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잔. 식구.
1.
“다들 고생하셨어요.”
나흘.
딱 그 정도 자리를 비우고는 이명진 마스터가 아르센에 돌아왔다.
그간 마스터 바텐더의 부재에도.
아르센은 아무런 탈 없이 잘 흘러가고 있었다.
“정우 씨. 고생이 많았겠군요.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다들 잘 도와줘서 괜찮았습니다. 기준이도, 또 정환 씨도요.”
신입이라기에는 너무도 능숙한 정환의 모습에 놀랐던 신정우 매니저.
하지만 그런 모습이 연달아 나흘이나 반복되자, 그 역시 이에 익숙해지며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분야든 타고난 재능이란 게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조금 선천적으로 바 업계, 즉 서비스업에 대한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정우는 우선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신입이 일을 잘해서 자신에게 해가 될 게 없기도 하고.
‘괜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어차피 가족이 아닌가.
“기준 씨는 어땠나요? 힘들지 않았나요? 바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제일 힘든 건 아무래도 바백이었을 텐데.”
“···괜찮았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무뚝뚝한 표정의 한기준은 괜찮았다는 말로 지난 나흘을 일축했다.
사뭇 진지한 인상만큼. 말이 언제나 짧은 한기준이었다.
“정환 씨도 고생이 많았겠군요. 바백으로 이제 시작하는 참에 제가 도움이 못 되었네요. 일은 조금 익숙해졌나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아직 어렵네요.”
허허.
어렵다라.
자신이 뱉어 놓고도 정환은 슬쩍 기준과 정우의 눈치를 봤다. 어려워하는 사람치고는. 지난 시간을 너무나 잘 보낸 정환이었다.
“···소질이 있습니다. 정환 씨가 잘 적응해서 다행이에요. 플로어 스태프로 일하며 손님들 취향도 많이 익혀둔 거 같더라구요.”
“그래요? 그게 정말이라면 이상적인 신입이군요.”
“그러게요. 참 신기한 일···이죠.”
정환을 칭찬하는 정우의 말에 이명진은 반기며 말을 이었다. 정우는 여운을 조금 두었고 기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인정했다.
“잘 해줬다니 다행입니다. 다들. 오늘부터는 다시 함께 잘 해봐요.”
이명진은 그간 바를 비운 게 마음이 쓰이는 듯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스태프들에게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전했다.
그를 보는 정환의 눈빛에 이채가 서려 있다.
‘이명진···’
인상적인 바텐더다.
긴자 사나이 특유의 꼿꼿함과 바텐더 특유의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명진이라고, 정환은 그렇게 그를 판단했다. 경력 역시 자신보다 오래된 사람이며 어떻게 보면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
그리고 자신이 꾸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이명진이 아닌가.
스태프 플로어로 활동하며 지켜본 그의 실력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아니, 가히 일류 바텐더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실력이라.
정환은 이명진의 실력을 그렇게 평하고 있었다.
‘근데 왜?’
마스터에 대한 평가가 거기까지 닿자, 정환의 머리에는 작은 의문도 하나 스쳤다.
왜.
왜 자신은 이런 사람을 모를까.
정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바 내에 있는 신정우, 한기준, 그리고 이명진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12년의 경력을 가진 정환.
그게 비록 2년 후에 시작되는 일이라고는 해도 정환은 꽤 오랜 기간을 바 씬(Bar Scene)에 몸을 담았다.
비록 다른 나라고 성질이 다른 일본의 바 씬이긴 했어도 한국과 교류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정환이 이름을 날릴 무렵에는 한국에서 날아와 정환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이들도 있었고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찾아오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바 씬이 얼마나 좁은 곳인가. 실력이 없다면 언제고 들통나는 곳이고 실력이 좋다면 언제고 소문이 나는 곳이 바로 바 씬이다.
그런 바 씬에서.
무려 12년을 활동한 정환이.
이명진이라는 이름도, 또 아르센이라는 이름도 듣지 못한 건.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 실력에 이런 바라면···’
문을 닫고 이들이 은퇴하지 않은 이상 정환이 모를 리는 없다.
정환이 데뷔하고 한국에 돌아오는 몇 년 후의 시간까지. 이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흠···’
지나간 일이면 몰라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어찌 미리 알겠나. 정환은 이에 대한 생각을 차후로 우선 미뤘다.
거칠 것 없이 나아가던 정환의 앞에도.
작지만 제법 무거운.
의문이 생겼다.
