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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과 면담을 마친 팰리스. 백작의 안주인들에게 인사하기위해 저택 내실로 이동했다.
서열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이사벨라 본부인에게 먼저 찾아갔다.
그녀는 아들 레온을 위해 이번 사안에 끼어들었다.
대체로 정치적인 일에는 잘 관여하지 않았던 안주인이라고 한다.
그런 그녀가 이번 일에 참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팰리스를 해코지한 격이 되었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안면(顔面)이 안 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사벨라는 시녀를 통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팰리스의 방문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팰리스는 얼굴을 들지 못하는 시녀를 통해 이사벨라의 마음을 얼추 이해하곤 조용히 물러났다.
‘레온 형님은 여전히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로 두 분이 다투지 않았을까?’
팰리스의 추측대로 레온과 이사벨라가 이번 일로 다퉜다고 한다.
허나, 팰리스는 다른 사람 걱정보다는 당장 제 앞가림이 더욱 급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크큭~ 내가 더 문젠가?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젠 올리비아 2부인을 만나봐야겠군. 그녀는 본부인과 전혀 다르겠지?’
올리비아 2부인은 확실히 본부인과 딴판이었다.
예전부터 영지와 백작의 행사에 자주 관여했던 그녀답게 낯가죽이 상당히 두꺼웠다.
인사차 방문했다는 전언에 곧바로 면담이 성사되었다.
팰리스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그녀는 팰리스에게 차를 권했다.
예전의 발생했던 독살의 추억(?)을 기억하는 팰리스는 당연히 마시는 시늉만 했다. 각설하고 대화할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올리비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오래간만이구나.”
“저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2부인 마님.”
“정말 반갑고 기뻐, 팰리스··· 공자.”
“···?”
‘아나톨리아를 빼앗으려고 난리치면서 뭐, 반갑고 기쁘다고? 그리고 방금 공자라고 호칭했지? 보통은 공식적인 직함을 호칭하는데···’
팰리스가 살짝 미간 사이를 좁혔다.
아무리 가족사이라도 보통은 직함을 부른다.
실제로 부자나 부부사이에도 ‘영주님’이라고 호칭하니 지금은 ‘팰리스 총독’이라고 불러야 정상이었다.
“오호호호~ 외지에서 고생이 많았지? 일도 많고 상당히 고단했을 텐데. 이젠 편히 쉴 때도 되었네.”
곰곰이 따져보니 덕담이 결코 아니었다.
‘총독’이 아닌 ‘공자’로 호칭하면서부터 자신은 팰리스를 아나톨리아 총독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 파이온으로 돌아오라는 뜻이 담아 말했던 것이다.
팰리스는 이에 적절한 메시지를 담아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2부인 마님. 부족한 제가 열심히 일했는지 다행히 파이온과 영주님께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업무가 고단한 건 사실이지만 남에게 함부로 미룰 수는 없는 임무겠지요. 그래서 항상 즐겁게 임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아나톨리아를 성장시켰고 영주와 파이온에게 크게 기여했다. 이런 막중한 임무는 아무나 할 수가 없다.
무능력한 오거스틴 형님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한다면 영주와 파이온에게 매우 부정적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계속 총독 임무를 유지해야 한다.
14살 팰리스의 통렬한 반박에 주변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
올리비아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에는 말이야? 보이지 않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 대세라고도 하는데, 물이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칙 같은 것이지.”
득의만만한 얼굴로, 본부인과 2부인 가신들이 요구하는 것이 대세이고 전반적인 여론이다. 그 뜻에 순순히 응하라는 뜻을 담아 말했다.
“2부인 마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맞습니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그것이 옳고 바르기 때문이지요. 2부인 마님의 가르침대로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겠습니다.”
대세나 여론은 정당하고 옳기 때문에 따르는 것뿐이다.
즉, 정의(正義)와 정당성(正當性)이 결여되었다면 당연히 따를 수가 없다.
나는 계속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겠다.
이런 팰리스의 대답에 다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
“2부인 마님?”
