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잔. 낙하하는 것은.
1.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깔끔하게 잘 꾸며진 ‘바’ 내부에는 별다른 손님도 없었고 그런 바에서 무심한 듯 잔을 닦던 바텐더 역시 정환을 알아보지 못했다.
바는 제법 괜찮은 모양새였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과는 달랐지만, 정통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기본에 충실한 모습으로 꾸며진 바였다.
화려하지 않은 인테리어에 적당한 조명. 바텐더는 보타이에 자켓을 걸쳐 어깨가 무척 넓어 보였고 백 바 역시 부족한 술이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곳을 몰랐다니.’
정환은 조금 구석진 바 자리에 앉아 연달아 위스키를 몇 잔 마시며 몰아냈던 취기를 다시 불러왔다.
“같은 거요. 더블로.”
그렇게 몇 잔을 더 털어 넣었을까.
어느덧 시야가 다시 흐릿해져 가며 올라오는 취기에 정환은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이 그저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정환에게 조용히 다가오는 이곳의 바텐더.
‘축객령인가···’
쫓아내려는 걸 거라. 그렇게 예상했다. 바에서는 취객을 반기지 않는다.
특히나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혼자 들어와 이렇게 위스키를 더블로 연달아 마시는 그런 손님이라면 더더욱.
정환 역시 이런 손님이 자신의 바에 왔었다면 응당. 축객령을 내렸을 것이다.
바텐더는 바를 운영하고, 또 지키는 사람이니까.
“······.”
잔뜩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바텐더를 노려봤다.
못난 모습이란 걸 알면서도, 괜스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흥, 나가란 말만 해봐라···’
잔뜩 시비를 걸어줄 테다.
잔뜩 비뚤어져 취기란 핑계로 그런 못된 생각까지 하며 바텐더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손님.”
“······.”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잔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바텐더의 입에서는 예상과 조금 다른 말이 나왔다.
“예···?”
“위스키만 드시더군요. 스트레이트로 계속. 괜찮으시다면 제 오리지널 칵테일을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나이가 적당히 있어 보이는 바텐더는 친절하면서도 덤덤한 어조로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하.
오리지널 칵테일이라.
바텐더는 저마다 자시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 기존에 통용되는 칵테일이 아닌 자신 고유의 창작 칵테일.
바를 기준으로 시그니처라는 말도 쓰지만, 그게 바텐더 자신만의 레시피라면, 오리지널 칵테일이란 말이 옳을 것이다.
정환은 바텐더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연달아 독주를 마셔 취기가 오르려는 손님에게 한 번쯤 숨을 고를 틈을 주려는 것.
그래서 취기를 조금 낮추고 적당히 진상짓을 하기 전에 잘 타일러 돌려보내려는 바텐더의 온화한 대처법이라는 것을.
정환도, 바텐더‘였’으니까.
“허.”
헛웃음이 났다. 이제야 정면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못난 모습들.
바텐더가 저런 말을 꺼낼 정도로 최악으로 굴었던 걸까.
그토록 아끼고 좋아했던 공간에서 이런 추태라니.
부끄러움이 몰려오자, 얼른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에 정환은 바텐더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권하는 한 잔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으로.
바텐더는 손님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능숙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 척. 척. 척.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바툴(BarTool)을 다루기 시작하는 바텐더. 얼음부터 재료를 손질하며 셰이커와 술병을 준비하는 그의 손놀림이 화려했다.
‘실력이···’
제법이다. 그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닌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과 정확한 계량. 그리고 여유로운 표정과 알맞게 준비된 재료들까지.
일류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실력의 바텐더가, 어느새 셰이커를 올려 들고 셰이킹을 시작했다.
- 찰그락, 찰그락, 찰그락.
얼음과 함께 찰그락 소리를 내려 섞여 가는 칵테일.
바텐더는 마치 셰이커와 하나가 된 것처럼 호흡하며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위로. 마치 파도가 너울을 치듯 셰이커를 흔들었다.
‘파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그런 바텐더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파도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가장 이상적인 셰이킹의 리듬, 그 자체를.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포커스가 나간 렌즈처럼 주변이 날아가고 오로지 바텐더의 셰이커만이 눈에 들어오던 그때.
- 착!
바텐더는 셰이커를 멈추고 얼음으로 차게 칠링 해둔 잔에 셰이커 속 음료를 붓기 시작했다.
넋을 잃은 정환의 시선이 그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 스윽.
앞으로 밀어지는 칵테일 잔. 바텐더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코스터 위에 올린 잔을 내밀며 짙게 웃었다.
“······.”
칵테일 이름은 뭐냐. 기주(基酒)는 뭘 썼고? 의도는? 또 비율은? 영감은 어디서 받았고?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의문을 입 밖으로 쏟아내려다가 바텐더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묵묵히 잔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모습이. 얼른 맛부터 보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꿀꺽.
고여오는 침과 함께 몸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잔을 잡으려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럼 감사히···”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리다. 이미 손은 이런 작은 잔에 담긴 술조차 한 손으로 들어 올리지 못했다.
특히나 다리가 얇은 글라스라면 더더욱 힘들 정도.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두 손으로 잔을 꽉 쥔 정환은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술을 삼켰다.
- 호르륵.
한 모금 정도. 딱 그 정도가 혀에 닿았을 때.
!!!!
맛있다. 머릿속에 떠돌던 수많은 의문과 계산은 일시에 지워지고 이내 백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백지에 또박또박 쓰여가는 단 세글자.
맛있다.
다른 생각은 모두 접어두고 오로지 그 짧은 문장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이면. 이 칵테일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12년이라는 세월을 칵테일의 곁에서 보냈다.
