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3화 (3/175)

3잔. 당장에 처리할 일.

1.

2012년이라.

정환이 아직 정상이라면.

그러니까 지난 15년이 잠시 꾼 꿈이 아니라면.

분명 정환이 있던 곳은 2027년의 한국이었다.

나이는 이미 38이었고, 그건 친구들도 마찬가지.

지금처럼 함께 부대끼며 지내던 이런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났다는 뜻이다.

그럼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뭐로 해석해야 할까. 꿈? 아니면 주마등?

실존하는 건지도 모르는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길 잠시. 정환은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하기로 했다.

이게 꿈이나 주마등 같은 그런 거라 여기기에는. 온몸에 닿는 공기며 습도, 또 온도···.

모든 감각이 이게 현실이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서둘러 거울을 바라봤다. 원래도 주름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마흔을 바라보던 때와는 다른 젊고 파릇한 모습이 거울을 비추고 있다.

딱 기억 속에 있는 20대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잠깐···, 이게 진짜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20대, 과거, 그리고 15년 전.

그런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스치자, 얼마 전까지 자신의 발목을 잡던 무언가를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손목.

서둘러 손을 들어 올려 손목을 살폈다. 원래라면, 2027년이었다면. 계속해서 떨리고 있어야 했을 그 손목을.

‘제발···, 제발···.’

이게 현실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달콤한 꿈이라도 좋다.

그렇다면 잠시라도 좋으니 멀쩡한 손목으로 이 꿈을 즐기고 싶다.

정환은 그런 생각에 질끔 감은 눈을 뜨고 손목을 바라봤다.

멀쩡하다.

아무런 떨림도 없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손목이 정환을 반겼다.

‘보자···, 여기가 내 자취방이라면···’

여기가 정말 과거고 그 시절의 자취방을 그대로 구현해둔 거라면 이미 이곳의 구조는 익숙하다.

정환은 서둘러 상호의 침대 밑으로 들어가 작은 아령을 하나 꺼내 들었다.

고작 5kg짜리 아령이지만 손목이 멀쩡한지 확인하는 거에는 충분할 거다.

그렇게 여기며 이미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오른손으로 아령을 들어 올렸다.

“되, 된다!”

아령은 아주 가볍게 들렸다. 멀쩡한 손목에 기쁜 정환은 아령을 쥔 손목을 여기저기 돌리며 아주 기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생생하다. 너무도 생생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래, 이건. 절대 꿈이나 주마등은 아니다.

여기저기 몸을 써보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젊어진 내 몸과 멀쩡한 몸을 가지고 내가 눈을 뜬 이곳이.

현실이란 걸 말이다.

그렇다면 왜? 또 어떻게?

무엇 때문에 또 어떻게 여기로 돌아왔냐는 의문이 남는다.

‘설마 그 바텐더가···?’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의심이 가는 건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에 마주했던 바텐더와 그날 마셨던 칵테일.

- 칵테일의 이름은···, 파라슈트.

정환은 마지막으로 들렸던 바텐더의 말을 겨우 떠올렸다.

파라슈트라니.

낙하산이라는 뜻이 아닌가.

추락하던 내 인생의 낙하산이란 말일까.

그래, 어쩌면.

이제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진 삶에서 한 줄기 낙하산이 되어줄 기회가 이렇게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점점 정환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만약 이게 현실이고 내가 계속 여기서 살 수 있다면···’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몸은 멀쩡하고 15년간 바텐더로 살며 쌓았던 경험은 그대로 머리에 남아있다.

감각과 경험. 바텐더라는 직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그 두 가지. 거기에 멀쩡한 신체까지.

모든 것을 이뤘던 이전 생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마지막 남은 꿈을.

어쩌면 이번 생에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만의 ‘바’라는 하나의 가게를 넘어 세계 최고까지. 손목이 다침으로 그 시작조차 꿈꾸지 못했던 마지막 남은 꿈을 다시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느새 거울 속 정환의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사태를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야, 너 씻어라. 석훈이 놈 올 때까지 준비 안 하면 또 무슨 소리 들으려고?”

라는 상호의 말과 함께, 당장에 처리할 일이 먼저 생겼다.

2.

과팅이라.

그래, 이 나이 때는 그런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뻤으며 기대하곤 했다.

이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찬란한 대학 생활을 꿈꾸는 것. 군대라는 남성만이 바글한 곳을 막 탈출한 복학생에게는 과팅만큼 삶에 활력이 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정환은 다르다.

