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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 저거, 저거··· 갑자기 웬 지랄이야? 나랑 무슨 철전지 원수가 졌냐?’
안드레아만의 시기심일 테지만 팰리스와 원수진 건 맞았다.
문제는 어떻게 임무를 회피할까 눈치 보던 지휘관들에게 ‘독박’쓸 대상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찬성합니다. 배달의 영주님은 한 지역을 지배하는 로듭니다. 허울뿐인 작위를 가진 저와 달리 작금의 곤란함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은 나도 잘 몰라. 그보다 중요한 건, 나만 아니면 돼!’
“저도 찬성합니다. 배달이라는 이름이 생소하지만 로드는 로듭니다. 영주답게 시급한 수송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것으로 믿습니다.”
‘흐흐흐~ 마침 잘됐다. 너무 위험한 임무였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찬성···”
눈치 보던 지휘관들이 떠벌이며 팰리스에게 수송문제를 떠넘겼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문제였기에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
팰리스는 속이 탔지만 침묵을 지켰다.
그가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고 변명하면 그 자신만 구차해질 것이다. 혹, 구차하더라도 그럴 가능성만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의향이 있었다.
‘저런 새끼들이 그렇게 되도록 가만 놔두겠어? 괜히 나선다면 나만 구차해지고 역효과만 발생한다. 젠장~ 이럴 때는 똑똑한 피리온이 있어야 했는데.’
천재적인 피리온이라면 곁에서 커다란 눈만 끔뻑이는 토머스와 달랐을 것이다.
그라면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이다.
팰리스는 말없이 속만 끓였다.
다행히 이곳엔 팰리스에게 호의적인 오르도스가 사령관이었다.
“그만! 그대들은 염치도 없소? 알다시피 팰리스 영주와 병력들은 오늘에야 도착했소. 당분간은 휴식을 통해 체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오. 게다가 어찌 돌아가는지 시간을 줘야할 것 아니겠소?”
군대에서 100Km를 행군했던 사람들이라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걸어서 이동하는 훈련이 가장 힘든 훈련이라는 사실을···
팰리스군은 자그마치 한 달을 이동해 이곳에 막 도착했다.
당연히 다른 영지군의 경우처럼 7~10일간 정비하고 체력을 회복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아참~ 그렇군요.”
“아~ 아깝··· 험험~”
지휘관들도 염치가 있어 주장을 철회하려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안드레아가 또 찬물을 끼얹었다.
“사령관님, 당연히 정비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단, 걸어서 왔다면요.”
“응? 그게 무슨 뜻이지?”
“사령관님. 팰리스군은 모두 말이나 수레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병사들의 피로도가 낮아 당장 시급한 수송문제를 담당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팰리스 배달 영주님?”
“···”
‘저 새끼 정말··· 정말로 나랑 원수졌나?’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줘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르도스 사령관도 더 이상 도와주지 못할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소이까? 그럼, 배달 영주님이 제일 적당한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령관님, 배달 영주님이 수송문제를 책임져야 합니다.”
‘에라이 새끼들아~ 좋아, 더러워서 내가 맡는다.’
“좋습니다. 급한 수송문제를 저희 배달영지가 담당하겠습니다.”
“배달 영주. 괜찮겠나?”
그나마 팰리스를 생각해 주는 이는 오직 오르도스 백작뿐이었다.
“사령관님. 싫어도 어쩔 수가 없는 분위기잖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찌릿~’
백작의 서늘한 시선에 몇몇 양심이 찔린 지휘관들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일부였고 대부분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배달 영주. 군무(軍務)에는 허언이 없다. 정말로 그대가 보급문제를 해결하겠는가?”
“넵, 사령관님. 임무를 맡겠습니다.”
팰리스가 약속한 순간,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휘유~ 다행이다.”
“후우~ 죽을 뻔했네.”
“···”
‘저 새끼들이 정말··· 정말 얄밉네. 두고 보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몇 배로 돌려주겠다.’
나중에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지만 현재의 팰리스는 이렇게라도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각설하고, 이렇게 해서 팰리스군은 오르도스에 도착한 첫날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급한 정비를 마치고 다시 초원으로 이동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 * *
다음날 이름 없는 초원.
