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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얼추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
오늘 개교하는 센트럴아카데미 또한 한국의 사정과 거의 비슷했다.
등교 첫날이라 그런지 총독과 (학생보다 훨씬 많은 수의)학부형들의 수업 참관이 계획되었다.
‘와글와글~’
‘두런두런~’
팰리스가 도착하기 전이라 학생과 학부형들이 떠드는 소리로 교실이 꽤 소란스러웠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과 딸이 귀족자제들처럼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어린 총독은 분명 약속했다.
[아카데미에서 검을 배워 익스퍼트 급에 오르면 기사로 임명할 것이다. 마법에 재능을 보이면 마법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던 딸이던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보내라, 아카데미로!]
병사들의 권유로 아나톨리아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나 특권계급인 귀족마저도 -평민과 함께 교육 받는 것에 좀 불만이지만- 아카데미를 반기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과거에 착취당하던 주민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겠는가?
“힘센 놈들 때문에 내가 고생했지만 내 아들놈은 달라질 거야. 그 어렵다는 문자를 배운다니깐! 으흐~ 세상이 정말 좋아졌어.”
“겨우 문자가지고 쯧쯧쯧. 자네 이거 아나? 사람은 꿈이 커야 한다는 거 말이야.”
“꾸~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허허~ 답답하긴. 현대사회(?)를 살아가려면 문자보다는 검술이나 마법부터 배워야지.”
“오늘 또 무슨 문제로 시비냐? 검술이랑 마법은 도대체 꿈과 무슨 관곈데?”
“이런, 이런. 이 사람아~ 총독님이 약속했잖아! 우리 애를 기사로 만들고 마법사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오오~ 정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총독님은 정말로 고맙고 위대하신 분이 분명해.”
“당연하지. 그러니깐 기사가 될 우리 아들놈처럼 자네도 자식 교육에 신경 쓰라고.”
“충고 고맙··· 가만! 그런데 자네 쪽은 좀 아니지 않나?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리 총독님이 키워주신다고 약속했지만 자네 아들은 불가능하지 않아? 솔직히 좀 멍청하고 똘끼도 충만···”
“이런 우라질 새끼가··· 우리 앤 멍청하지 않거든? 그리고 똘끼도 전혀 없거든?”
“그랬어? 예전에 보니깐 괴물기사님 아니, 토머스님이랑 잘만 어울리던데?”
“어떻게 그런 심한 욕을··· 너 이 새끼! 수업 끝나고 화장실 뒤에서 보자.”
‘으드득~’
아무래도 오늘은 화장실 뒤편이 아저씨와 아줌마들로 북적거릴 것만 같았다.
각설하고, 오늘 문을 여는 여섯 학교 중의 하나인 센트럴아카데미!
6년 과정으로 나이에 따라 6개 클래스를 운영하면서 공용문자와 기초검술, 마법의 기초를 가르칠 계획이었다.
다만, 이제 막 개교했고 학생들 모두가 백지상태였기에 올해는 정규과정인 소년반과 (12세 이상의 비정규반인)청소년반 이렇게 2개 클래스만 운영한다.
때가 때인지라 총독부가 주관하는 거창한 기념식을 열어 학교의 개교를 축하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팰리스가 기념식 일체를 거절했다. 가이아에는 (한국과 달리)절대적으로 비생산적인 ‘기념식 문화’가 흔하지 않았다.
아니, 흔했더라도 팰리스가 워낙 바빠 기념식을 취소했다.
다만,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을 지도할지 직접 살펴보기 위해 잠시간 수업참관을 계획했다.
“모두 정숙하시오. 총독님께서 입실하십니다. 모두 일어나 예를 표하시오.”
‘드륵, 드르륵~’
‘벌떡, 벌떡!’
‘처척~’
“충! 아나톨리아의 정당한 지배자! 팰리스 파이온 각하를 뵈옵니다.”
“초, 총독님··· 뵙습니다.”
“총독님을 뵈어요.”
학생과 학부형들의 신분이 다양했다. 그 때문에 인사말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왔다.
팰리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에 학부형들이 몰린 교실 뒤편의 문가로 이동했다. 총독이 자리를 잡자 그제야 교단에서 대기하던 교사가 수업을 시작했다.
첫 수업은 역시 참관수업에 어울리는 공용문자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여러분~ 이 글자는 ‘아빠’를 뜻하는 ‘파’라고 해요. 이건 ‘엄마’의 ‘마’라는 글자인데···”
교사가 칠판에 미리 써놓은 문자를 알려줄 때마다 뒤에서 구경하던 학부형들도 해당 문자를 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말했다시피 가이아의 공용문자는 한자(漢字)와 같은 표의문자(表意文字)였다.
그 때문인지 학부형 대다수(귀족은 절반가량)가 문맹이었다. 그들은 자식들이 공용문자를 배우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물론, 모두는 아니었다. 견디다 못한 토머스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으~ 답답해.”
“답답해도 좀 참아라! 지금은 수업중이다.”
“야~ 피리온. 저딴 식으로 꼭 가르쳐야 해? 어렵게 배울 것이 아니라 입글(한글)부터··· 헙!”