과팅이라는 말과 이성이라는 것에 끌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거기에 상대로 나온다는 이들 역시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이 되는 21살의 어린 학생들.

이미 마흔을 바라보던 정환에게 그런 자리는 아무런 흥미가 없는 요소였다.

상호를 붙잡고 대충 몸이 아프다는 핑계, 생각할 일이 있다는 핑계, 그리고 다른 이를 구해보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전했다.

마음씨 좋고 또 너그러운 상호라면.

이런 내 말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잠시.

상호는 걸쭉한 욕설이 섞인 문장을 읽어주며 서둘러 씻고 옷을 입어란 말을 전했다.

15년 후에야 너그럽고 인상 좋은 아저씨가 되는 상호지만, 20대의 혈기왕성한 상호는.

그런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석훈이 역시 마찬가지. 담배를 한 갑 사서 돌아온 석훈은 얼떨결에 씻고 대충 옷을 입은 정환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안 간다는 말을 살짝 남겨봤지만, 돌아온 답은 상호 때와 같았다.

그렇게 제법 촌스러운 옷을 갖춰 입고는 어디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대학가 주변의 한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안주 적당히 시켜두고 기다리래.”

“누가? 미진이가?”

“응. 다들 미진이 후배들이니까.”

“이야, 미진이 덕을 다 보네.”

“뜯긴 돈이 벌써 10만원이야. 오늘 진짜 여자친구 제대로 만든다, 내가.”

“고맙다, 석훈아. 니 돈 덕을 다 본다, 내가.”

“반 내놔, 나중에.”

“야야, 단톡방 팠다. 들어왔어?”

“응. 들어오는 순서대로 1부터 3까지 맞지?”

“깔끔하게 선착순..”

별 영향가 없는 대화들. 석훈과 상호는 단톡방을 파 들어오는 순서대로 숫자를 입력하고 선착순으로 그 순서의 여성과 짝을 이루자는 규칙을 정했다.

정환은 그저, 둘의 행동을 귀엽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노력이야 가상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과팅에서 석훈은 동생에게 뜯겼다는 10만원의 가치를 전혀 회수하지 못한다.

석훈이에게 여자친구는 정환의 기억상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생기지 않았다.

- 피식.

헛웃음이 났다. 너무도 진지해 보이는 둘의 태도 때문일까. 이게 뭐라고.

어쩌면 그 당시에는 나도 둘과 같은 그런 태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정환은 오래된 기억을 슬쩍 꺼내 보려 했다.

‘분명 첫 과팅이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이자 마지막 과팅이었다. 대충 기억나는 건 분위기는 좋았고 재밌게 잘 놀았으며 다들 기분 좋게 헤어졌다.

하지만 별다른 매력이 없어서였을까.

정환의 무리 중 이날 만난 여학생과 이후 연이 닿은 사람은 분명 없었다는 게 정환의 기억이었다.

‘한 명 정도 엄청 이쁜 애가 있었던 거 같은데···’

셋 모두 매력적인 여학생이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학생이 한 명 더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군대를 막 전역했기에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아 그녀의 숫자를 먼저 치는 건 실패했었다. 다만. 종일토록 자신의 신경이 그 아이에게 꽂혀있었단 것.

정환이 기억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루. 그것도 고작 몇 시간을 만난 사람을 10년이 넘도록 기억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얼마나 이뻤기에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새로 본다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잠시, 정환은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기로 했다.

지금 정환의 감각은 한참 뒤인 2027년에 맞춰져 있다.

2012년도에 제아무리 꾸미고 이쁘게 치장을 한다고 해도, 촌스러운 티를 숨기진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이내 기대를 접기로 했다.

‘21살한테 내가 무슨 생각을···’

“야, 야. 온다, 와.”

석훈이 술집의 입구를 보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동생에게 미리 들은 인상착의의 여성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상호와 정환의 고개 역시 빠르게 돌아갔다.

한 손에는 구형 스마트폰, 그리고 한 손은 탁자를 잡고 이들의 시선이 모두 입구를 향했을 때.

멀쩡해진 정환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 타타타타탓!

단톡방에 3이란 숫자를 연타하고 있었다.

3.

술자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런 자리가 원래 어색함이 넘칠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석훈은 술자리에 어색함을 남겨둘 놈이 아니었다.

“우선 다들 한잔하시고···”

석훈은 자연스레 사회자를 자청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매번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건 석훈의 몫.

상호와 정환이 적당히 맞장구만 쳐준다면, 술자리에서 석훈을 따라올 사회자는 없었다.