정기보급부대를 성공리에 접수한 주먹과 퉁구스의 전사들은 그동안 전리품을 참으로 알뜰하게 챙겼다.
모든 것이 부족한 바바리안이다.
그중에서도 (타이칸의 간섭을 받기 때문에)더욱 힘들게 생활하는 퉁구스 부족이었다.
보급품이 실린 수레와 무기, 철제품은 당연히 챙겼다.
여기에 죽은 귀족과 기사들의 갑옷, 장신구, 신발과 옷. 하다못해 죽은 병사들이 입었던 옷과 신발 하나까지 정말 꼼꼼하게도 챙겼다.
이틀 동안이나 말라붙은 말똥(땔감 대용)까지 챙길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찝찝하게 그런 것까지 챙기느냐고?
일교차가 심한 초원에서 밤바람을 맞다보면 피 묻은 옷이라도 감지덕지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퉁구스 영역으로 복귀할 시간이 되자 300명의 전사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짐이 많아졌다.
자근애기가 주먹에게 이점을 언급했다.
‘피식~’
“걱정하지 마. 우린 제국 놈들이 선물(?)한 수레 20량이 있잖아. 그리고 수레는 포로들에게 운반하게 할 거야.”
주먹의 말마따나 사지가 제법 멀쩡한 150여명(경상자 포함)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참고로, 바바리안에게는 사람도 부족했다.
포로는 노예로 삼거나 매매할 수가 있어 귀중한 전리품에 속했다.
그리고 중상자나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자는 초원에서 생존할 수가 없다.
주먹은 바바리안의 전통대로 그들을 고통 없이 죽이고 포로로 하여금 매장, 사체가 몬스터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짐이 많으면 빨리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알다시피 기동성이 떨어지면···”
자칫, 제국군에게 꼬리를 잡힐 것이고 전리품의 욕심 때문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그래서 제국군에게 들키지 말아야겠지.”
“어떻게요? 그것이 우리가 그렇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후후후~ 안심해. 돌아갈 때는 당연히 놈들이 점령한 곳을 크게 우회하여 복귀할 거야.”
주먹은 귀찮았지만 목적이 있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안심한 자근애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미안해요. 제가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하하하~ 알고 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지, 뭐.”
“고마워요, 주먹 오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별다른 피해 없이 원하던 것을 모두 얻었다.
테라칸 부족에게 전리품 절반을 바치고도 부족 모두가 넉넉하게 나눠가질 만한 양이었다.
“들어라, 용맹한 퉁구스의 전사들아~ 우린 제국 놈들에게서 정당한 몫을 아주 넉넉하게 챙겼다. 그렇지 않나?”
“와하하하~ 그렇습니다. 대장님.”
“챙겨도 너무 많이 챙겼습니다.”
“이왕 챙기는 거, 더욱 많이 챙깁시다.”
“하하하~ 텡그리께서 과한 욕심은 자신과 동료를 위험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주먹이 잠시 말을 끊고 전사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모두들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쯤 만족하고··· 집에 가자!”
“와아~ 집에 가자.”
챙길 만큼 챙겼던 전사들이 기분 좋게 출발했다.
웃고 떠들며 이동하는 전사들.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초원이다.
주먹은 시력이 좋은 정찰병을 운용하여 느리지만 안전하게 이동했다.
몬스터가 자주 나타난다는 초원지대였지만 무리의 규모가 제법 컸다.
주변에 얼쩡거리던 몬스터들이 함부로 공격하지 않아 별다른 방해 없이 이동했다.
3일이 지나자 잔뜩 겁먹고 움츠렸던 포로들이 제법 기운을 차렸다.
[비록 노예로 고생하겠지만 다행히 죽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고향에서도 노예처럼 살았는데, 뭐. 살자! 악착같이 살아남자.]
이쯤 체념했는지 포로들이 순순히 지시를 따랐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도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 무렵을 제외하면···
다음날 정오, 퉁구스부족의 전사들은 그들처럼 ‘수확’하러온 병력으로 추정되는 일단의 무리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1,000여명으로 구성된 바바리안의 대규모 약탈부대. 제국군이 이동흔적을 발견하고 오르도스 백작에게 경고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참고로, 그들이 이대로 계속 남하한다면 보급임무를 맡아 북상하려는 팰리스군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주먹은 즉시 전사들에게 최고 수준의 경계태세를 지시했다.