“자, 오늘부터는 기준 씨의 데뷔를 준비하죠. 기준 씨. 연습은 충분히 하고 있겠죠?”
정환이 갑작스레 스친 의문으로 눈매를 좁힐 때, 이명진 마스터는 다른 화두를 던지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네.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우 씨가 최대한 도와주세요. 오픈 전 시간을 활용하세요. 바에 있는 술들은 얼마든 사용해도 좋으니까요.”
“네, 마스터.”
얼마 뒤에 있을 한기준의 프론트 데뷔 전.
이명진 바텐더는 그에 대한 말을 꺼냈다.
별다른 큰 행사는 아니다.
그저 주니어 바텐더라 불리며 손님에게 칵테일을 대접하는 걸 허락받지 못했던 바텐더가 이제야 이를 허락받는 것.
그리고 그 허락의 첫날을 조금 성대하게 여는 것.
바텐더들 사이에서는 이를 데뷔전이라 불렀다.
‘요즘에도 데뷔전을 열어주는 바가 다 있네.’
역시나 아르센은 좋은 곳이다.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명진 바텐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긴자에서야 전통 있는 바들은 계속해서 데뷔전의 문화를 가져가고 있지만, 새롭게 문을 여는 바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바에서 주축이 되어 한 바텐더에게 기념할 날을 만들어 주는 일이, 2010년대의 바 씬에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환 씨.”
기준과 정우에게 말을 남긴 이명진의 시선이 정환에게 닿았다.
여전히 인자한 표정의 그가, 정환을 지긋이 바라봤다.
“네. 마스터.”
“정환 씨도 연습할 시간이 물론 필요하겠죠?”
“저···, 말씀이신가요?”
정환은 눈을 크게 뜨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답했다. 맞다. 필요해야 한다.
신입이라면 이맘때에 가장 왕성하게 노력하고 레시피를 다듬는다.
손에 술병과 바툴을 익힐 수 있는 건 영업 전이나 영업 후가 전부였지만.
“그럼요. 바백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는 다음을 준비해야죠. 싫나요?”
“네? 아, 아뇨!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니, 조금 이르지만 시작해봅시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환은 기쁜 마음으로 이명진의 말을 받았다. 바툴을 만지고 또 술병을 만지고.
정환이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정환이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그럼 기준이 봐주면서 같이 교육하면 되겠네요. 정환 씨. 조금 더 일찍 출근할 수 있지?”
말을 듣던 신정우 매니저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치고 나왔다.
내심 정환의 실력에 대해 궁금한 점도 있고 또 마스터가 걱정도 되고.
하지만.
“아뇨.”
이명진의 입에서는 조금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정환 씨는 기준 씨와 따로 연습하는 거로 하죠. 영업이 끝난 후. 그때 제가 따로 봐줄 테니···, 그렇게 하시죠.”
“예···?”
“지금은 기준 씨가 데뷔전에 집중해야 할 시기니까요. 정우 씨도 기준 씨에게 집중해주세요.”
“하지만 마스터 몸도 안 좋으신···”
“괜찮습니다.”
정말로 걱정을 담은 말이었다. 적어도 신정우는 그랬다. 매니저가 신입을 교육하는 게 이상한 거도 아니고.
너무도 단호한 이명진의 태도에 살짝 당황한 신정우는 말없이 이명진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우 씨와 기준 씨. 그리고 떠나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아르센에서 바텐더를 시작한 사람들은 내 손으로 가르쳤어요. 내 몸이 좋든 나쁘든. 이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
마스터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자, 정우는 무어라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이명진에게 배웠고, 한기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뭐라고. 이명진의 말을 막을 수 있겠나.
“건강은 챙겨가며 하셔야 합니다···. 그것만 약속해주세요. 마스터께 무슨 일이 생기면 아르센은···”
“자자. 건강을 관리하느라 지난 나흘간 여러분께 민폐를 끼친 거 아니겠어요? 너무 걱정마세요. 몸 관리를 해가며 가게도 운영할 테니. 매일 봐 드리는 건 힘들겠지만···, 혼자라도 우선은 연습해둬요, 정환 씨.”
이명진은 아들처럼 자신을 걱정하는 정우의 걱정을 괜찮다는 말로 일축했다.
축 처져 버리는 신정우의 어깨와 애써 돌아서는 이명진의 뒷모습이, 정환에게는 끈끈한 유대로 묶인 것처럼만 보였다.
사장과 매니저.
그를 뛰어넘는 사제 관계라.
과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긴자식의 바 운영이라.
