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잔. 플로어 스태프.
1.
- 스으으으윽!
밀대가 거칠게 바닥을 쓸고 갔다. 숨은 먼지와 얼룩을 한 방에 지우는 노련한 걸레질. 연이어 마른 수건을 붙인 다른 밀대로 다시 바닥을 한 번 더 닦아주면 일은 완성된다.
- 끼이이이익!
“후우.”
내부가 넓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를 폈다.
그리 넓지 않은 매장이지만 닦아야 할 곳은 많았기에 허리에는 제법 뻐근함이 몰려왔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정환이 아르바이트생이나 청소부같은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환은 지금.
바텐더로 일하는 중이다.
“정환 씨. 바닥 다 닦았으면 과일 좀 가져다줄래? 밖에 트럭 소리가 나던데.”
“옙! 과일 가져오겠습니다! 내일 사용할 과일까지 주문하고 오면 될까요?”
“그래. 내일은 주말이니까 평소보다 두 배로 달라하고.”
“넵, 알겠습니다!”
매니저 신정우 바텐더가 정환에게 다른 일을 던져준다. 과일을 가지고 오라는 것. 단순히 짐을 나르는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환은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바텐더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순 있다.
초창기에 업계에 막 발을 들였던 당시의 정환 역시 그러했고.
멋들어진 정장 차림에 깔끔하게 올린 머리.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재즈 음악에 맞춰 잔뜩 진지한 표정을 짓는 사람.
그리고 화려한 손기술로 만드는 칵테일과 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까지.
겉으로만 보여지는 바텐더라는 직업은 딱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늘 냉혹한 법이다.
수면 위를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에게도 그 아래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발이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바텐더의 삶 속에도 이런 이면은 언제나 존재한다.
“아, 아르센에 신입 바텐더인가?”
“예, 아저씨. 저번 주부터 출근하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기합이 좋네. 열심히 해! 열심히!”
“넵! 내일은 주말이라 과일이 더 필요하다고 하시네요!”
“흠, 두 배란 말이지? 알겠네. 내일은 그리 배달해주겠네.”
바닥을 닦고 짐을 나른다. 어느 가게에나 기본으로 치부될 이런 일이, 정환에게는 일과의 시작이었다.
경력 1년 이상이라는 자격을 뚫고 들어왔다지만, 가게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다. 실제로 12년의 경력이 있건 없건. 증명할 수 있는 건 전무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정환은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우고 있다.
그래도 바닥을 닦고 짐을 나르는 건 제법 발전한 단계다. 지난 한 주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그저 조용히. 구석에 서서 바 내부를 지켜봐야만 했다.
가게는 가게마다 각자의 운영 방식이 있다. ‘바’라는 커다란 범주에 묶인다고 해도 이는 마찬가지. 지난 한 주는. 아르센이라는 바가 어떻게 흘러가는 곳인지를 파악하는 시간이었다.
정환은 가만히 서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바라만 봤다.
손님을 응대하는 마스터의 모습, 칵테일을 만드는 매니저의 모습. 그리고 이를 돕는 다른 선배의 모습까지.
정환을 포함해 총 4명이 일하는 아르센은 제법 체계가 잘 잡힌 곳처럼 보였다.
“이제 한 주가 지났으니 슬슬 일을 배워볼까요? 우선 바닥을 닦는 것부터. 그리고 간단한 일을 돕고 또···”
“손님을 응대하면 될까요?”
“정확해요. 잘 지켜봤군요.”
바에서 일하는 이상 전부 바텐더라는 이름으로 불리겠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하는 일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전부 다르다.
지금의 정환처럼 바닥을 닦고 잡일을 하며 손님의 맞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플로어 스태프. 바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가장 낮은 포지션이 플로어 스태프였다.
길게는 플로어 스태프로 1년 이상을 일하게 하는 가게도 있다. 생 신입이라면 그게 맞는 일이기도 하고.
다행히 이번 아르센에서는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구하던 이는 경력 1년 이상자이고, 또 그에 맞는 포지션을 채우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어 스태프는 잠시만 맡아주면 돼요, 정환 씨. 우선 정환 씨가 앞으로 우리 바에서 해줘야 할 일은···”
마스터 이명진 바텐더는 구석에서 과일을 다듬고 있던 젊은 바텐더에게 시선을 줬다.
매니저인 신정우 바텐더와는 차림이 다른 바텐더.
