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화 (1/175)

1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0.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 오래된 소설의 제목이 내 이야기가 될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법이다.

1.

“흐음.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네.”

빼곡히 채워진 술장을 보면 언제나 만족스러운 표정이 지어진다.

바에서 흔히들 백 바(Back Bar)라 부르는 이 술장은 언제나 바텐더가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동료이자, 바의 자산인 곳이다.

백 바를 포함한 ‘바(Bar)’ 내부는 한옥을 모티브로 삼아 인테리어를 꾸몄다.

여긴 정환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여는 가게. 그런 만큼 한국의 정서를 가장 살린 모습으로 꾸미고 싶다는 게 정환의 바람이었다.

이미 바텐더로서 쌓을 만큼 명성도 쌓았고 경력 역시 12년을 넘어간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바를 여는 건 처음이기에 설렘과 긴장, 그리고 기대가 정환의 온몸을 채웠다.

정환은 대학교 졸업반이던 시절 일본에 유학을 가 처음으로 바텐더라는 직업을 접했다.

그리고 전공과 상관없이 일본에서 바텐더로 일하기 시작한 게 벌써 12년 전.

1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일본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고, 마지막 2년은 일본 최고들만이 모인다는 육성급 호텔 사카이 호텔의 치프 바텐더로 경력을 쌓았다.

이제 경력과 실력은 무르익었고 해볼 것도 모두 해본 상태. 정말 낭만적이고 오글거리는 마음속 남은 하나의 꿈 외에는, 더는 이룰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정환은 일본에서 이룬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 문화라는 것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국보다 한참 앞서는 선진국이지만, 가슴 속에 남은 작은 꿈은 역시나 한국에서 이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신만의 바를 가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바가 아닌 자신만의 바를 월드 베스트 바로 만드는 것.

정환은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시작이야.’

그래, 이제 시작이다.

나만의 바를 열고 내 실력을 토대로 그 바를 아시아 베스트를 넘어 월드 베스트 바에 올려놓는다. 이제 보름 후면, 그 꿈을 향한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정환은 그런 생각에 턱을 당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 짝, 짝, 짝!

가볍게 뺨을 두들기고는 앞치마를 조여 맸다. 이제 오픈까지 정말 보름 밖에 안 남은 상황.

그전까지 처리해둬야 하는 일들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우선은 연습부터···’

오픈 전까지 준비할 게 무척이나 많았지만, 결국 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텐더의 실력이다.

서비스와 분위기, 그리고 인테리어가 모두 트렌드에 맞아도 결국 맛없는 칵테일을 애써 마시러 오는 이는 없을 테니까.

‘흠, 김렛부터 해볼까.’

어떤 칵테일을 먼저 연습할까 고민하던 끝에 김렛이란 칵테일을 떠올렸다.

진을 베이스로 라임즙과 셰이크해 만들어 내는 김렛은 정환이 가장 좋아하고 또 자신 있는 칵테일이다.

‘진은 넘버 쓰리(No.3)···, 라임은 착즙으로.’

재료를 한 번 되뇌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우선은 잔. 다리가 얇은 잔을 하나 준비해 그곳에 얼음을 채워 잔을 식혀두는 칠링(Chilling) 작업을 제일 먼저 마쳤다.

다음으로 준비하는 건 셰이커.

술을 섞어 줄 셰이커와 함께 계량컵인 지거(Jigger)를 옆에 둔 정환은 마지막으로 진을 찾으려 백 바로 돌아섰다.

손이 닿기 쉬운 아래층.

진과 보드카 등 여러 칵테일에 주로 쓰이는 술은 늘 이 아래층에 보관해 두는 게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손이 빠르게 여러 병을 스쳐 가길 잠시.

이내 손은 작은 열쇠가 붙어 있는 넘버 쓰리 런던 드라이 진의 보틀을 찾아냈다.

이제 병을 들고 돌아서 지거로 계량하고, 셰이킹 해주기만 하면 끝.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며 어떤 강도로 셰이킹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 정환이 기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 저릿.

술병을 들어 올리던 오른쪽 손목에 무언가 저릿한 통증이 스치더니, 정환은 그만 술병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 쨍그라아아아앙!

술병은 주변에 술을 흩뿌리며 무심하게 깨져버렸다.

추락은 그렇게.

정환이 가장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2.