“응? 아참~ 그렇지. 그런데 이런 말을 들어 봤니?”
“가르침을 경청하겠습니다.”
“팰리스 공자, 역사는 이긴 자가 적어놓은 낙서장이래. 그리고 보물은 지킬 힘이 있어야만 보물이 된다는 말이 있어.”
‘후후후~ 그러니까 나보고 납작 엎드려 살라는 뜻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는 못하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건 권력 즉, 폭력 때문이지 그것이 옳고 바르다는 뜻은 결코 아니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으, 응?”
“그리고 모든 일은 아무리 어긋났더라도 반드시 옳고 바른 길로 다시 돌아온다는 말도 들어 배웠습니다.”
“···”
팰리스가 말한 사필귀정(事必歸正) 즉, 아무리 잘못이 득세해도 결국에는 옳고 정당한 방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대답에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역시 짧았다.
다시 큰소리로 웃으며 무안함을 날려버렸다.
“오호호호~ 이제 보니 공자는 똑똑하고 말도 참 잘하네?”
“아닙니다. 그저 파이온 가문의 일원으로써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일 뿐입니다.”
‘파이온 가문의 누구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지.’
누구는 오거스틴이다. 이런 팰리스의 속뜻을 알아차렸는지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그래? 피곤할 테니 그만 물러가 쉬어라.”
“감사합니다. 2부인 마님. 그럼···”
이렇게 비수를 감춘 짧은 대화는 팰리스의 완승으로 끝을 맺었다.
별관 숙소로 돌아온 팰리스는 휴식을 취하며 잔뜩 끌어올렸던 신경을 다시 내려놓았다.
긴장을 풀자 피로가 파도가 되어 밀려들었다.
“후아함~ 솔직히 좀 피곤하네. 잠깐 잠이나 잘까?”
한두 시간 토막잠이라도 자면 개운 할 것 같은데 이곳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냐! 이 시간에도 남작님과 제이콥 경이 열심히 가신들을 만나고 있을 거야. 차분하게 결과를 기다리자.”
팰리스의 추측대로 드레이크와 제이콥은 이때 파이온의 가신들을 찾아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드레이크와 제이콥이 팰리스의 숙소로 찾아와 가신들을 만난 성과를 보고했다.
“총독, 아직 기회는 남았소. 낙담하긴 아직 이르지요. 내일은 이사벨라부인의 아버지, 도미니코 남작을 만나볼 생각이오.”
그 말인즉, 오늘 드레이크와 제이콥이 만난 가신들을 한명도 설득하지 못했고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팰리스는 고생한 드레이크와 제이콥을 격려하며 3일 후에 열린 회의의 안건으로 다시 상정했음을 알렸다.
그리곤 내일도 힘써줄 것을 부탁하곤 거처로 돌려보냈다.
여기에서 잠깐, 파이온의 분위기와 역학관계를 따져보면 팰리스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
현재의 세력분포를 보자면 백작을 따르는 가신과 이사벨라, 올리비아의 가신이 각각 4:3:3의 비율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올리비아 2부인측이 절반을 살짝 넘길 정도로 강력했고 영지의 일에 잘 관여하지 않았던 본부인 측은 미미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레온이 소영주의 입지를 굳혔고 팰리스까지 등장했다.
이때부터 2부인의 세력이 줄어든 반면 이사벨라 본부인의 영향력은 점차 늘어나 현재의 역학구도가 만들어졌단다.
기사 중의 기사로 소문난 파이온 백작. 외부적으로 보자면 매우 강력한 군주였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2부인의 뜻에 따르는 고개 숙인(?) 남편이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도자기로 인해 2부인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파이온 백작은 이제야 큰소리를 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나톨리아 문제로 부인들이 힘을 합쳐 백작을 압박하는 형국이었다.
파이온백작과 팰리스가 원하던 결과를 얻으려면 어떻게든 본부인과 2부인의 야합을 깨뜨려야할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사건은 논리가 개입하지 못할 분야라는 점이다.
