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잔. 호텔 바텐더.
1.
“차정환 군.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시험장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길.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환은 걸음을 멈췄다.
정환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금 전 시험장에서 심사위원으로 자리를 지키던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심사위원을 돌아봤다.
심사위원이나 진행요원.
이런 사람들이 시험을 막 치른 사람을 쫓아오는 게 그리 유쾌한 이유는 아닐 테니까.
“아니. 아무런 문제는 없네. 그저 대화나 조금 나눴으면 해서. 관광대 교수, 김태현이라고 하네. 조금 전 실기시험 심사를 봤었네만.”
김태현 교수는 달려오며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정환이 받아든 그의 명함에는.
- 現) 한국 관광대학교 식음료 학과 교수 김태현
- 前) 그레인 호텔 그룹 F&B 총괄부장
- 前) 그레인 호텔 서울 라운지 치프
라는 이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별 건 아니네. 그저 정환 군이 혹시 호텔에서 일할 생각이 있나 해서. 만약 그럴 생각이 있다면, 내가 그레인 호텔에 자리를 알아봐 주겠네.”
김태현 교수는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며 정환을 당황케 했다. 그레인 호텔이라는 곳이 그렇게 작은 곳은 아니기에 정환의 표정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다.
정환은.
어쩌면 제법 괜찮은 자리에 스카웃 당한 걸지도 모르겠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자네의 실력은 잘 봤네. 독보적이더군. 어차피 호텔 쪽으로 일을 할 생각이면 그레인으로 오게. 후회하지 않을 걸세.”
김태현 교수는 정환이 당연히 호텔 쪽 취업을 노리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조주기능사 자격증이야 대부분 호텔 취업하는 이들이나 따는 것. 김 교수의 추론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호텔 쪽은 현재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환은 최대한 정중하게, 모가 나지 않은 태도로 사양하는 말을 전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호텔 바는 고려하지 않고 있는 정환이었다.
“호텔 쪽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일반 업장인 바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호텔에 간다면 경력을 쌓은 후로 생각 중입니다.”
“······.”
김태현 교수는 살짝 넋이 나간 모습이다. 당연하다 믿었던 것이 깨어지면. 나오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호텔이라.
바텐더를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호텔 바에서 일하는 것 역시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호텔은 일반 업장에 비해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곳으로, 이는 바텐더에게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일반 업장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의 술들을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고, 손님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품질 역시 평소에는 경험해보지 못하는 수준까지 이룰 수 있다.
허나, 이런 폭넓은 자유 속에는 엄격한 제한 역시 가득한 법.
호텔은 규모가 큰 만큼 철저한 규정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호텔 바텐더는 평범한 바텐더가 아닌 호텔의 직원이다.
규모가 큰 호텔들은 저마다 인사 규정이란 게 정해져 있었고, 바텐더 역시 이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
신입으로 입사한 호텔의 바텐더가 마음껏 술을 만들 수 있는 시니어 바텐더가 될 때까지.
일반 업장에 비해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곳이 바로, 호텔 바였다.
경력을 쌓은 후 입사하는 바텐더의 경우에는 예가 다르다. 그들의 경우 언제든 나갈 수 있고 또 특별하게 입사한 케이스니까.
허나, 신입의 경우.
특히나 정환처럼 실력에 자신이 있는 신입의 경우에는.
호텔이 그렇게 좋은 선택지가 아닌 건 분명했다.
마지막 커리어를 호텔에서 보냈던 정환은 이런 호텔 바의 생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레인 호텔이 별로라면 다른 곳 역시 알아봐 줄 수는 있네. 그저 내 욕심에 자네를 데려가려는 건 아니란 뜻이네. 도움도 주고 싶고···, 실력이 워낙에 뛰어나서 말이지.”
“아뇨. 정말 호텔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허면, 조주기능사 시험은 왜 응시한 건가···? 호텔 취업도 아니면···”
조주기능사 시험의 심사위원이 할 말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저런 말을 하는 김태현 교수의 모습을 보니.
정환은 그저 도움을 주고 싶어서라는 그의 말이, 더욱 믿음이 갔다.
“일반 업장에서 다들 경력을 요구해서요. 없는 경력을 만들 수도 없고···”
“경력을 대신할 자격증이 필요했다?”
“그런 셈이죠.”
“허.”