“차정환 환자.”

“예.”

“2번 진료실로 가실 게요.”

무심한 말투의 간호사는 환자의 얼굴을 한 번 스윽 보고는 고갯짓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얼굴이 향한 곳에는 차례대로 순번을 매긴 진료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의 통증이야 바텐더라면 늘 겪는 일이다.

셰이커를 흔드는 셰이킹부터 술을 스푼으로 젓는 스터까지.

바텐더가 쓰는 모든 기술은 손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들이다.

이렇게 매일 쓰는 손목에 연습까지 더해지니, 만성적인 통증을 가지고 있는 거도 당연한 일.

처음에는 그저 그런. 늘 있는 그런 통증이라 그렇게 여겼지만, 정환은 이내 몸이 평소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손 떨림이 멈추지 않으신다고요. 맞습니까?”

떨림. 아무런 힘도 자극도 주고 있지 않은 손이.

떨림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통증은 늘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손목을 평소에도 많이 쓰시나요?”

“일하다 보면 아무래도···”

굳이 직업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의사의 소견을 기다렸다.

의사는 조금 전 찍어둔 손목 엑스레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병명을 알겠다는 그런 신호일 것이다.

“손목을 많이 쓰셨고, 또 엑스레이로 보이는 것도 좀 있네요. 흐음···. 혹시 키엔벡 병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유감이지만 그게 의심됩니다.”

“예?”

“월상골 무혈성 괴사라고도 하죠. 사진으로 보이는 예후가 거의 확정적입니다. 상태가 좋지 않아요. 당장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입니다.”

월상골 무혈성 괴사.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은 둘째치고 연달아 나오는 의사의 말에 정환은 넋을 잃고 말았다. 수술이라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수술···이라면?”

“손목에 월상골이라 부르는 관절을 빼내야 합니다. 초기라면 한 번의 수술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차정환 환자의 경우는 말기입니다. 한 번의 수술로 끝난다는 보장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

“저···, 선생님···, 그게 무슨···”

“도대체 손목으로 뭘 하신 겁니까? 운동선수도 이 정도로 괴사가 진행된 경우는···. 통증이 전혀 없었단 말입니까?”

“······.”

만성적인 통증은 있었다.

그저 그 만성적인 통증이 일을 잘 수행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는 훈장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문제였을 뿐.

해외에서 체류 중이었던 특성상, 병원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고.

“······.”

“유감입니다만, 최소한의 움직임이라도 살리려면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 괜찮으시면 오늘 일정을 잡고 가시죠. 저도 시간을 내 볼 테니···”

“···수술은 여러 번 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 환자분 상태라면···, 여러 번이 필요할 겁니다.”

“여러 번 수술하면···, 평소처럼 손을 쓸 수는 있고요?”

이제는 다른 원인으로 떨리기 시작하는 어깨와 손.

정환은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의사에게 조곤히 말을 물었다.

담담하게 뱉는 의사의 말이. 정환에게는 너무도 잔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평소처럼이라···.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 직업은 바텐더입니다. 셰이킹과 스터···, 혹시 아시나요?”

“······.”

이건 아는 사람의 반응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모니터에만 시선을 주던 의사는 어느새 몸을 틀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정환과 눈을 마주쳤다.

“바텐더셨군요. 셰이킹과 스터라면 저도 조금은 압니다. 셰이킹은 강하게 흔드는 거고, 스터는 섬세하게 젓는 걸 말하겠죠.”

“···예. 맞습니다.”

“······.”

의사의 눈이 감겼다.

고민한 거라.

가능성을 찾는 거라.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 후우우우.

괴로운 듯 한숨을 내뱉는 의사.

그는 무언가를 다짐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이내.

“유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저를 겨우 잡는 정도. 그게 한계입니다.”

정환에게 사망 선고와도 같은 말을 남겨 버렸다.

3.

셰이킹을 하지 못하는 바텐더.

또 스터를 하지 못하는 바텐더.

아니, 그 모든 걸 포기하고라도, 술병조차 잡지 못하는 바텐더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오랜 기간 바에서 일해온 정환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절대 없다고.

바텐더가 하는 모든 일에는 손목이 필요하다.

얼음을 조각하는 아이스 카빙부터 과일을 준비하는 과정과 또 술을 계량해 비율을 맞추는 것까지.