정환은 그렇게 여겼다.
잔잔한 분위기가 싫은 듯 명진은 얼른 인자한 미소를 띠며 스태프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는.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다들 영업 준비를 해야겠죠? 시작합시다. 아르센의 하루를.”
평소와 같이 아르센의 시작을 알렸다.
2.
- 그래서 내가 말이야···
- 이거 마셔봐, 오빠! 이거 진짜···
- 위스키는 말이지, 응? 아주 섬세한 술로···
- 마스터!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제가 ···
- 프렌치75랑 피나 콜라다요! 체이서는···
북적한 아르센의 내부.
오늘도 손님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아르센은 아늑한 느낌을 가득 품고 있다.
그리고 그런 손님들을 대접하려 분주히 움직이는 바텐더들.
네 명이나 되는, 바 크기에 비해서는 많은 수의 바텐더들이 분주히 바 안을 누비며 손님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정환 씨. 파인애플 하나 부탁해. 백사이드 냉장고에 있을 거야.”
“기준 씨. 라임즙이 떨어졌네요. 착즙 부탁드립니다.”
바 프론트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마스터와 매니저. 그리고 바백을 맡은 한기준과 차정환은 각자의 포지션에 맞는 임무를 잘 수행해 내고 있었다.
오른쪽은 한기준과 이명진이, 왼쪽은 신정우와 차정환이.
짜놓은 듯 자연스레 맞춰진 페어에, 정환은 기준과 따로 마주치거나 함께 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 스르륵.
백사이드의 문이 열리고는 정환이 들어섰다.
백사이드는 여러 비품과 남는 재료, 그리고 술병 등을 모아둔 창고의 역할까지 함께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차분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한 사람.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함께 일했음에도 여전히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던, 선배 한기준이었다.
“어···, 기준 형. 라임즙인가요?”
“응.”
딱히 적대적으로 대하는 건 아니다. 묻는 말에도 항상 답은 해주고. 그 답이 길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처음에는 자신을 싫어하나. 그런 생각도 했던 정환이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함께 일하며 지켜본 결과.
원래 이런 사람이란 게.
정환의 결론이었다.
“···네. 하하. 전 파인애플을 찾으러···”
어색해도 어쩌겠나. 함께 일하는 사이고 또 선배인데. 정환은 뒷머리를 머쓱하게 긁으며 말끝을 흐렸다.
- 스윽.
라임을 짜던 기준의 손이 들린다. 살포시 백사이드에 있는 과일 냉장고를 가리키는 기준.
“아래쪽 두 번째 칸.”
“네?”
“파인애플.”
“아.”
무뚝뚝한 사람인 건 분명했지만, 기준은 기본적으로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미 위치를 알던 정환이었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감사해요. 형.”
“응.”
정환은 기준이 말해준 곳에서 파인애플을 꺼내 들고 백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파인애플처럼 껍질이 많이 나오는 과일은 영업 전이 아니라면 백사이드에서 이쁘게 다듬어 나가는 게 아르센의 방식이었다.
조금은 어색한 시간이 시작되려 했다.
바텐더라서일까.
같은 동료 사이임에도 정환은 이런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은 침묵도, 또 어색함도.
그에게는 늘 반갑지 않은 감정이다.
“···다다음 주죠? 형 데뷔전.”
“응.”
정환은 그런 어색함을 깨보려 그나마 기준에 대해 아는 말을 꺼냈다.
자신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부터 계속 나왔던 말이 기준의 데뷔전.
어색한 직장 동료와 나눌 말이.
일 얘기 말고 뭐가 있겠나.
“준비는 뭐뭐 하고 계세요? 보통은 데뷔전에 낼 칵테일을 정해두고 연습한다던데.”
“···뭐, 클래식 칵테일 정도.”
여전히 딱딱.
묻는 말에 맞는 답만이 기준의 입을 탔다.
정환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그럼 그날은 제가 바백을 보면 되는 건가요?”
“응. 정우 형이랑 마스터는 워크인 손님을 받아야 하니까.”
아마 여태 들은 말 중에 최대로 긴 답이 나온 거라. 정환은 그런 성취감에 슬쩍 옅은 미소를 지어봤다.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면 되겠지.
정환은 오늘의 성과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힘내요! 저도 맞춰서 잘 준비해둘게요!”
파인애플을 전부 다듬은 정환은 양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여 애교를 한 번 보여주고는 백사이드를 나섰다.
닫히는 백사이드 사이로.
기준이 조금은 웃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