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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오르도스로 향하는 길.
“영주님. 그거야 당연히···”
얄밉게도 토머스가 일부러 말을 끊었다.
* * *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히힛~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당연히 숨쉬기지 뭐겠어요?”
“숨 쉬는 수련이라면 설마··· 마나호흡?”
“당연하지요. 설마 말을 탄 채로 달리기를 할까요, 아니면 검술을 수련할까요? 당연히 숨 쉬는 수련밖엔 없지요.”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그런데 왠지 모르는 패배감과 함께 기분이 나빠졌다.
피리온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야~ 마나호흡이잖아. 그런 중요한 수련을 아무데서나 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멍청이에게 놀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피리온이 살짝 열을 올렸다.
팰리스가 알려준 마나호흡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고 타인이 건드리면 다소 위험하기에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수련해야 한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가부좌로 앉아야 하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가부좌 없이 마나호흡을 수련했다고?”
“웅,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당연한 것 아냐? 마나호흡을 하려면 반드시 가부좌로 앉아야 하잖아.”
“맞아. 그래서 말을 탄 채로 수련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팰리스가 피리온의 주장에 힘을 더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편견이었다.
“아니던데요? 나는 움직이면서도 잘만 되던데요?”
천진난만한 대답에 팰리스도 팰리스도 피리온도 할 말을 잃었다.
“···”
‘워낙 괴물이라서 그런가?’
“영주님 그리고 피리온. 무엇이 그리도 복잡해요?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복잡하게 사냐고요!”
토머스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망언’이었다.
“어, 어?”
“말을 타거나 걸으면서 호흡하면 당연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겠지요. 그렇다고 몸뚱이가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팰리스가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건 잘 모른다.
“그런···가?”
‘움직이면서 마나호흡 한다면 동공(動功)? 설마, 동공을 말하는 건 아니겠···· 잠깐! 아닌가? 정말로 동공인가?’
“물론, 가부좌로 앉아 수련하는 것이 훨씬 낫겠지요. 하지만 아예 안 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움직이면서라도 수련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움하하하하~”
‘어때! 정말로 나, 대단하지?’
라고 으스대는 것 마냥 양손을 허리에 얹고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랬다. 무협지에서 동공이란 용어가 괜히 등장할까!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움직이면서 수련하는 동공(動功)!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한 달을 지루하게 말을 타느니 나도 동공이나 수련해 볼까?’
팰리스는 동공 즉,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마나호흡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실패했다.
정신을 집중하면 마나호흡이 유지되었으나 잡생각이 끼어드는 순간 여지없이 수련이 중단되었다.
동공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편법으로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 없는 수련법일 것이다.
그런데 동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니···
어째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았다.
‘일단은 몸이 동공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때부터 팰리스는 얕은 수준의 마나호흡을 유지하며 일부러 잡생각 하며 동공이 몸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해가 저물고 저녁을 마칠 무렵에서야 팰리스는 마침내···
“쳇~ 안 되는 거잖아? 괜히 고생했네.”
도저히 성공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공은 별다른 생각 없이 사는 토머스에게나 어울리는 수련법 같았다.
실제로 천재적인 피리온은 팰리스보다 더욱 헤맸다.
“됐다. 쓸데없는 동공은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잠이나···”
그때였다. 불현듯, ‘포기’란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하면 된다.’라는 무식한 구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구호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의지의 한국인! 그래, 나는 본래 한국인이다. 될 때까지 시도해 보자.’
공부처럼 동공도 왕도가 없었다. 오직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팰리스가 생각을 고쳐먹고 동공을 계속 시도하자 포기하려던 피리온까지 오기로 계속 매달렸다.
시도하고 또 시도하고···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3일 후에는 팰리스도 동공이 얼추 가능해졌다.
아직은 잡생각이 끼어들면 중단되는 수준이었지만 움직이면서도 마나호흡을 제법 유지하게 되었다.
동공! 확실히 정식수련보다는 효율성이 떨어졌다.
정식수련으로 모은 마나가 10이라면 동공으로는 1.5~2가량을 모았다.
반면, 헛되이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하고 주변상황을 제법 인지한다는 장점이 존재했다.
아직은 불가능했지만 동공은 수련과 함께 잡생각이나 연구도 가능했다.
팰리스가 더욱 기분이 좋았던 건 피리온이 아직도 헤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앗싸아~’
“피리온, 동공 말이야. 아직도 너, 그거 못하냐?”
“동공··· 이라니요? 동공이 뭔데요?“
“움직이거나 잡생각하면서 수련하는 거. 그래서 동공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 그래서 동공이군요? 아무튼 동공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네요.”
