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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0화 (10/175)

10잔. 미래의 인연.

1.

- 똑똑똑.

노크에 반응하듯 들려오는 들어오란 소리.

정환은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문고리를 돌렸다.

정환이 들어선 방은 사방에 전공 서적이 가득한 지동철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먼지가 자욱해 보이는. 그래서 더 칙칙한 풍경의 방 안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09학번 차정환입니다.”

정환은 모니터 뒤로 숨은 지동철 교수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교수들에게는 우선.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다.

모니터에서 슬금 고개를 빼는 지동철 교수.

빛바랜 브라운 계열의 정장에 물까지 빠져 유독 볼품없는 차림새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볼품없음은 그의 복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머리하며 유행이 한참 지난 오래된 안경테까지.

거기에 수염도 듬성 자라 지저분한 그의 모습이,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년 퇴임을 눈앞에 둔 노교수라 부르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쉽게도 정환은 저 교수의 나이를 알고 있었는데.

이맘때면 지동철 교수는 아직 50이 넘지 않았다.

‘심하셨네···. 교수님.’

15년 전으로 거슬러 왔음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지동철 교수의 모습에 정환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누구라고? 09학번···?”

지동철 교수는 한쪽이 눈썹이 내려간 모습으로 정환을 향해 눈매를 좁혔다.

정환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다.

일문과만 해도 동시에 400명이 넘는 학생이 재학 중인 학과가 아닌가. 지동철 교수는 교양 수업까지 맡고 있으니,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을 기억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1학년 때 교수님 교양 수업을 들었습니다. 일문과지만요. ‘일본 근대 문학의 이해’란 과목이었죠.”

“아.”

과목명을 듣고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지동철 교수는 아마 여전히 모를 것이다.

1학년 때 정환이 저 과목을 들은 건 사실이다. 허나, 수업에서 눈에 보일 행동도, 또 그만큼 좋은 성적도 받은 적이 없는 정환을. 지동철 교수가 기억할 리는 만무했다.

‘학교에서 보니 어색하네···.’

정환은 잔뜩 경계하는 지동철 교수의 눈빛을 받아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학교에, 같은 과의 교수지만. 원래라면 둘은 5년 후에야 서로 이름과 안면을 트는 사이였기에 더욱 어색했다.

만나는 장소 역시, 학교도 아니었고.

지동철 교수와 정환의 만남은 지금부터 5년 후, 그것도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교환 교수로 일본에서 연구 중이던 지동철 교수.

그는 당시 정환이 일하던 곳의 단골이었다.

긴자에는 밤새도록 유명 바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즐기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부르는 용어가 바로 바 호퍼.

또는 밤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라는 뜻으로 나이트 캣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지동철 교수는 긴자에서도 유명한 바 호퍼이자 나이트 캣이었다.

남루한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심하고 세련된 손님이었다고 정환은 그렇게 지동철 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일하던 바의 마스터는 정환과 지동철 교수를 소개하며 인사를 나누게 했다.

정환은 한눈에 지동철 교수를 알아봤지만, 그는 정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은 교수도 아니었고, 또 그런 덕에 학생들에게 관심도 많은 교수도 아니었으니까.

처음에야 제자인 줄 알아보지 못했던 그였지만, 이후 이를 알고 난 뒤부터는 대우가 달랐다.

정환이 가게를 옮길 때마다 늘 따라다니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고, 독립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누구보다 응원해줬던 사람이 지동철 교수였다.

정환은 그런 응원군을.

다시금 만나러 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차정환 군이라고 했나?”

“옙, 교수님. 차.정.환.입니다.”

“09학번이면 교양이라도···, 내 수업을 들은 게 2년도 더 전일 거 같은데? 고문학 수업은 아직 멀었을 테고···”

인기 있는 교수가 아니라서일까.

지동철 교수는 학생이 자신을 찾아온 게 어색해 보였다.

풍기는 분위기며 외관까지. 오히려 찾아오는 학생들보다는 피하는 이들이 많았던 그였기에 촌스러운 안경테 너머로 전해지는 눈빛이. 그리 따스하지는 않았다.

정환이 지동철 교수를 찾아온 건 단순히 이전의 인연이었던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라는 그런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15년 후. 그러니까 정환이 한국으로 떠나려 막 호텔의 치프 바텐더 자리를 내려놨을 무렵.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던 정환을 만류했었다. 바텐더로서 긴자라는 곳에서 인정받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고 또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았던 그였기에 이를 말렸던 것이다.

지동철 교수는 한국에서 나만의 바를 가지고 싶다는 정환에게 역으로 긴자에 바를 열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긴자라니.

서울 역시 땅값이나 점포세가 싼 편은 아니지만, 도쿄는. 특히나 그 도쿄에서도 고급스럽기로 유명한 긴자는.

감히 바텐더 출신의 오너가 가게를 가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엄청난 땅값에 엄청난 점포세. 그리고 기타 제반 비용까지. 모은 돈이 절대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긴자라는 곳에서 바를 여는 건 정환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정환에게 지동철 교수는 자신이 투자금을 대겠다는 말을 전했다.

다른 일본인들 역시 정환에게 투자 제안을 한 적은 많았지만, 그게 긴자라는 지역인 경우는. 지동철 교수가 처음이었다.

- 재산이 조금 있네. 친가 쪽이 사업을 크게 했었거든. 경영을 포기하는 대가로 상속받은 부동산과 현금이 제법 있지. 자네가 허락만 한다면. 내가 투자하고 싶군. 수익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자세한 액수까지 말해줬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정환. 그저 태어나 처음 들어본 액수였고 입을 쩍 벌렸던 기억이 전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환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 교수는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바를 열 것을 제안했고 그건 정환이 바라던 꿈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환의 꿈은. ‘한국에서’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까.

