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잔. 데뷔전.
1.
“잘 어울리네.”
“이야, 옷이 날개인데요?”
“멋지군요.”
백사이드의 문이 열리고 수줍은 듯 쭈뼛대며 나오는 한기준. 그런 기준을 보며 정환과 정우, 그리고 마스터 이명진이 입을 모았다.
평소라면 정환처럼 셔츠에 조끼, 그리고 넥타이가 전부여야 할 한기준의 차림새가 오늘은 조금 달랐다.
“···무겁네요.”
하얀 재킷.
아르센에서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바텐더를 상징하는 하얀 재킷이, 오늘은 기준의 상체에 걸려 있었다.
아르센의 마스터 이명진이 한기준에게 다가섰다.
“어깨를 넓게 펴세요. 하얀 재킷인 만큼 주름이 그대로 보입니다. 명찰도 바로 다셔야 하고요.”
이명진은 새롭게 재킷을 갖춘 제자가 자랑스러운 듯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손수 이를 정리해주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따뜻하게 보였다.
오늘은 한기준이 프론트에 데뷔하는 날.
바텐더로서 처음으로 손님에게 칵테일을 선보이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보통 대한민국의 바라면 이런 날을 스태프끼리 축하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지만 일본의 바들은 달랐다.
가게 차원에서 이벤트를 열고 엄선된 손님을 초대해 첫날을 축하하게 해준다.
그게 일본, 아니 긴자 내의 바들의 전통이었다.
첫걸음인 만큼 바텐더를 배려하는 장치들 역시 많았다. 손님을 초대할 때도 데뷔하는 바텐더와 평소 친분이 있는 손님을 주로 초대했고 그날 대접하는 칵테일 역시 데뷔하는 바텐더가 자신 있는 메뉴들을 위주로 꾸려갔다.
원래의 바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다. 뭐든지 손님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 바가. 오늘은 바텐더에게 자비를 베푸는 날이다.
긴자의 전통을 따르는 아르센 역시.
이 방식을 따랐다.
정환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기준을 보며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얼마나 설레고 있을까.
자신 역시 긴자에서 치렀던 데뷔전을 잊지 못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텐더로의 출발이 바로 그날이었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잘 해봐요. 오늘이 시작이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손님에만 집중해. 오늘은 마스터랑 내가 나머지는 다 해낼 테니까. 정환 씨. 잘 도와줘야 해!”
“최선을 다해서 보조할게요. 뭐든 말씀만 해요, 기준 형.”
아르센의 가족들은 저마다 축하를 보내며 기준을 응원했다. 바텐더로서 다들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지를 아는 만큼. 기준을 응원하는 이들의 목소리 역시 진솔했다.
“오늘은··· 몇 분이나 초대했죠, 기준 씨?”
“열 팀 정도 오실 겁니다. 1부, 2부 나눠서···.”
“흠. 다섯 팀씩으로 잡아도 영업에는 지장이 없겠군요.”
“기준이가 미리 배려한 거 같더라구요. 얘가 이래요, 마스터.”
데뷔전이라는 이벤트가 열리지만, 바는 정상적으로 영업해야 한다.
바라는 곳이 정해진 휴일이 아니고는 함부로 문을 닫을 수 없는 곳이기에 이는 이벤트가 있는 날도 마찬가지다.
오늘 아르센은 반을 뚝 잘라 영업을 개시한다.
아르센의 바 카운터 중심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워크인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위해 이명진과 신정우가. 왼쪽은 초대받은 손님을 위해 한기준과 차정환이.
이렇게 반으로 뚝 잘린 채 이벤트와 영업을 동시에 준비하는 아르센이었다.
“정환 씨 레시피 받아서 연습했지? 오늘 실수하면 큰일 나는 거야. 알지?”
“그럼요. 저도 단단히 준비했습니다! 걱정마세요!”
“딱히 크게 할 일은 없을 거야. 뭐 딱히 정환 씨가 실수할 사람도 아니고.”
정환은 아르센의 유일한 바백으로 한기준을 서포트하는 제법 큰 역할을 맡았다.
