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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나톨리아를 지켜라.
[아나톨리아에 빌려준 병사와 관리들을 예정대로 파이온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윈스턴 일행과 함께 가성소다의 대량생산 문제를 고심하던 팰리스는 피리온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크게 놀랐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도 어이가 없고 믿기도 힘든 소식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애늙은이답지 않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이이··· 이런 씨팔···”
‘뭐, 병사와 관리들을 다시 복귀시키라고? 정말 어이가 없군. 만약 아나톨리아가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건데? 파이온도 함께 죽자는 소리냐? 그럼, 어쩔 거냐고!’
아나톨리아가 흔들리면 파이온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 때문에 브라이트 파이온 백작이 팰리스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던가!
파이온백작은 여타 영주와 달리 강력한 리더십과 권위를 가진 영주였다.
그렇게 강력한 로드가 팰리스의 요청을 장담했으니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만이 남았었다.
그런데 3일이 지난 오늘 전혀 엉뚱한 소식이 마법통신으로 전달되었다.
“피리온! 지금 당장 따지러 가야겠다.”
“파이온으로? 그럼, 나도 같이 갈게.”
“그럴래? 그럼, 토머스랑 제이콥 경 그리고··· 아~ 드레이크님도 같이 가면 좋겠다. 지금 말한 사람들을 빨리 불러줘.”
“알았어, 팰리스. 내가 빨리 불러올게.”
피리온이 나가자 팰리스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트리스탄을 불러들였다.
“트리스탄 안으로 들어오게.”
“공자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방안의 대화를 들었는지 트리스탄은 먼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물었다.
“파이온에 갈 생각이니 기마(騎馬)를 빨리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공자님.”
팰리스가 기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피리온이 불러온 드레이크와 토머스, 제이콥이 도착했다.
드레이크도 파이온에서 전해진 소식을 접했기에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팰리스가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출발하려고 하자 슬며시 만류했다.
“총독, 흥분은 금물이오. 출발을 내일로 미루고 마음부터 가다듬으시오.”
“남작님도 들으셨잖습니까!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당장 항의하러 가십시다.”
“총독, 영주님께 따지러 가는 건 내일로 미룹시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번 일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맞아요, 총독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왜 내일까지 기다려요? 지금 당장···”
“그만! 헤라클 경은 그만 입 다무시오!”
“네, 네? 쳇~ 나만···”
토머스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모두들 ‘나만 미워해!’라는 뜻을 알아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총독, 이번 일이 부당하다는 건 나도 알고 총독도 아는 사실이오. 그래서 나 또한 영주님께 따질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왜 출발을 지연시킨 것입니까? 빨리 항의해야죠.”
“서두르지 맙시다. 영주님께 따질 때 따지더라도 돌아가는 상황부터 파악해야 하지 않겠소?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먼저 파악한 후에 그때 가서 영주님께 항의합시다.”
“아~ 그렇···군요. 후우웁, 후우~ 후우웁···”
드레이크의 말에 팰리스가 그제야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사실, 화가 나기는 드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파이온의 가신들이 무슨 생각으로 파이온 백작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화가 났다.
“죄송합니다, 드레이크님. 제가 좀 흥분했습니다.”
“아니오. 화가 나긴 나도 마찬가지요. 아니, 나뿐만이 아닌 제이콥 경이나 피리온도 똑같이 흥분했을 것이오.”
“그렇···군요.”
“총독, 일단은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은밀하게 알아보겠소. 그런 연휴에야 파이온으로 출발합시다.”
이렇게 팰리스를 진정시킨 드레이크는 파이온에 남은 수하나 마법사에게 통신해 사정을 알아봤다.
파이온의 가신들이 모두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라 숨기고 자실 것도 없었다. 어떤 세력이 반대했는지 금세 알아냈다.
드레이크는 3시간 만에 그들이 왜 파이온 백작의 뜻을 거스른 것인지 그리고 그런 결정의 배경들을 알아냈다.
그리곤 조용히 팰리스를 찾아가 독대를 요청했다.
“총독, 어떤 세력이 반대했는지 그리고 그 배경을 알아봤소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작님. 혹시 올리비아 2부인께서 반대했던 것입니까? 그래서 그런 어이없는 결정이 나온 것입니까?”
마음이 급한지, 팰리스가 먼저 드레이크에게 물었다. 팰리스는 2부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올리비아는 그녀의 소생인 오거스틴을 위해서 사사건건 팰리스의 발목을 잡아왔지 않았던가.