‘이 모든 사단이 모정(母情) 때문에 만들어졌다. 이성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아.’
팰리스가 생각하기에 이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처럼 ‘모정(母情)’ 또한 맹목적인 면이 꽤 강하게 작용했다.
이번 사안에는 이성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충분히 설득할만한 사안일 것이다.
문제는 모정. 모정이 개입한 바람에 기존의 결정을 번복하기가 어려웠다.
팰리스는 돌아가는 형국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필시 아나톨리아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결국에는 팰리스가 아나톨리아의 총독에서 해임될 것이다.
“젠장, 아나톨리아 총독이 뭐라고. 그냥 달라고 하면 내줄 수도 있는 건데. 안 그래?”
팰리스가 작게 투덜거렸다.
자신이 무슨 탐욕덩어리도 아니고, 팰리스는 야심가가 아니었다.
그저 전생과 달리 이번 생에서는 ‘폼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팰리스가 아나톨리아를 성장시켰지만 그곳을 악착같이 지키고 싶은 생각까진 아니었다.
(대한민국시절과 달리)가이아는 돈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 건 아니지만 도자기로 상당한 자금을 모았다.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영주나 로드는 일반적으로 통치하는 지역의 수익 30%를 개인의 몫으로 배정한다.
팰리스는 이제 준 재벌급의 자금을 보유했고 오늘도 늘어나는 상황이다. 아나톨리아를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아르펜이 아버지였지만)가족사이의 일이지 않는가!
좋은 뜻으로 부탁하면 충분히 허락할 만했다.
이처럼 팰리스는 아나톨리아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다만,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탐욕스럽고 잔인하다고 소문났다. 그런 형님이 아나톨리아 총독이 되면···”
오래 겪어보지 못했지만 오거스틴은 몹시 탐욕스럽고 잔인하다는 평을 듣는 위인이었다.
그런 자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가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주민들은 잭슨 시절처럼 힘겨웠던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 예전의 나처럼 평생을 착취당하고 고생할 것이 분명해. 이제 좀 제대로 살아보려는 불쌍한 자들인데 왜···”
마음이 울컥했는지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팰리스는 성인(聖人)도 휴머니스트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이지만 아침에 들었던 주민들의 만세소리와 그들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팰리스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전생의 그 자신처럼 고생만 했던 이들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도무지 해결책이 안 보였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문득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다.
시대와 상황이 크게 달랐지만 그 또한 백성들의 미소가 계속되길 바랐을 것이다.
‘피식~’
“크크큭~ 확실히 머리가 복잡하니까 잡생각이 많아졌군. 그래, 내일을 위해 잠이나 자자.”
깊은 밤까지 고심하던 팰리스는 결국 내일을 위해 침대로 향했다.
* * *
다음날, 팰리스는 드레이크와 제이콥을 대동하고 파온온 영지의 가신들을 찾아갔다. 그들에게 아나톨리아에 파견된 병사와 관리들의 복귀를 유예해 달라고 설득하고 부탁했다.
파이온 백작과 레온의 가신들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힘을 합치면 과반수가 넘는 본부인과 2부인의 세력은 그리하지 않았다.
도미니코 남작을 비롯한 가신들은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려 들질 않았다.
곤란한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의 해가 저물 무렵에도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
내일 해가 뜨면 가신들이 모두 참석한 전체회의가 개최될 것이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리 의견을 조율해야 하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밤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사용해야 한다.
지금은 최후의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팰리스는 문득 며칠 전에 생각했던 문구를 떠올렸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동안 고민하던 팰리스는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
“하아~ 그래! 이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선거판은 아니지만 최악(最惡)을 피하기 위해서 차악(次惡)을 선택하겠다.”
팰리스는 은밀히 드레이크를 불러들여 자신의 뜻을 알렸다.
처음 드레이크는 펄쩍뛰며 반대했다.
그러다가 팰리스의 계속된 설득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팰리스의 숙소를 나온 드레이크.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20.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