정환의 실력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정우는 그런 정환이 실수할 거란 생각은 없으면서도, 괜스레 걱정되는지 한 번 더 주의를 줬다.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감도는 바 안.
그렇게 다들 들뜬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나서야.
아르센에서 제법 중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2.
- 덜컥.
“어서 오세요.”
둔탁한 바의 문이 열리자 네 명의 바텐더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워크인 손님일까.
아니면 초대받은 손님?
다들 들뜬 눈으로 손님의 면면을 훑는다.
그리고 먼저 반응하는 한기준 바텐더.
“아. 제 손님입니다.”
아. 하는 한숨과 함께 다들 얼굴에는 미소를 장전하고 손님을 맞았다.
“이거 마수걸이가 초대 손님이라니. 미안한걸?”
“잘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정환은 바 밖으로 나가 손님을 맞았다.
중년의 회사원으로 아르센을 찾을 때면 늘 기준과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아르센의 오랜 단골이었다.
“이거 감회가 남다르네. 바텐더가 머리 올리는 걸 다 보고.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기준 씨.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한 과장님. 오늘은 부담 없이 즐겨주세요.”
“나야 좋죠. 이렇게 초대 받으니 특별한 사람이 된 것도 같고.”
“특별한 분이시죠. 저 한테는.”
기준은 손님에 대해 잘 아는 듯 수건을 건네며 그와 인사를 나눴다.
바텐더로서 첫걸음에. 첫 손님이라는.
어쩌면 평생을 잊지 못할 손님이 바로 저 손님이다.
“흠, 정해진 메뉴가 오늘은 있다던데? 뭐로 해볼까.”
“뭐든 주문해주세요. 우선은 클래식 쪽은 대부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역시 아르센이란 말인가. 그러엄···. 우선은 위스키 사워로 시작하지. 달걀 넣지 않는 버전으로. 버번은 기준 씨가 골라줘요.”
“위스키 사워 알겠습니다. 버번은 메이커스 마크(Maker's Mark) 괜찮으시겠습니까? 첫 잔이니 조금은 달달한 향이 나는 게 좋을 듯해서요.”
“딱 좋지.”
손님은 수건을 얼굴로 가져가며 밝게 웃었다. 기준의 선택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기준은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준비된 메이커스 마크 버번 위스키.
그 옆에는 위스키 사워의 재료인 레몬주스와 설탕, 탄산수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미리 준비를 마친 정환이 기준에게 눈을 찡긋하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기준은 정환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셰이커를 들었다.
위스키 사워는 두 개의 레시피가 있는 칵테일.
손님은 그 중 달걀흰자가 들어가지 않는 레시피를 주문했다.
그렇다면 탄산수를 제외한 재료를 넣고 셰이킹한 후 탄산수를 채우면 끝. 기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 샤카, 샤카, 샤카!
경쾌하게 울려오는 셰이커 소리. 기준은 그간 갈고 닦은 역량만큼 경쾌하게 셰이커를 울렸다.
- 촤르르륵.
미리 칠링해둔 잔에 부어지는 진한 황색 액체.
기준은 한 손으로 잔을 잡고 다른 손으로 술을 부으며 완벽한 위스키 사워를 만들어 갔다.
‘흠···?’
분명 이제 2년 차고 이제야 데뷔하는 바텐더였다. 그럼에도 이를 지켜보는 정환의 눈에 예사롭지 않은 실력이란 빛이 서렸다.
‘제대로 배웠네.’
정환은 기준을 타고 넘어 이를 가르쳐준 스승 격의 인물을 바라봤다.
이명진 마스터.
아르센의 오너이자 마스터 바텐더인 그가 직접 키워 낸 제자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 드륵.
“여기 위스키 사워 나왔습니다. 따로 가니시는 없이 드시는 게 더 풍부한 맛을 느끼실 겁니다.”
역시 바텐더로 일할 때는 말이 길게 나온다. 정환은 유수처럼 흐르는 기준의 설명을 보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 후.