‘얏호~ 드디어 너보다 잘하는 것이 생겼다. 으흐흐흐~’
팰리스의 입가에 슬쩍 장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랬어? 동공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었나?”
“네? 뜬금없이 무슨···”
“맞아요, 영주님. 그냥 숨을 쉬면서 수련하면 되는데··· 피리온은 똑똑하다면서 그것도 하나 몰라요.”
“그러게 말이야. 그냥 막 하면 되는 건데. 안 그래? 크큭~”
“당연합죠. 그냥 하면 되는 건데. 크크큭~ 흠흠, 그걸 왜 똑똑하다는 피리온이 못한다는 건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요.”
“···”
팰리스와 토머스의 연이은 공격에 피리온이 말없이 불가를 떠나 자신의 천막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천막 속의 그림자가 자꾸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마도 동공을 몰래 수련하는 것 같았다.
팰리스는 드디어 피리온을 눌렀다는 기쁨과 함께 이런 즐거움을 계속 이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았어. 다른 건 몰라도 동공만은 확실하게 앞서주마. 의지의 한국인을 제대로 보여주지.’
“오호~ 피리온.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겠지?”
선의의 경쟁?
이때부터 피리온과 팰리스는 맹렬하게 동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각설하고 다음날 오전이 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팰리스군은 다시 오르도스를 향해 이동했다.
“헤라클 경! 출발하시오.”
팰리스의 지시에 토머스가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넵, 영주님! 전구~운! 출발하라.”
‘떠그덕, 떠그덕~’
“후우웁···· 후우~ 후우웁···· 후우~”
팰리스가 동공으로 호흡하자 피리온도 따라 동공으로 호흡하기 시작했다.
“후우웁···· 후우~ 후우웁···· 후우~”
“후우웁···· 후우~ 후우웁···· 후우~”
북부초원의 전진기지 겸 집결지인 오르도스 영지로 이동하는 팰리스와 친구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계속 수련에 매달렸다.
* * *
북부초원 퉁구스 부족의 점유지.
제국인의 눈에는 바바리안들은 모두가 똑같은 놈들로 보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이곳도 인간이 사는 사회답게 수십여 부족이 (물고 물리는 관계로)서로 각축을 벌였다.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흡수하고 지배하며 흥성했다가 내부적인 분란으로 여러 부족으로 다시 갈라지며 약해진다.
세력이 약한 여러 부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새롭고 강력한 부족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며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북부초원의 세력구도. 유목민족에게 매우 흔한 패턴일 것이다.
이 때문에 바바리안 부족은 길어봐야 200년 전후의 역사를 가졌고 오늘날의 북부초원에는 수십여 부족이 난립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패턴에서 예외적이고 유일한 부족도 존재한다.
그곳이 바로 바바리안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퉁구스 부족이었다.
퉁구스 부족은 800년이란 오랜 역사를 지녔다.
타이판 왕국 500년과 타이판 제국 1,000년. 합쳐 1,500년을 이어온 타이판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점을 감안해야 한다.
북부초원지대는 적자생존이 강요되는 인세(人世)의 정글이란 점 말이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북부초원에서 800년 이상의 정통성을 계속 이어왔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생명력일 것이다.
“···그처럼 오래 이어왔단다. 이젠 우리 부족이 얼마나 대단하지 잘 알겠지?”
“칫~ 그럼, 뭐해요. 어차피 노예부족인데.”
2달 전에 게르 안에서 보았던 소녀, 자근애기가 어머니이자 퉁구스 부족의 샤먼 ‘가없는 염원’에게 투정부리듯이 대꾸했다.
참고로, 퉁구스 부족은 강력한 모계사회로 ‘가없는’이 성이고 ‘염원’이 이름이었다.
그리고 14살 자근애기는 2년 후의 성인식을 마치면 ‘가없는’이라는 성과 그녀의 정체성에 걸맞은 이름을 새로 얻는다.
그리고 자질을 인정받으면 부족의 차기 샤먼이 된다.
“자근애기야. 노예부족은 명목이란다. 실제로는 노예부족이 아니야.”
“명목상이라고요?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란다. 그저 부족의 생존을 위해 (대칸을 배출한)테라칸 부족에게 고개를 숙일 뿐이지.”
염원, 그녀의 말이 맞았다.
초원은 인세의 정글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자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병자호란 10년 후의 청나라와 조선의 사대관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퉁구스 부족은 테라칸 부족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대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 자치(自治)와 독립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공짜는 없다.
조선은 경우에는 명(明)이나 청(淸)에게 사대관계를 맺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 즉, 조공(을 빙자한 무역)물품의 3배 가치에 해당하는 답례품을 얻어갔다.
그 때문에 명이나 청에서는 재정부담 때문에 제발 사신을 보내지 말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조선은 1년에 3차례의 대규모 사신단(을 빙자한 삥뜯기단)을 파견했었다.)