토머스의 불만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피리온이 급히 손바닥으로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눈치 챈 팰리스가 둘에게 눈짓하곤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답답해하던 토머스와 피리온이 팰리스를 따라 나섰다.
인적이 끊긴 곳에 도착하고서야 토머스가 숨을 크게 내쉬며 불평했다.
“야, 총독아~ 그냥 가르치면 안 될까? 입글이 훨씬 가르치기 쉽고 배우기도 편하잖아.”
이쯤이면 눈치 챘을 것이다.
소싯적의 팰리스가 알려준 한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다시피, 피리온은 천재 중의 천재였지만 팰리스와 토머스는 솔직히 둔재 쪽에 가까웠다.
둘은 한글의 도움으로 겨우 공용문자를 외웠었다.
“솔직히 내 머리가 돌탱이라는 건 나도 잘 알거든? 그런 내가 입글 때문에 공용문자를 마스터했어. 너희들도 기억하지?”
천만다행으로 토머스는 주제파악을 잘했다.
“입글이 이렇게 좋잖아.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안 될까? 총독아~ 보기에 너무 답답하다.”
“나도 맘 같아서는 그러고야 싶지. 공용문자를 힘들게 배워야할 동생들에게도 좋을 테고.”
“그럼, 허락하는 거야?”
“아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아니 왜? 너는 총독이잖아.”
토머스의 말대로 팰리스가 아나톨리아의 로드, 지배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이곳의 절대자라도 입글은 파급력이 너무 컸다.
문자는 단순한 문자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까지 내포한 ‘매우 위험한 폭탄’이었다.
사상 최강의 핵무기라는 ‘짜르 봄바(Tsar Bomba)’보다 더욱 영향력이 클 것이다.
“그래도 안 돼! 자칫하다간 아나톨리아가 사라질 수도 있어!”
“에이~ 입글 때문에 이곳이 사라져? 거짓말! 그 까짓 것이 뭐라고 이곳이 사라지겠어? 내가 무식하다고 뻥치는 거지?”
“야~ 토머스. 내가 설마 거짓말했겠냐?”
“혹시 또 모르지.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윗대가리에 앉으면 이상하게 거짓말이 늘더라고.”
예전엔 팰리스의 말에 꼼짝 못했는데 익스퍼트 급에 오르고부터 이렇게 말대꾸가 늘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피리온이 팰리스 대신 나섰다.
“야~ 토머스. 팰리스가 거짓말 한 게 아냐.”
“응? 아니었냐?”
“그래, 인마. 입글은 정말로 위험한 문자야. 아직도 우린 이곳을 지킬 힘이 너무 부족해.”
“그런가? 그래, 알았다.”
“토머스. 피리온 말대로 거짓말이 아··· 응? 설마 너··· 납득한 거냐?”
“응!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피리온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겠지.”
“?···!”
토머스가 너무도 쉽게 납득했다. 팰리스는 왠지 모를 패배감에 휩싸였다.
‘저 자식 저거, 저거··· 내가 말할 때는 지지리도 안 믿더니만.’
“어? 팰리스. 벌써 배고파? 표정이 왜 그래?”
그 말인즉, 팰리스가 얼굴을 찌푸렸고 토머스는 배가 고프면 기분이 나빠진단다.
“아이고, 토머스 이 자식아~”
“야~ 피리온. 팰리스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
어째 분위기가 묘해졌다. 팰리스는 점점 어려지고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쳇~ 어째 내가 점점 어린애가 되는 것 같네? 어휴~ 대충 자리나 정리하자.’
“야! 그만 됐다. 이제 그만 움직일 준비하자.”
팰리스가 공식적인 신분으로 돌아가자는 뜻을 전했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어느새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팰리스의 지시에 친구 모드였던 토머스가 기사 모드로 급히 변신했다.
“네, 총독님! 어디로 모실 깝쇼?”
“도자기 공장! 헤리클 경, 이제 본 총독은 그곳으로 가야하오.”
“각하! 도자기 공장 말씀이십니까? 도자기 공장은 한동안 방문하지 않으··· 아하~ 우리 아빠 보러?”
도자기공장의 책임자 하든 헤라클. 과거 레인저로 활동했던 토머스의 아버지였다.
이제야 말하지만 토머스와 피리온의 가족들이 아나톨리아에 정착지 1달이 조금 넘었다.
다만, 팰리스의 경우에는- 팰리스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 아르펜과 라이나가 계속 그린 포레스트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동생 해리스와 헬레나를 아나톨리아에 보냈다. 팰리스는 방금 전까지 동생들의 첫 수업을 참관했던 것이다.
“헤리클 경! 본 총독은 도자기 공장뿐만 아니라 이상기후 때문에 농사문제로 상당히 바쁘다오. 그런데 어찌 개인적인 시간을 허비하겠소?”
“으~ 닭살 올라. 농사는 거름 때문에 잘만 크고 있는데 뭐! 아무튼, 그렇다면 각하!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신지요?”