아직 재킷이 지급되지 않은, 조끼만을 걸친 무뚝뚝한 인상에 키가 큰, 한기준이라는 이름의 젊은 바텐더였다.
“기준 씨가 맡은 일을 그대로 물려받는 거니까요.”
“바백(BarBack)···. 인가요?”
“오, 정환 씨. 바백을 다 알아?”
마스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니저 신정우가 고개를 밀어 넣으며 끼어든다.
당연한 물음이다. 정환 역시 한때는 바백을 맡았던 경험이 있고, 그 덕분에 바 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니어 바텐더들이 칵테일 메이킹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 포지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기 기준 선배처럼요.”
“바에 대해 잘 안다더니···. 좋아. 음.”
바로바로 나오는 정환의 답에 정우는 만족스러운 듯 턱을 문질렀다. 아무런 볼 게 없던 정환의 이력서를 택했던 사람이 매니저 신정우. 정우는 정환이 빠릿한 모습을 보이면 괜스레 어깨가 올라갔다.
“맞아요. 바백. 기준 씨는 벌써 우리 가게에 온 지 1년이 넘었거든요. 이제는 슬슬 프론트로 진출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가 정환 씨를 뽑은 이유도 그 때문이죠.”
이명진 마스터는 잔을 닦으며 시선 없이 정환에게 말했다. 말투는 인자하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플로어 스태프의 일은 돌아가면서 맡으면 됩니다. 대신 안정적인 바백. 우리가 원하는 건 그거니 정환 씨는 기준 씨의 일을 잘 보고 배우도록 해요. 아직 지켜보는 게 끝난 건 아니랍니다.”
영업 시작 전에야 바닥도 쓸고 짐도 나르고. 할 일이 넘쳤지만, 영업이 시작된 이후에는 정환이 할 일이 급격히 줄어든다.
손님이 들어오면 응대하고 갈 때는 배웅하는 것. 그게 지금은 정환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바심을 내려 하진 않고 있다. 어차피 바텐더로 일하려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이고 이렇게라도 바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또, 마스터가 말한 바백이라는 포지션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긴자나 일본에서는 적어도 1년.
짧지 않은 1년이라는 시간을 플로어 스태프로 보내야 한다.
마스터는 잠시라는 애매한 표현을 썼지만, 말투로 봐서는 플로어 스태프로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영업이 시작되고 다시금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조용히 바 구석에 자리 잡은 정환은 아르센의 풍경을 감상했다.
아르센은 참 좋은 곳이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적당한 조명. 그리고 적당한 크기. 앤티크함을 과하게 끌어올린 요즘의 바들에 비하면, 오히려 더 정통에 가까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아르센.
- 찰각, 찰각, 찰각.
- 슬극, 슬극, 슬극.
- 또르르르륵. 착.
여느 바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가 아르센에서도 함께 들려왔다.
이미 한 주를 지켜보며 바텐더들의 실력은 실컷 봤다.
지금 정환이 주목하고 있는 건. 바텐더가 아닌 손님이었다.
바는 어디까지나 단골 장사가 80프로를 차지한다. 한 번 들른 손님이 다시 와주는 곳. 그게 곧, 살아남을 수 있는 바를 의미했다.
한 주에 두 번 이상. 정환은 딱 그만큼 오는 손님들의 얼굴을 차차 외워갔다. 그리고 그들이 주문하는 칵테일과 취향까지. 다른 신입이라면 감히 신경도 못 쓸. 그런 분야에 정환은 신경을 쏟고 있었다.
별다른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선임 바텐더로 있을 때 신입들이 해줬으면 했던 것들. 그런 걸, 이제는 신입의 입장에서 직접 해보고 있다.
견학이라는 이름으로 바의 풍경을 바라보란 말을 신입에게 전하면, 신입들은 정말로 바라보기만 한다.
정말 정말 백 명에 한 명 정도 뛰어난 신입이 있다면, 바텐더들의 움직임을 보는 정도.
하지만, 정말 선임들이 원하는 신입은.
이 견학 기간 동안.
손님을 볼 수 있는 신입이다.
정장 차림에 평범한 회사원 손님부터 접대를 위해 나온 영업직 손님, 그리고 커플과 홀로 이곳을 찾은 젊은 손님까지.