당장에 셰이킹과 스터가 아니라도, 손목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는 뜻이다.

- 차라랑!

“젠장-!”

또.

또 셰이커를 엎어 버렸다.

무리해서 잡으려던 게 문제였을까.

손에 꽉 쥐려 양손으로 올려 든 셰이커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저 멀리 굴러가 버렸다.

“끝인가···”

끝.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커리어의 끝이 이렇게 다가오는 걸까.

이제야 새 출발을 하며 밝은 미래를 그리던 야심 가득한 정환의 포부는, 어느새 갈 곳을 잃어버렸다.

바텐더가 아닌 다른 삶이라.

그런 걸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12년간 내가 정말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오직 바 테이블 너머에서 술을 만들던 순간. 그게 전부였으니까.

‘꿈···’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던 꿈이란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만의 바를 만들고 이를 세계 수준의 바로 만들겠다던 다짐도. 이제는 공허한 허상이 되어버렸다.

정환은, 모든 걸 잃은 것이다.

- 덜컥, 콰앙!

거칠게 문을 열고 그대로 거리로 뛰어갔다.

내가 열 곳, 내가 꾸던 꿈을 이룰 거라 믿었던 그곳에 한 시라도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런 때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독한 술이라도 마시러 다른 바에 들러볼까. 그런 생각도 잠시, 얼른 고개를 저었다.

바씬(Bar scene)이 얼마나 좁은지, 정환은 모르지 않았다.

‘비웃겠지···, 수군거리고.’

일본에서 얻은 명성 덕에 한국에서도, 특히나 바텐더들 사이에서 정환의 얼굴은 제법 알려진 편이었다.

유명 잡지나 방송에 얼굴을 비춘 적도 있으며 몇몇은 일본까지 와 정환이 연 세미나를 듣고 기술을 배운 이들도 있다.

감히 그들에게 찾아가 지금의 상황을 하소연할 자신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들 앞에서 잔을 들어 올릴 그런 용기도 없었고.

갈 곳이 없다.

돌아갈 곳도, 또 나아갈 곳도.

그런 생각에 자신의 모습이 더욱 비참해지자, 발길은 어느새 편의점의 작은 테이블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 끼이익!

거칠게 문을 열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손에 작은 초록병을 몇 개 들고 밖으로 나왔다.

깡소주.

흔히들 말하는 병나발을 그대로 불며, 소주를 빈속에 들이부었다.

제아무리 센 술인들, 병나발로 속에 때리는 소주만 할까. 그런 생각으로.

비릿한 맛이 혀를 타고 흘러 속을 불태웠다.

평소에는 즐겨 찾지 않던 소주의 맛이, 오늘은 유난히 달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몇 병을 속에 때려 박았을까.

또 자리에서 일어서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취기라는 이름의 본능에 몸을 맡겨 무작정 발을 옮기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주택가에서 번화가로, 또 대로에서 골목길로, 다시 주택가로. 인사불성이 된 몸을 비틀거리며 걷길 수십 분.

어느덧 정환은 인적이 드문 한 조용한 주택가의 골목길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여긴 어딜까.

그저 아무런 인적도, 또 드문한 가게도 없는 골목에 주홍빛 가로등 만이 거리를 비추던 그때.

“욱!”

부글거리는 기운이, 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나발로 때려 넘긴 술이, 언제 마지막으로 먹은 지도 모를 위장 속 음식물을 불러내려 했다.

“우욱!”

주변의 담벼락으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쓴맛과 함께 느껴지는 여러 복합적인 맛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속을 더 게워내고 나서야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후우우우.”

이제야 정신이 조금 든다.

술 냄새 가득한 호흡을 내뿜으며 그런 생각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때.

무언가 하나의 간판과 같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Bar Asile]

‘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불이 켜진 건물이라곤 없고 상가로 보이는 건물 역시 없다.

그저 주택가만 가득한 조용한 골목길에, 지하로 향하는 작은 문만이 Bar Asile 이란 표지와 함께 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요즘 들어 주택가를 개조한 바들이 늘어나고는 있다지만, 이건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지 않나.

그런 생각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살펴봤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조명 하나로 계단을 밝히고 있는 풍경. Asile 이라는 이름도, 또 이런 곳에 바가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선 날 몰라보지도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자, 정환의 발은.

어느새 바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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