리큐르를 준비했다.
두 술을 넣고 셰이킹으로 만드는 스팅어는 이름처럼 맛이 날카로운, 제법 강한 술이다.
“그럼 나도 하나 주문해보지.”
강 사장과 함께 온 손님은 입을 몇 번 삐죽이더니 손을 올려 들고 기준을 불러세웠다.
무언가 주문을 말하려는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비릿함이 걸려 있었다.
“네, 주문하시죠.”
“칵테일이면 되는 거겠지?”
“클래식 칵테일은 대부분 준비되어있습니다.”
“너무 엉뚱한 주문 말게.”
강 사장은 심술이 난 일행이 혹여나 이상한 주문을 할까, 가슴을 졸였다.
이는 옆에서 주문을 듣고 있던 정환 역시 마찬가지.
제발 무난한 주문이 나오길.
정환은 간절히 바랐다.
“클래식 칵테일이라···. 좋네. 그럼 싱가폴 슬링으로 하지. 진은 고든스로.”
다행이다.
주문을 직접 받는 기준도, 이를 지켜보던 정환과 강 사장의 머리에도 같은 말이 스쳤다.
싱가폴 슬링이야 유명한 칵테일이고 또 무난한 칵테일이다.
진과 체리 브랜디, 그리고 그레나딘 시럽과 레몬주스를 넣어 셰이킹한 후 탄산수를 더하면 그만인 칵테일.
그리 어렵지 않은 칵테일임은 분명했다.
“네, 싱가폴 슬링. 알겠습니다.”
기준은 밝게 웃으며 주문을 접수했다. 싱가폴 슬링이야 유명한 클래식 칵테일이고 또 많이 연습한 분야가 아닌가.
주문을 받는 기준의 손끝에 떨림이라곤 없어 보였다.
정환도 밝게 웃으며 재료를 준비하려 돌아섰다. 진과 레몬주스, 그리고 체리 브랜디와 그레나딘 시럽을 준비하던 정환.
하지만.
“아. 조금 다르게 주문했으면 하는데.”
이어지는 손님의 심술이, 이들의 손을 멈추게 한다.
“···다르게 주문이라시면?”
“자네가 만들려는 건 간략한 레시피일 테지. 재료들 전부 넣고 흔드는···. 아닌가?”
“맞습니다. 흔히들 사보이 스타일이라 부르시죠.”
“난 다른 버전을 맛봤으면 해서.”
다른 버전이라는 말에 두 바텐더는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바텐더이기에. 저 손님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둘이었다.
“래플스 스타일 말씀이시군요.”
“무리겠나?”
손님은 잔뜩 눈을 올려 뜨며 기준을 바라봤다. 오늘은 다분히 바텐더를 배려하는 날임을 이미 들었음에도, 그의 말투에는 아무런 배려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싱가폴 슬링은 다양한 레시피가 존재하는 칵테일이다. 제일 원조로 치는 것이 방금 손님이 말한 래플스 스타일.
원래 정환과 기준이 만들려던 레시피는 이를 간략화한 사보이 스타일이라 불리는 레시피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반기며 알겠다는 말을 전했을 주문이다. 어느 바에서 건 손님은 당당히 원하는 스타일을 주문할 권리가 있고 이를 받아야 하는 게 바텐더의 일이니까.
다만, 오늘이.
기준을 위한 날이라는 게 조금 문제였지만.
“이 사람, 참. 거, 왜 그러나? 래플스 스타일이라면 손이 많이 가는 레시피가 아닌가? 오늘은 정해진 레시피로 그냥 드시게. 참···, 괜히 심술은.”
“바에서.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하는 게 심술인가? 자네야말로 말이 이상하군. 강 사장. 자꾸 날 이상한 사람으로 몰지 말게.”
“어허, 그래도···”
두 손님은 본격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점점 과열되는 분위기에 서로의 감정이 격해질 무렵.
“알겠습니다. 래플스 스타일로 싱가폴 슬링,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기준은 그들의 격해지는 감정을 한 방에 갈라놓는다.
“···기준 씨. 이거 내가 괜한 사람을 데려와서···”
“괜찮습니다. 바에서 손님이 주문하시는 건 권리죠. 배려는 해주시면 감사한 것뿐입니다. 당연한 권리이신걸요.”
“흠, 정말 괜찮겠나? 무리라면 다른 걸 주문해줄 수도 있네만.”
“괜찮습니다. 바쁘고 배려받고···. 그런 건 바텐더의 사정이죠. 손님께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마인드가 좋군. 그럼 부탁하지. 싱가폴 슬링, 래플스 스타일로.”
진 30ml, 코앵트로 7.5ml, 베네딕틴 7.5ml, 체리 리큐르 15ml, 파인애플 주스 120ml, 라임 주스 15ml, 그레나딘 시럽 10ml, 앙고스투라 비터 1dash 까지.
듣기만 해도 복잡한 레시피의 칵테일을 기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버렸다.