경력을 대신해 자격증을 준비했다는 말에 김태현 교수는 혀를 찼다.
가끔은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경력 대신 본다는 말은 들었다. 허나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은. 전부다 오너급의 경영자 바텐더가 아니었나.
23살에.
경력도 없는 어린 바텐더 지망생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기는 처음인 김태현 교수였다.
“그런 거였나···. 제대로 헛다리였군.”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안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미안하다. 하지만 감사하다. 평범한 말이지만, 솔직하게 뱉는 정환의 말에 김태현 교수는 표정을 풀었다.
꼭 호텔로 데려가야겠다는 그런 생각에 뛰쳐나온 건 아니기에. 그 역시 포기가 빨랐다.
“오해는 말게. 자네를 이용하려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니었으니.”
솔직히 의심은 했다. 쉽게 포기하는 태도와 다른 호텔도 괜찮다는 그의 말에 의심이 사라지긴 했지만.
“해서, 다른 바는 알아보고 있는 건가?”
“그냥 사람 구하는 곳이 있다는 정도만요. 자세한 건 우선 결과가 나오고 생각하려구요.”
“흠, 지금 바로 고민하는 게 좋을 걸세. 합격은···. 뭐, 말 안 해도 알 거라 믿네. 위치는 어느 쪽을 보고 있나? 일정한 위치를 정해 놓고 찾는 게 좋을 텐데.”
“현재는 강남 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리도 가깝고 바들도 많으니까요.”
“강남이라. 좋은 선택이지.”
자신이 내민 제안에 거절했음에도 계속해서 호의가 이어졌다.
어느새 경계심이 풀린 정환은 구직 어플의 화면을 켜 놓고 김태현 교수와 일자리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흠, 노벰버와 아티치···, 믹스트와 아르센이군.”
“아시는 곳들인가요?”
“물론이네. 몇몇 곳은 단골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지. 관련학과 교수니, 연구비를 쓰기에도 좋고.”
김태현 교수는 정환이 보여준 화면을 보며 신이 난 듯 설명을 이어갔다.
각 바의 특성과 분위기, 그리고 정말 단골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업장 내 사정까지.
인터넷으로는 알 수 없는 그런 정보가 김교수의 입에서 쏟아졌다.
“노벰버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하는 사람들이 말이야. 신입이 성장하기 힘든 타입이지. 아티치는 곧 가게를 이전할 예정이고··· ······ ···.”
김교수는 신난 듯 바에 대한 정보를 건네줬다. 길게 각 바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그 설명의 마지막엔.
“아르센이 어떻겠나?”
딱 한 곳. 아르센이라는 바에 가보란 말을 김태현 교수는 남겼다.
“아르센이요?”
“다른 바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곳이네만. 자네처럼 실력 좋은 신입이 성장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라네.”
바에 대한 평가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김태현 교수가 추천하는 곳이 진리는 아니기에 정환은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아, 그리고 거기 마스터가 긴자 출신이네.”
그의 다음 말이.
정환을 아르센이란 곳으로 이끌었다.
2.
김태현 교수는 계속 연락하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명함을 주고 간 것으로 모자랐는지 기어이 정환의 번호를 받아내고 나서야 발을 돌렸던 김태현 교수였다.
실기시험의 결과는 당연히 합격이었다.
심사위원이었던 김태현 교수가 넌지시 합격이란 말을 계속 흘렸기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결과가 나온 날 정환은 바로 이력서를 작성했고 한 바에 이를 보냈다. 당연히 그곳은.
김태현 교수가 말해준, 아르센이란 곳이었다.
김 교수는 아르센의 마스터가 긴자 출신이란 말을 보탰다. 일본 최고의 유흥거리이자 바 문화의 중심지, 긴자.
정환이 처음 바텐더를 시작한 곳 역시 긴자였으며 주변의 인정을 받아 알량한 명성이나마 날렸던 곳도 긴자였다.
긴자 출신의 마스터가 운영하는 바라면.
신입으로 성장해 경력을 쌓는 그 과정이.
정환에게 훨씬 유리할 수도 있다.
‘최대한 빠르게 메이킹을 허락받아 바텐더로 인정받아야 해. 그리고···’
적당한 경력이 쌓이면 투자자를 찾아 나만의 바를 만든다. 정환은 자신의 최종 목표를 한 번 더 다짐했다.