아무리 동족이라도 이런 황무지에서는 힘센 자가 곧 법이었다.
병력이 아군의 3배를 훌쩍 넘겼기에 너무도 당연한 조치였다.
다행히 주먹이 우려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깃발이 대칸의 넷째이자 유력한 후계자인 ‘위대한(姓) 지혜(名)’임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지혜? 지혜님이 왜 출전하셨지?’
가진 용맹보다는 두뇌로 인정받아 차기 대칸으로 유력한 위대한 지혜. 주먹이 알기로는 그가 출전해야할 순번은 한참 뒤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근애기를 흘깃거렸다.
대칸은 테라칸을 체질부터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성(姓)을 ‘위대한’으로 개명하는 한편 은밀하게 지혜와 (퉁구스의 차기 샤먼인)자근애기를 혼인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은밀한 뒷거래였기 때문에 자근애기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전사로서의 체면 때문인가? 자근애기 때문에 출전했나 보군.’
주먹의 추측이 맞았다.
친위전사 100명과 함께 접근한 지혜가 주먹과 대거리했으나 틈나는 대로 자근애기를 흘깃거렸다.
“···나도 이젠 테라칸의 당당한 전사야. 그래서 대칸께 졸라 순번보다 일찍 출전한 것이지.”
‘역시 자근애기에게 자신을 자랑하려고 출전했군?’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전사의 수가 꽤···”
“아~ 저들?”
지혜가 턱짓으로 멀찍이 도열한 전사들을 가리키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1,00명으로 구성된 약탈부대는 상당히 과한 규모였다.
“원래는 친위대 100명만 데려올 생각이었어.”
“친위대만 말입니까? 하긴, 친위대라면 100명으로도 충분했겠군요.”
“하하핫~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막 출발하려는데 하릴없이 놀고 있던 전사들이 함께 데려가 달라고 사정해서 말이야. 귀찮지만 차기 대칸으로써 내가 자비를 베풀어 동행을 허락했지.”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지혜는 정말로 자비를 베푼 것이 맞았다.
바바리안은 강력한 전사가 존경받고 대우받는 사회인데 강자의 곁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 강자와 함께라면 전리품을 안전하고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오~ 역시··· 역시, 유력한 차기 대칸답습니다.”
‘피식~’
“텡그리께서는 아부하는 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뭐, 귀에는 역시 너무도 부드럽군.”
“아이고~ 지혜님. 대칸께서도 인정하신 지혜를 가지신 지혜님이 아닙니까? 제가 어찌 지혜님께 아부하겠습니다. 저 주먹은 진실만을 말합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아부는 ‘칭찬’과 더불어 상대가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호의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지혜는 이런 자신을 느꼈는지 일부러 공적인 화제를 꺼내들었다.
“험험~ 이번 수확이 꽤 짭짤했나봐? 무슨 피해는 없었나?”
지혜가 20량의 수레와 가득 실린 전리품 그리고 15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먹은 지혜의 미소에서 약간의 의심을 읽어냈다.
“지혜님의 염려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만족할 만한 전리품을 거뒀습니다. 수레의 절반은 당연히 대칸께 바칠 것입니다.”
“오~ 그래? 당연하겠지. 그것이 바로 충성의 맹세한 부족으로써 당연한 자세겠지. 하하하~.”
그제야 지혜가 완전히 의심을 지우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 대목에서 자근애기가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자근애기를 추종하는 전사들도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가 좋은 지혜는 즉각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그래, 차근차근 진행하자. 나에게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칠 때까지···’
지혜는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지자 이쯤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험험~ 억센 주먹. 이쯤 가봐야겠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지혜님께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거두시라고 텡그리께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고맙고. 이제 그만 가자! 이랴~”
지혜와 그를 호종했던 친위대가 떠났고 그 순간 알게 모르게 올려놨던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퉁구스와 테라칸의 전사들은 길을 마주쳐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주먹과 퉁구스 전사들은 북부로, 지혜와 1,000여명의 전사들은 제국군 정기보급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그 시간, 보급부대의 임무를 떠맡은 팰리스는 오르도스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27. 팰리스 배달 VS 위대한 지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