그런데 드레이크의 대답이 뜨끈 미적지근했다.
“알아보니 그렇기도 했지만 아니기도 합디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총독의 예상대로 올리비아 마님과 그분을 따르는 가신들이 반대한 건 맞았소.”
“그럼, 아니라는 말은 또 무슨 뜻입니까?”
“그런데 꼭 대답을 들어야겠소?”
“네?”
어째 드레이크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무슨 일인지 배경을 말하길 주저하는 것 같았다.
‘뭐야! 말하기가 좀 껄끄러운가?’
“하아~ 아니오. 총독이 이번 일의 당사자이니 총독도 알아야겠구려.”
“···”
“총독, 올리비아 2부인 마님뿐만 아니라 이사벨라 마님과 그분을 따르는 세력도 영주님의 뜻에 반대했다고 하더이다.”
“본부인 마님께서요?”
“그렇다고 하는구려.”
“정말··· 입니까? 드레이크님도 아시다시피 본부인 마님과 그분을 따르는 가신들은···”
팰리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호의적이진 않았다.
파이온이라는 성을 받은 초반에는 미천한 평민이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며 냉대했었다.
그러다가 거름으로 곡물생산을 늘린 이후에는 그녀의 아버지(도미니코 남작)가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각궁과 도자기를 개발했을 때에는 (소영주 레온을 중심으로)팰리스를 파이온 가문의 진정한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가 왜 어깃장을 놓았을까?
“이유가 뭐랍니까?”
“하아~ 영주님의 신하로써 말하기가 좀 그렇소.”
“뭔데요? 남작님,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총독, 잘 들으시오. 본부인 마님이 갑자기 어깃장을 놓은 이유는 소영주님의 입지가 흔들릴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랍니다.”
“소영주님이요? 뜬금없이 소영주님은 왜···”
팰리스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알다시피 소영주 레온은 팰리스의 맏형으로 파이온의 확고부동한 차기후계자였다. 파이온의 어느 누구도 그것에 의문을 표하지 못했다.
팰리스 또한 파이온의 차기 영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명정대한 레온은 능력을 중시했고 그래서 다재다능한 팰리스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그건 그렇지요. 본부인 마님이 왜 그런 생각을 하셨나 하면···”
당초 이사벨라는 아들이 팰리스에게 호의적이자 서운한 마음을 접고 그를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내 마음 같지가 않다고, 팰리스가 레온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음에도 계속 승승장구하자 이사벨라가 조금씩 불안해졌다.
방금 말했다시피 처음부터 그녀가 그런 건 아니었다.
올리비아 2부인의 술수로 팰리스가 아나톨리아로 좌천될 때는 안타까워했었다.
그러다가 아나톨리아를 안정시키고 도자기를 개발했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진정으로 기뻐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도자기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너무 컸다.
막말로 팰리스와 아나톨리아 때문에 파이온은 남든 자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고민할 정도가 되었다.
병사를 4,000명으로 늘리고도 군비가 남아돈단다.
당연히 팰리스가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의 그의 위상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공명정대하다고 소문났지만 소영주 레온의 어머니였다.
[팰리스 때문에 파이온이 성장했지만 그 아이가 너무 커버렸다. 자칫하다가는 엄한 녀석 때문에 내가 낳은 아들이 실각할 수도 있어.]
그녀는 팰리스 때문에 자신의 자식이 잘못될까 두려워졌다. 이런 틈을 올리비아 2부인이 파고들어 야료를 부렸던 것이다.
“그럼, 소영주님도 이번에 돌아선 것입니까?”
“아니오. 소영주님은 다행히 영주님의 뜻에 따랐다고 하더이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렇지요. 이사벨라 마님이 비록 반대표를 던졌지만 사실, 그분과 소영주님은 공명정대한 분들이라오. 아마도 총독이···”
너무 급하게 성장하고 영향력을 키워가자 경고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끼어들어 팰리스에게 경고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을 추스른 면이 없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이런 숨겨진 배경들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견제와 경고라고요?”
“그렇지요. 총독이 아나톨리아를 성장시키는 건 문제없지만 헛된 야망을 품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드레이크의 설명에 팰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이사벨라의 심정을 얼추 이해할만했다.
팰리스 또한 전생에서 많은 자식들을 키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올리비아 2부인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반대했을까?