반면 퉁구스 부족은 보호의 대가로 매년 가축이나 수익의 일부를 바치고 지금처럼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일정한 수의 전사를 파견해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 전사는 우리 퉁구스를 지킬 손과 발이에요. 가뜩이나 전사가 부족한데 테라칸 부족이 일으킨 전쟁에 내보내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고요.”
“초원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가 없잖니.”
“쳇~ 옛날처럼 우리 퉁구스가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어머니가 그런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뒷말을 흐리는 자근애기가 꽤 침울해졌다.
아무리 유목부족의 성문화가 제국보다 훨씬 개방적이라지만 2달 전의 난교의식은 자근애기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몸과 정신을 보호하는 주술을 사용했어도 소녀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흐음~ 의식이라··· 그런데 자근애기야. 텡그리와 접신할 때 어떤 계시를 받았니? 수십 년 만에 겨우 성공한 의식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염원은 텡그리의 의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접신할 당시에는 그녀가 아닌 텡그리의 화신체였기 때문이다.
“나한테만 살짝 털어놔 보렴.”
“미안해요, 어머니. 잘은 모르지만 예감이··· 예감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리고 너무 짧은 순간이라 뭐가 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 짧았다고?”
“네, 어머니. 그러고 보니 접신은 어머니가 더욱 길었잖아요. 어머니가 더욱 잘 알겠네요, 뭐.”
“아쉽게도 그때는 내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하나도 몰라.”
“그래···요? 그럼, 텡그리가 전한 의지는···”
‘나밖에 모르는 건가?’
자근애기가 고운 아미를 살짝 꿈틀거렸다.
“자근애기야. 사실은 의식 때문이 아니지?”
“뭐, 뭐가요?”
“전장에 나갈 네가 이리도 침울한 이유 말이다.”
전장! 자근애기는 조만간 샤먼이자 주술사 자격으로 전장에 나가야 한다.
본래는 주술력이 강력한 염원이 출전해야 하지만 2달 전의 의식 때문에 당분간은 체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아참, 주술사는 마법사처럼 신비한 능력을 발휘한다.
마법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적을 발현하는데 주술사는 가장 중요한 호위대상이라 전투에서 죽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자근애기 가슴을 내밀며 시위하듯 대답했다.
“아니거든요? 제가 겁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정말?”
“당연하죠. 우리 주술사는 신령의 가호를 받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다면··· 억센 주먹?”
“콜록, 콜록~ 아, 아니거든요?”
크게 당황하는 태를 보니 아무래도 그것 때문이리라.
참고로, 족장 억센 마빡이의 아들, 억센 주먹은 차기족장으로 거론되는 강력한 전사였다.
젊고 늙은 전사들의 지지를 받는데, 테라칸 부족의 요청(이라고 썼지만 강요로 해석)으로 북부전장에 참여한다.
즉, 자근애기와 억센 주먹이 퉁구스 부족의 전사들을 지휘한다는 뜻이다.
“호호호~ 억센 주먹 때문이었구나?”
“···”
“자근애기야.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니?”
“아, 아니거든요?”
양 볼을 붉게 물들이는 자근애기. 소녀는 역시 속내를 감추는 것이 너무 서툴렀다.
염원은 그런 딸을 이해했는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
“사실은··· 주먹 오빠가 좋아요.”
“호호호~ 그럼, 그 아이를 반려로 선택하면 되겠네. 이번 출정에서 미리 침 발라 놓아도 좋을 테고. 호호호~”
퉁구스 부족은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모계사회였다.
그리고 침 바른다는 속어는 뭐, 알아서 해석하면 된다.
“침··· 발라요?”
“흐흐흐~ 설마 벌써부터 침 바른 건 아니겠지?”
“네, 네? 아, 아니거든요?”
자근애기가 버럭 성을 내며 소리쳤다.
“호호호~ 정말?”
“네, 엄마! 그건 정말로 아니거든요?”
“아니면 아니지 뭘 그렇게 열을 내고 그러니?”
“자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깐 그러는 거죠.”
“왜, 억센 주먹이 좋다며.”
“하지만···”
무슨 일인지 자근애기가 망설였다.
현명한 염원은 딸이 고백할 때까지 다시 기다렸다.
“···”
“주먹 오빤 배신자에요.”
“으, 응? 배신···자?”
“네, 어머니. 우리 퉁구스를 테라칸에게 팔아넘기려는 배신자! 그런 오빠는 절대 반려로 선택하지 않겠어요.”
말을 마친 자근애기.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자그마한 입술을 꼭 앙다물었다.
* * *
25. 오르도스로 향하는 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