이력서를 넣고 3일이 지나자, 아르센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바들의 연락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 필요한 도구는 챙겨오셔도 됩니다.
란 말이 있었던 거로 봐, 칵테일을 직접 만들어 보는 과정이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좋지. 도구는 가서 빌려 쓰면 그만이고.’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일은 더 쉽다.
그런 생각과 함께, 어느덧 면접일이 다가와 정환은 아르센이 있는 강남으로 향했다.
3.
- 딸각, 딸각, 딸각.
“마티니, 완성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끝인가요?”
“네, 끝입니다. 면접 결과는 차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어···, 그냥 지금은···?”
“연락드리죠.”
하얀 재킷에 윈저 노트로 넥타이를 두른 중년의 남성이 면접자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전했다.
눈앞에서 탈락을 통보하는 말을 하면 구구절절한 사연부터 시작해 근거 없는 다짐까지.
말이 계속해서 길어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마스터. 이번 면접자도 별로였나요?”
조금 전 면접자가 만든 술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년의 남성에게 또 다른 사내가 다가왔다.
같은 재킷에 같은 넥타이를 입은 젊은 사내. 이름표에 적힌 이름이 비슷하기만 했다면, 부자 관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한 모습의 두 바텐더였다.
아쉽게도 두 바텐더의 명찰은 서로 다른 성을 표시하고 있었다.
중년 남성의 명찰에는 이명진이란 이름이, 젊은 사내에게는 신정우라는 이름이 명찰에 새겨져 있었다.
명찰의 끝에는 작게 Arsen(아르센)이라는 가게 이름도 함께였고.
“실력은 나쁘지 않더군요. 플레어 바에서 1년 정도 일한 경력도 있고. 하지만···”
“이제는 적당히 고르셔야 해요. 기준이도 있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무언가 부족하다.
명진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크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하고 있는 건 분명 아니다. 그저 바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바텐더라면 기본으로 가져야 할 마인드.
그것만 바라고 있음에도 새로운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다음 면접자는 몇 시라고 했죠?”
“네 시쯤에 올 겁니다. 근처에 살더군요. 경력은 따로 없었습니다.”
“정우 씨···. 무경력자는 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조주기능사 자격증이 있어서요. 바에 대해 잘 안다는 자기소개서도 있었고···. 혹시나 해서 한 번 뽑아봤습니다. 이제 더는 뽑을 사람도 없어요.”
“흠. 그런가요···. 어쩔 수 없군요.”
앞서 면접을 본 세 명의 면접자 모두 성에 차지 않았던 명진은 마지막 면접자 역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명진은 어떤 면접을 봤기에 경력 1년 이상의 바텐더들도 그의 면접을 뚫지 못한 걸까.
많은 면접자를 탈락시킨 명진의 면접은.
조금 특이했다.
면접의 내용은 바텐더가 되어 손님에게 대접할 마티니를 한 잔 만들어 보라는 것.
그게 전부였다.
마티니.
칵테일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클래식한 칵테일로, 진과 드라이 베르무트를 스터로 저어주면 되는 간단하지만 어려운 칵테일이 마티니였다.
허니. 어렵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맛을 내기 위해 있는 말.
맛을 신경 쓰지 않고 모양만 내는 완성품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완성할 수 있는 칵테일이 마티니기도 했다.
명진은 당연히 마티니의 맛을 평가하진 않았다.
이제 1년 경력의 신입이 아닌가.
업계에서는 맛있는 마티니를 만들기 위해서는 30년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1년 차에게 맛있는 마티니를 만들라고 할 정도로 명진은.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보는 건 단순했다.
그저 마티니를 만드는 과정.
그 과정에서 바텐더로서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또 바텐더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명진은 단지 그걸 보고 싶었다.
거침없이 술병을 골라 서슴없이 마티니를 만들던 면접자들의 모습이 명진의 눈앞을 스친다.
그리고 굳어버리는 명진의 얼굴.
‘역시 무리였나.’
어쩌면 그냥 생초보를 데려다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뽑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명진을 스쳤다.
힘이 조금 더 들겠지만, 성실한 사람이나 찾아봐야지. 명진은 이제 달관까지 하며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는 어느덧 4시를 가리켰고,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새로운 면접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4시에 면접 보기로 한 차정환입니다.”
잘 생기고 키가 큰.
미소가 잘 어울리는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