모아둔 돈이면 한국에서 자립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도움은 다음에 받겠다는 말로 지동철 교수의 호의도 거절했고.

그래도 언제고 한 번은 도와주겠다던, 지 교수의 덧붙이는 말을 정환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 언제든 연락을 주게. 기왕에 말을 꺼낸 일. 내가 한 번은 도와주겠네. 이런 개인 사정을 말한 건 자네가 처음이기도 하고···. 또 자네의 술을 다시 마실 수만 있다면···. 돈 따위는 아깝지도 않으니.

일전에는 거절했던 호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모아둔 돈도 없고 모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12년이라는 시간만큼 참고 참으며 돈을 모을 생각도 없고.

정환 지금, 빠르게 자신만의 바를 가지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게 투자자를 찾는 일이었다. 일할 곳과 함께 떠올렸던 투자자. 그리고 그 투자자란 단어가 고심 끝에 향한 곳이, 바로 지동철 교수였다.

물론 마냥 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지금과 15년 후 그때와는 다르니까.

그도 내게 끌리는 무언가가 있어야 지갑을 열지 않겠나.

오늘은 그를 꿰어 낼 수 있는.

그 계기를 만들러 온 것뿐이다.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아직 출근은 전이지만 영업을 좀 해볼까 해서요.”

“영업···?”

영업이란 말에 지동철 교수의 눈매가 다시금 변했다. 따스하지 않던 눈빛이. 이번에는 냉기를 머금었다.

정환은 더 차가운 눈빛이 발하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바에 가시는 걸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바텐더로 일하게 되어서요. 꼭 한 번 들러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바텐더라는 말이 나오자 지동철 교수는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따스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흥미가 생긴 눈빛이 정환을 향했다.

“···내가 바를 좋아한다? 누가 그러던가?”

“수업 때 들었습니다. 일본에 가실 때면 늘 긴자에 들르신다는 말씀이 기억나서요. 마침 연구실 앞을 지나가는데 생각이 나더군요.”

“음.”

앞서 미리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라 말해둔 덕분일까.

수업 때 들었다는 말에 지동철 교수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수업 중에 한 말을 전부 기억할 수야 있겠나.

거기에 실제로 자주 가는 긴자까지 들먹이니, 지 교수는 정환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바텐더라···. 쉽지 않은 길을 가려는군. 뭐, 전공 교수이니 말려야 하나? 한국에서 바텐더로 일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재미는 있다고 들었습니다.”

“재미야 있겠지. 어디까지나 실력이 좋을 때 이야기지만. 어디든 실력이 좋지 않으면 재미도 없고···, 또 도태되는 법일세. 특히나 바씬이라는 곳은 더욱 그런 편이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경력은 있는가?”

“바에서 일하는 건 처음입니다. 조주기능사 자격증은 따놨지만, 바에 서본 적은 없습니다.”

“신입이라···. 시간이 걸리겠군.”

긴자의 바호퍼가 아니랄까.

지동철 교수는 바텐더 업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처럼 말을 술술 이어갔다.

시간이 걸리겠다는 그의 말은.

새끼 바텐더가 칵테일 메이킹을 허락받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가게는 어디인가? 영업을 하러 왔다더니.”

“청담의 아르센이라는 곳입니다.”

“아르센?”

긴자야 제집처럼 드나드는 그였지만, 한국의 바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강남이야 한 번씩 들르는 곳이지만, 강남보다야 긴자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지 교수였다.

“괜찮은 곳입니다. 한 번 들려주세요.”

“명함이 있으면 놓고 가게.”

의외의 사실이지만, 바텐더들도 각자 명함을 가지고 있다. 손님 중에 명함을 건네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들과 반대로 전해줄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직 명함은 없습니다.”

“아. 일하기 전이라 했던가.”

“예.”

지동철 교수는 명함이 없다는 말에 정환의 몸을 차분히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마치 사람을 가늠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명함이라.

당연히 정환도 전하고 싶었다.

명함이라는 게 시니어 바텐더 이상은 되어야 나오기에 당장에 손에 넣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통곡스러울 뿐.

원래 이런 영업이 그렇다.

지동철 교수의 성격도 그렇고.

정환이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나간 후면.

지동철 교수는 며칠 내로 정환이란 존재를 잊을지도 모른다.

명함같이 그 존재를 계속해서 상기시켜 줄, 무언가가 없다면 말이다.

“흠, 그렇군. 아르센이라 했나? 내 한 번 들르지. 그만 가보게.”

지동철 교수는 흥미가 끝났다는 듯 정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선을 떼는 그의 눈빛이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하지만, 정환은.

이대로 방을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명함은 없습니다만···. 흔적을 하나 남겨도 되겠습니까?”

애써 한마디를 더 던지는 그의 모습이, 이번 만남에 승부수를 던질 모양이었다.

“흔적?”

“이대로 가면, 잊히지 않을까 해서요.”

“생각보다 많은 걸 바라는 학생이군.”

정환을 바라보는 지동철 교수의 눈에 다시금 흥미가 찾아왔다. 재밌다는 듯 한 번 웃은 그는.

“해보게.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걸 해보란 말을 남겼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정환은 연구실 안쪽으로 조금 더 깊게 들어갔다.

지동철 교수의 책상이 있는 곳까지 다가서는 정환.

정환은 처음 들어오는 순간 눈길을 던졌던 한 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정환이 멈춘 곳 앞에는.

지동철 교수가 모아둔 술병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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