사람을 응대하고 한창 주문을 받으며 소통해야 할 때 받을 주문으로는 복잡했지만, 바텐더의 입에서 안 된다는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정환 씨. 재료는···”
래플스 스타일은 굳이 찾아서 외우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는 레시피다. 이제 막 바에 발을 들인 정환이 이를 모를까, 기준은 그에게 재료를 일러주려 했다.
허나.
“여기 베네딕틴이랑 체리 리큐르, 그리고 비터스랑 코앵트로! 준비해뒀습니다. 가니쉬로는 파인애플 쓰실 거죠?”
정환은 바뀐 주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에 맞는 재료를 차곡히 기준의 앞으로 대령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천천히 하세요. 제가 다른 분들 응대하고 있을게요.”
기준은 정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셰이커 앞으로 향했다. 바백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보태지는 정환의 말이 왜인지 기준을 힘 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래플스 스타일이 원조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
셰이커 앞에서 재료를 만지는 기준.
주문한 손님은 그런 기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맞습니다. 싱가폴 슬링은 말 그대로 싱가폴에서 시작된 칵테일입니다. 싱가폴의 래플스 호텔, 그 안에 있는 롱 바(Long Bar)라는 곳이 원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래플스 스타일이 원조란 말이군.”
“이설은 있습니다. 통념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거죠.”
기준은 바텐더답게 손님의 말에 답하며 재료를 하나씩 계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파인애플 주스, 그리고 베네딕틴, 코앵트로.
그리고 한 마디 더.
“사보이 스타일은 뭐지? 조금 전 자네가 하려던 거.”
“사보이 칵테일 북이라는 유명한 칵테일 가이드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레시피로 싱가폴에서 싱가폴 슬링의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유럽에 전파한 간략화된 레시피로 알고 있습니다.”
바라는 곳은 이런 곳이다.
칵테일에 대해 손님이 물어보면 바텐더는 답한다.
이건 여느 바에서나 펼쳐지는 풍경.
평소라면 손님은 호기심을, 바텐더는 전문성을 나타내는 그런 풍경.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손님 쪽에 호기심보다는 심술이 가득해 보였다.
“흠, 유명한 인물들도 많이 마셨다던데? 누구더라? 그 작가···”
“‘서머싯 몸’이죠. 달과 6펜스를 쓴.”
“그렇지. 모히토를 헤밍웨이가 퍼트렸다면 싱가폴 슬링은 서머싯 몸이었지.”
기준은 어느덧 그레나딘 시럽을 넘어 라임 주스를 손으로 찾고 있었다. 대화와 함께 메이킹을 동시에 해내는, 전문 바텐더다운 그의 모습이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했더라? 그 사람이 싱가폴 슬링을 표현한 말이···?”
대화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아무런 불안함 없이 움직이던 기준의 몸이, 손님의 질문을 듣는 순간 일순간 멈춤이란 걸 가져버렸다.
머리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통제하는 법.
생각이 나지 않는 무언가가 떠오르자, 기준의 손이 머리와 함께 반응한 것이다.
흐르는 라임 주스가 계량컵을 향하고 있었다.
“······.”
뭐였더라.
기준의 머리에 잡념이 끼었다.
복잡하고 자잘한 레시피만으로도 가득 찰 머리에 손님의 질문까지 더해지니, 이내 그의 머리가 일순간 백지로 변해버렸다.
기준은 행동을 멈췄고, 손님의 말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엑조틱한 동양의 신비.”
그리고 그런 기준을 구원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
옆에서 다른 손님과 대화를 나누던 정환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며 기준과 뾰루퉁한 손님의 말에 끼어들었다.
부러 밝은 척을 하며 손동작까지 곁들인 정환의 모습이 손님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환기하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기준이 조금 더, 칵테일 메이킹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지. 엑조틱한 동양의 신비!”
손님은 정환의 말을 듣고서야 신난다는 듯 몸을 방방 띄웠다. 기준에게서 정환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정환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순간.
- 쾅!
하는 작은 굉음이 바 안에 울려 퍼졌다.
위로 향했던 그 손님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바 테이블을 쾅! 하고 두드린 것이다.
“자네 오늘 왜 이러나? 술을 많이 마셨군. 행동도 커지고 말도 많아졌어. 그만하게.”
“아니, 아니.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러지. 자네가 좋은 곳이라 하지 않았나? 말 그대로구먼. 다들 전문적이야. 신입이 이런 이야기도 다 알고.”
손님은 기분이 풀린 듯 심술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야 적대적이던 그의 눈빛과 말투가,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았다.
언제고 좋은 풍경이다.
처음에야 굳은 표정을 하던 손님이 이렇게 밝아지는 건.
기준도 그렇지 않을까.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 뚝. 뚝.
그대로 굳은 채, 정해진 용량보다 많은 라임 주스를 쏟은 기준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준의 몸이 떨려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