주로 무엇을 시키고, 또 시킨 술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내가 저 앞에 선다면 어떤 한 잔을 내보여야 할까. 그런 고민까지.
그렇게 손님을 바라보며.
정환은 아르센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냈다.
2.
일을 시작하고 한 달이 조금 안 되던 날.
유독 손님이 적은 평일 탓에 아르센은 한산한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일이야말로 단골이 없다면 바가 버틸 수 없는 기간들.
다행히 입소문이 나 있는 아르센은, 단골 역시 제법 많은 축에 들었다.
“그래서···, 이제 얼마 뒤면 기준 씨 데뷔전이 있다는 말이지?”
“예, 사장님. 꼭 들러주세요.”
“좋지, 좋아. 꼭 들러야지. 그날은 꼭 시간을 비워두겠네!”
얼큰하게 취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딱히 옆 손님에게 피해가 가진 않았지만, 바에서 나는 소리치고는 제법 큰 편이었다.
시선이 모이는 것도 당연.
구석에서 손님들을 살피던 난, 저 손님이 몇 잔째 마시고 있는지를 얼른 머릿속에 떠올렸다.
‘벌써 5잔인가.’
5잔. 중간중간 독한 술도 마셨으니, 딱 취기가 오를 즈음. 이대로라면 곧 자리를 뜰 것 같은 예감에 서둘러 배웅을 준비했다.
“이런···. 점점 취기가 도는군. 이만 가봐야겠어. 안 그럼 추태를 부릴 테니.”
손님은 정환의 예상처럼 품을 더듬으며 계산을 준비했다. 바 테이블 앞에서 취하는 건 손님들의 금기. 매너가 좋은, 과연 단골이라 부를 만한 손님이었다.
바 테이블을 조용히 빠져나와 외투를 들고 손님의 뒤로 섰다. 플로어 스태프가 하는 일 중 하나로, 외투를 받고 또 드리고. 그리고 배웅하는 것까지가 정환의 임무다.
“아, 신입이라고 했나? 행동이 빠르군. 역시 아르센이야.”
손님은 빠르게 다가온 정환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라는 건 별다른 게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손님을 웃게 만드는 것.
자신이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게 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손님은 계산하고 외투까지 챙겨 입은 후 문을 나섰다. 당연히 정환은 손님을 따라 문 앞까지 배웅을 나섰다.
“앞쪽에 계단이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아, 이 계단은 매번 깜빡한다니까. 고마우이.”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환은 손님을 향해 고개를 살짝 내리고 허리를 앞으로 아주 조금만 숙였다. 과하게 숙이지 않는, 딱 적당한 그런 각도로.
“흠. 또 보세.”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목길을 향해 걸어갔다. 여전히 정환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 뚜벅. 뚜벅.
손님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는 갔겠지. 강남의 대로가 마주하는 길로 손님이 충분히 접어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굽신거리는 건 아니다. 허리를 과하게 숙이지도, 또 봐달라며 크게 소리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정환이 바라는 건.
가는 길에 한 번 돌아봤을 때.
그때에도 자신의 모습을 본 손님이 슬쩍 미소 짓길.
그래서 자신이 충분한 대접을 받고 있었구나.
라고 느끼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친절함. 그를 넘어선 세련된 친절함이 있는 곳.
그게 정환이 생각하는 ‘바’와.
다른 술집의 가장 큰 차이였다.
고개를 들고 아르센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정환이 마주한 건.
“정환 씨.”
조용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마스터 이명진 바텐더의 모습이었다.
“아, 마스터.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손님은 잘 가셨나요?”
“기분 좋게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요.”
“흠. 그랬겠더군요.”
늘 인자한 표정을 달고 사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방금은. 유독이나 더 인자하고 밝은 표정이 마스터의 얼굴을 채웠다.
“예···?”
“아닙니다. 이제 슬 마감을 준비할까 해서요.”
“오늘은 조금 이르군요.”
“내일이 주말이기도 하고···. 더 오실 분도 없을 듯하네요.”
“들어가서 마감 준비하겠습니다!”
패기 넘치게 한마디를 남기고 뛰는 척을 하며 가게 안을 향했다. 그런 정환의 옷깃을.
“정환 씨.”
이명진 마스터의 말이 한 번 더 잡았다.
“이번 주말은 쉬고 와요. 다음 주부터는···. 바 테이블 안에서 만납시다.”
조금은 기쁜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