“그건 그렇다 치고, 2부인 마님은 이번에도 제 발목을 잡으려는 생각이겠지요?”
“흐음~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요. 하지만 내가 예상하기로는···”
그녀 또한 그녀의 소생 오거스틴을 위해 반대했을 것이다.
“아니 왜요? 반대한다고 그쪽에게 이익이 될 건 없잖습니까!”
표면적으로 보자면 올리비아 측에 이익이 전혀 없다.
그러나 현재의 구도로 5년 정도만 유지되면 레온이 차기영주로 ‘확정’될 것이다.
그럼 오거스틴이 자의든 타의든지 반드시 파이온 가문에서 독립해야만 한다.
팰리스도 똑같은 사정이지만 그는 아나톨리아를 책임지고 있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계승권이 없는 자식들은 차기 로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사가 되거나 행정관으로 일하며 형제에게 봉사한다.
그도 아니면 자금을 지원받아 영지를 떠나야 한다.
올리비아는 오거스틴이 경쟁자였던 레온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싫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독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아나톨리아는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도자기 판매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황금의 땅. 지금 당장은 인구가 적지만 빠르게 인구가 늘어 언젠가는 남작의 영지까지 성장할 것이 유력한 지역. 올리비아는 이사벨라에게 팰리스를 견제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치적인 야합을 시도했다.
즉, 아나톨리아를 오거스틴에게 맡겨 독립시키면 더 이상 레온의 입지를 흔들지 않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사벨라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오거스틴이 파이온에서 독립하고 한창 영향력을 키워가는 팰리스까지 배제한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거래였다.
올리비아에게도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황금의 땅, 아나톨리아가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녀는 오거스틴을 독립시켜 아나톨리아에서 새로운 가문을 시작하게 할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떡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구경꾼들이 아나톨리아를 서로 나눠가진 꼴이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 눈치 챈 파이온 백작이 강력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뭐 내부에서 그런 헛소리가 돌아다닌다고? 그런 헛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 아니, 다시는 내 앞에서 거론하지 말라.]
이런 백작의 발언 때문에 정치적인 야합이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다.
문제라면 정치는 서로가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벨라와 올리비아의 세력이 힘을 합치면 파이온 백작도 마냥 거부하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두 세력의 힘은 백작의 결정도 번복시킬 만한 영향력을 불러왔다.
백작은 무능력한 오거스틴에게 아나톨리아를 넘겨줄 생각이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그가 원하던 하나를 받았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를 내줘야 하고 그것이 바로 병사와 관리들의 복귀를 유예시키지 못한 배경이었다.
“그럴 수가··· 자칫 잘못되었으면 꼼짝없이 아나톨리아를 빼앗길 수도 있었겠군요?”
“그렇지요. 그러나 아직도 긴장을 늦추면 아니 될 것이오.”
“아직도요?”
“그렇소, 총독. 병사와 관리들이 파이온으로 복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소?”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요? 당연히 크든 작던 간에 무슨 문제가 생기겠지요.”
“···”
“그럼, 2부인 측이 가만 구경만할 것 같소? 아마도 그것을 아나톨리아를 빼앗을 명분으로 삼을 테지요. 오거스틴 공자에게 맡길 명분 말이오.”
“허허~”
팰리스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허튼 웃음만 주변에 퍼뜨렸다.
올리비아 측의 공작으로 병사와 관리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때문에 이곳에 문제가 발생하면 팰리스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정말 어이가 없고 억울한 현실이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황당했다.
“총독, 힘내시오. 나도 힘닿는 데까지 총독을 돕겠소.”
“후우~ 고맙습니다, 남작님.”
“아니오. 그것이 옳고 정당한 일이오. 나 드레이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소. 그럼···”
이 말을 끝으로 드레이크가 요청한 독대가 끝났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팰리스는 한동안 현 상황을 깊이 고민했다.
“나는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은 팰리스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사실, 팰리스가 지구의 지식으로 각궁을 만들고 선물하면서부터 평화롭게 한세상을 살아갈 인생이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각궁을 만들고 거름으로 곡물을 키우고 도자기로 아나톨리아를 성장시켰던 팰리스. 그가 현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벌써 ‘역사’와 ‘운명’이라는 거친 격랑 속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격랑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힘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나톨리아를 빼앗기지 말아야 하고 병사와 관리들의 복귀를 최대한 늦춰야할 것이다.
팰리스는 늦은 밤까지 파이온 백작을 어떻게 설득한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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