물론, 늘 사회만 보고 여자친구는 얻지 못했지만.

술이 들어가면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고 긴장이 풀리면 대화가 편해지며 주변에 앉은 이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는 바텐더들이 말하는 술의 가장 대표적인 마법. 바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걸 아는 듯 석훈은 자연스레 단체 잔을 여러 번 권했고 과하지 않은 진행에 참석자들은 저마다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당연히 잔에 든 술은 소주.

몇 잔이면 거나하게 취할 수 있는 소주에 비해 물 마시듯 들어가며 취하기 어려운 맥주는,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크나큰 사치인 법이다.

“이 오빠 진짜 웃겨요!”

“그러니까! 대박!”

“내가 웃긴 게 아니고···”

“아니, 그래서 얘가 그때···”

“자, 짠-!”

“짜안-!”

그렇게 여섯이나 되는 이들이 소주를 몇 병이나 비웠을까. 이내 분위기는 무르익으며 제법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오갔다.

실없는 농담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는 친근감을 쌓기에는 충분했다.

여학생들 역시 우리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고 다들 취기를 빌려 친근한 사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환이 기억하는 결말과는 다른.

그런 분위기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왜?’

기억이 잘못된 걸까. 분명 이 과팅의 결말은 그저 한 번의 즐거운 술자리. 그게 전부였거늘 지금의 분위기를 보면 그런 결말이 전혀 상상되지 않을 정도였다.

정환은 살짝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와 전체적인 흐름을 관망했다.

그리고 이내 정환의 눈에 활기차게만 보이는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한 가지 이질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열심히 눌렀던 3번.

그 3번의 주인공인 전시은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한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청초한 얼굴에 유행을 타지 않을 거 같은 스타일까지.

지금이 아닌 정환이 있던 곳에 데려다 놓아도 아무런 이질감이 없게 느껴질 모습의 그녀는 취기가 제법 올라 텐션이 높은 다른 여학생들과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참여는 하고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모습.

다시 말해 분위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게 딱, 그녀의 모습이었다.

정환은 찬찬히 그녀의 주변을 관찰했다.

술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또 홀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바텐더는 늘 그 이유를 찾고 해결하고 싶어 한다.

정환이 그녀를 빤히 본 건.

절대 사심이 아니란 말이다.

정말로.

그렇게 그녀의 주변을 훑길 잠시. 정환은 이내 그녀가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정환이 찾은 건, 그녀의 앞에 놓인 잔이었다.

“술을 못 드시나 봐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시은이 놀라듯 반응했다. 자리가 시작되고 개인적으로 말을 걸어 온 건 처음이기에 그녀가 놀라는 거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 잔도 안 드신 거 같아서요.”

정환은 최대한 술을 강요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의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한 손으로 가리킨 그녀의 잔에는 작은 층이 생겨 술과 먼지가 분리되어 있었다.

“아···, 사실 소주를 잘 못 마셔서요.”

“소주를요?”

“맛이 조금 독해서···”

“소주가 독하긴 하죠.”

“특유의 맛이 입에 잘 안 맞더라구요.”

“그런 분들이 많아요. 저도 가끔 그렇고요.”

“아아. 네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오늘 처음 본 낯선 사람.

아직 취기가 오르지 않은 시은에게 처음 보는 사람과 길게 대화를 나누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환은 이런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다.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테이블 위의 여러 안주와 물, 그리고 음료들.

“저, 소주가 맛이 독해서 못 드시는 거라고 하셨죠?”

“예? 네. 맛이 입에 잘 안 맞아서요···.”

“그럼 맛있는 술이 있으면 드실 생각은 있으세요?”

“네?”

“아. 강요하는 건 아니고···, 혼자 심심해 보이셔서요.”

“마시는 건 좋아해요. 근데 굳이 저 때문에 다른 술을 시키는 건···”

시은은 정환이 맥주나 다른 술을 시킬까 살짝 걱정하며 거절하는 의사를 보이려 했다.

이해는 간다. 맥주도, 또 이맘때 유행하던 사와 같은 술들도 한 번 시키기 시작하며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주류들이다.

이는 대학생에게 쉽지 않은 금액들. 시은은 그간 술자리를 보내며 이런 일을 많이 겪은 눈치였다.

“다른 거 시키려는 건 아니에요.”

“그럼···?”

다른 걸 시키려는 게 아니란 정환의 말에 시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환은 그런 그녀를 향해 밝게 한 번 웃어 주며 말했다.

“모히토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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