이제는 한 모금 마시는 정도면 어떤 술이 쓰였고 또 어떤 음료가 쓰였는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도 않은 수준.
그럼에도.
방금 마신 술의 정체를.
정환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건 이름이···?”
이제야 백지가 되었던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고 바텐더 쪽을 바라봤다.
이름은 뭐냐, 뭘로 만들었고? 그렇게 질문을 쏟아내려 입을 마저 떼려 할 때.
- 휘청.
갑작스레 어지러움이 몰려오며 앉은 채인 몸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취기···?’
쌓였던 취기가 한 번에 폭발하는 걸까. 조금 전 차렸던 정신이 무색하게 계속해서 흔들리는 몸을 가누려 최대한 애를 썼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야가 흐려져 간다.
머리마저 무겁고 마치 잠들기 일보 직전의 그런 상황.
몸은 균형을 잃었고 완전히 넘어가고 있음에도, 정환의 시선은.
오로지 칵테일에 향해 있었다.
“칵테일의 이름이 궁금하신 거군요.”
옆으로 점점 기울어져 가는 정환을 내려보며 바텐더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흐려져 가는 정환의 귓가에.
“파라슈트(parachute).”
라는 바텐더의 선명한 말이 들린 걸 마지막으로.
정환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2.
“정환아. 야. 차정환-!”
거칠게 흔들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환은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눈을 떴다.
밝게 켜진 백색 형광등 아래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개의 얼굴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얘 왜 이러냐?”
“어제 적당히 먹였어야지. 오늘이 제일 중요한 날이랬잖아.”
“아니, 내가 먹였냐? 지가 먹은 거지.”
“어쨌든 인마.”
자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두 얼굴을 보며 정환은 눈매를 좁혔다.
여기가 내 집이라면. 적어도 내가 어제 바에서 정상적으로 나와 집으로 잘 온 것이라면.
정환의 집에는 이렇게 자신을 깨워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얌마, 차정환. 너도 빨리 일어나. 약속 늦겠다. 준비해야지.”
약속이라.
병원을 다녀온 후 바텐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누구와도 약속을 잡지 않았다. 은거와 같은 상태에 있던 정환에게 약속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지금 말을 걸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굴까.
깨질 듯한 두통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들고 일어서 이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들이다.
“어···? 어···!”
“어, 어!는 무슨. 빨리 준비해. 상호가 먼저 씻고.”
상호. 그리운 이름이 들려왔다. 분명 대학 동기이자 그 시절 정환의 룸메이트.
간간이 일본으로 자신을 만나러 몇 번이나 건너왔던 그 친구의 이름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런 이름을 뱉은 또 다른 사람.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낯설지만 분명 아는 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그의 얼굴에 남아 있다.
“석훈이···, 강석훈···?”
“그래, 뭐? 어제도 봐 놓고 왜 이렇게 아련한 표정이냐? 그런 표정은 나중에 쓰게 넣어둬.”
“어제···?”
어제라니, 이건 무슨 말일까.
어제 분명 홀로 술을 마셨고 홀로 정신을 잃었다.
어쩌다 이들과 함께 지금 이곳에 누워있는 걸까, 그런 고민을 머리에 올린 것도 잠시.
이내 자신이 누워있던 곳이 얼마 전 새로 입주한 오피스텔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여긴···?”
“얘 오늘 왜 이러냐? 어제 뭐 잘못 먹었어?”
“어제 좀 마시긴 했지. 나 먼저 씻는다?”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는 정환을 두고 상호는 속옷 차림에 수건만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 상호가 지나간 자리에 보이는 낡은 방에 침대와 이불, 그리고 체리빛 나무문으로 된 오래된 자취방의 풍경.
이곳은 정환이 대학 시절 서울에 얻었던 그 자취방임이 분명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상한 건 자신이 있는 이곳의 풍경뿐만이 아니다.
“야, 정신차려. 오늘 가서 헛소리하고 분위기 망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니까. 어렵게 잡은 자리야.”
“······.”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 강석훈.
이미 마흔을 바라보며 제법 주름살이 늘었어야 할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어리게 보였다.
“약속?”
“이놈 봐라, 이거. 기억 못 할 줄 알았다, 내가.”
“······.”
잔뜩 어려진 석훈은 얼굴에 어울리게 어린 시절의 말투로 말을 뱉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정환은 석훈의 말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오늘 과팅하기로 했잖아. 항공서비스 11학번 애들이랑. 까먹었지?”
“과팅?”
“하, 얘 또 이러네. 불쌍한 복학생들 구해주겠다고 내 동생이 잡아준 과팅이잖아. 너 군대에 정신 두고 왔냐? 아직 군대물이 다 안 빠져서 그런가···”
“야야, 냅둬라. 전역 3달째면 아직 군바리지. 흐흐흐.”
상호는 대학생 때 늘 문을 열고 샤워했다.
마치 지금이 그때와 같다는 듯, 상호의 목소리가 석훈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준비해라. 담배 사러 갔다 올게. 옷 입고! 머리에도 뭐 좀 바르고! 술도 깨!”
“어, 어···?”
벙찐 표정의 정환을 두고 나가는 석훈의 모습 뒤로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하는 상호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홀로 남겨진 정환은 조용히 방안을 둘러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건 다 뭘까.
폭풍처럼 스치고 간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
마치 내 것이라는 듯 바로 옆에 충전기와 함께 놓인 구형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조심히 버튼을 눌러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정환이 올려든 스마트폰의 화면에는.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오후 5시.]
라는 믿을 수 없는 숫자만이 번쩍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