- 하.
동시에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안도의 목소리.
명진과 정우 역시 멀리서나마 기준의 첫 바텐딩을 살펴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야, 색이 제대로네. 기준 씨. 고생했어요. 잘 마실게요.”
뭐, 그런 감상과 불안, 평가 등은 모두 바텐더들의 몫이다. 손님이야 지금 주어진 자신 앞의 잔이 맛있으면 그만. 나름 선별된 손님이지만 바텐더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밝을 뿐이다.
네 명의 바텐더 모두의 시선이 한 손님에게 꽂혔다. 조금은 부담스러울 법도 한 상황에서 그는 거침없이 잔을 들어 코로 가져갔다.
- 흐으음.
만족스럽게 흔들리는 그의 얼굴.
무언가 좋은 향기를 맡을 때면 나오는 표정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입으로 향하는 잔.
- 스르릅.
한 모금 정도를 입에 머금은 그는 다시금 밝게 웃고는 잔을 내려뒀다.
“맛있네요. 아주 좋아요. 기준 씨.”
당연한 평가가 나오고 나서야.
- 휴우.
- 하아.
다시금 옆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기준 역시 잔뜩 올라갔던 어깨가 슬쩍 내려왔다. 긴장한 탓에 셰이킹이 과하진 않았을까 걱정했던 그였지만, 맛에는 영향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축하드려요. 첫 잔 성공이네요!”
정환은 밝게 웃으며 기준에게 다가갔다. 기준은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정환에게 호응했고.
첫 손님을 받은 후부터는 물 흐르듯 하루가 진행되었다.
워크인으로 들어와 이명진 마스터와 신정우 매니저 쪽으로 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그에 맞춰 한기준이 초대한 손님들도 시간에 맞춰 아르센을 찾았다.
정해진 틀 내에서 움직이는 하루였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만 같았다.
정환도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문을 미리 듣고 또 그에 맞는 준비를 해두고. 겉으로 보이는 건 기준이었지만 이를 위한 판은 정환이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1부 영업이 끝나고 2부 영업을 향해 달려갔다.
“기준 씨. 축하해요.”
“여기 선물이네.”
“이야, 벌써 데뷔라니!”
“축하한다, 기준아!”
“얼른 맛있는 거 한 잔 줘봐.”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가며 축하를 전했고 손에 선물을 가져오는 이들도 있었다.
기준은 점차 긴장을 풀어가며 자연스레 손님을 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초대한 손님들도 대부분 방문했고 더는 생길 변수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대로 자신의 데뷔전이 무사히 끝나나.
기준이 그런 여유로운 생각마저 하며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
- 드르르륵.
“아. 조금 늦은 거 같네. 기준 씨. 마스터. 미안해요.”
둔탁한 아르센의 문이 다시금 열리며 새로운 손님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준을 먼저 찾는 거로 보아, 그는 이번 데뷔전에 초대된 손님으로 보였다.
“잠시 시간이 떠서 다른 사람과 한잔한다는 게 이렇게 늦어버렸네. 괜찮지? 지금이라도?”
“물론입니다. 안으로 드시죠.”
기준은 늦은 손님임에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정환이 다시금 나서서 그를 안으로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잠시만, 정환 씨. 이거 또 미안해지려 하는데···.”
손님은 슬쩍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척 기준이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일행이 있는 데 괜찮을까? 같이 한잔하다 보니 가라고 할 수도 없어서 말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무리한 부탁.
데뷔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부러 선별된 손님만을 부르는 걸 알면서도.
새롭게 들어선 손님은 모든 걸 모르는 척 일행이 있다는 말을 늘어놨다.
바를 제법 다닌 그였기에.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지 않을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죠.”
기준은 이명진을 슬쩍 한 번 보고는 안으로 손님을 모셨다. 살짝 바라본 명진은, 모든 걸 기준에게 맡기겠다는 표정이었다.
“정환 씨. 두 명 자리로 부탁해.”
손님은 기준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손님의 뒤편으로는.
무언가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함께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