“크크큭~ 너희들, 장난감 없이도 잘들 논다, 잘들 놀아.”
피리온이 킥킥거리며 둘의 행사를 비웃었다. 그럼에도 팰리스와 토머스는 괴상한 말투를 멈추지 않았다.
“어험~ 리저드 경! 경은 아직도 본 총독이 친구로 보이시오?”
“어이~ 너흰 이제 14살이다. 애도 아닌 것들이, 웃기지도 않는다니깐?”
참고로, 16세를 넘겨야 성년으로 취급하지만 빠르면 12살에도 결혼을 해 애를 낳는 세상이었다.
“총독각하! 기분 푸시지요. 리저드 경은 아마도 싸가지를 빵에 끼워 드신 것 같사옵니다.”
“호오~ 본 총독도 그렇게 보이는구려. 아무튼 헤라클 경! 드워프 티아늄이 친구들을 초대했고 오늘 도착한다고 들었소.”
“오~ 그렇사옵니까? 그럼, 소인이 길을 트겠사옵니다.”
이젠 2m를 넘긴 토머스가 무게를 잡으며 팰리스를 도자기 공장으로 인도했다.
이제 보니 팰리스가 살짝 어려진 것 같다. 지금처럼 제 나이 때와 같은 유치함을 보이기도 했다.
각설하고, 팰리스는 다시 아나톨리아의 총독으로써 업무를 시작했다.
도자기 공장에 도착하자 공장장(?) 하든과 티아늄부부 그리고 이곳에 합류할 것이 유력한 드워프 셋이 목책의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이름이 뭐였··· 아, 맞다. 세륨, 안티몬, 비스무트! 반가와요, 여러분~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세륨, 안티몬, 비스무트!
알다시피 셋은 티아늄과 함께 자란 소꿉친구이자 ‘웬수(?)’ 사이로 과거에 팰리스와 함께 (약물에 취한)오크들과 맞서 싸웠었다.
전우(戰友)라고 말한다면 전우일 것이다. 그래서 팰리스가 드워프들을 반갑게 맞이했는데 어째 셋의 태도 영 이상했다.
“어린 친구 아~ 많이 컸으니깐 소년 친구라고 해야 하나? 나도 반가··· 아참~ 흠흠~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아나톨리아의 저, 저, 정당한··· 정당한 다음이 뭐였더라?”
“이런 멍청한 새끼~ 지배자! 지배자라고 말했어야지.”
“둘 다 시끄러! 흠흠~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아나톨리아의 정당한 지배자이신 에 또··· 팰리스 파이온 각하를 뵈옵니다.”
순서대로 세륨, 안티몬, 비스무트가 인사를 가장해 헛소리했다.
“?···”
영문을 모른 팰리스 이하 친구들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고개를 돌리고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힘들게 참고 있는 티아늄과 루비 두 사람을··· 순간,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 챘다.
‘아하~ 티아늄 부부가 장난 쳤구나?’
“이런 쯧쯧쯧~”
팰리스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100살도 넘었다던데 어째 하는 짓이 꼭 어린아이 같지? 드워프는 본래 저런 종족인가? 아니면 저 부부가 특별한 건가!’
피리온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녀석은 역시 학구적이었다.
‘와우~ 재미있는데? 나중에 나도 꼭 써먹어야지.’
예상대로 토머스의 속마음이었다.
각설하고, 티아늄 부부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폭소를 터뜨리며 노래하듯 소리쳤다.
“장난인데~ 장난인데~ 우헤헤헤~ 저 새끼들! 장난인데 진짜로 말했어. 우헤헤헤~”
“오호호호~ 여보야~ 여보야 친구들은 정말 바보 같아요. 오호호호~”
부부는 이제 끅끅거리며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떼굴떼굴~ 떼구르르~’
“우헤헤헤~”
“오호호호~”
문제는 두 사람만 즐겁지 모두들 황당하거나 화가 난 얼굴이라는 점이다.
황당해 하던 드워프 셋은 이제 수북한 털사이로 목덜미를 시뻘겋게 달궜다.
“저런 미친ㅆ···”
‘으드득~’
“젠장! 연놈들이 이젠 쌍으로···”
‘으득, 으드득~’
“우헤헤헤, 헤헤, 헤, 헤! 헤! 어험, 어험~”
“오호호호, 호호, 호, 호, 호! 여보야 나는 이만··· 식사 준비하러 갈게요.”
분위기가 싸늘해지지 티아늄 부부가 정신을 차렸다.
루비는 식사준비를 핑계대고 재빨리 도망갔다.
이제 응징의 시간이 도래했다.
“티아늄 이 새끼, 다 웃었냐? 이제 너, 디졌어!”
“티아늄! 내 주먹맛을 그렇게도 그리웠어?”
세륨과 비스무트가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제 곧 ‘우정’을 가장한 구타신공이 발휘될 것이다. 문제는 드워프들이 지금과 같은 장난(?)을 시작하면 최소 반나절이나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팰리스가 급히 나서 드워프들의 ‘정겨운 행사’를 중단시켰다.
“그만! 그만들 하세요. 공장 일에 방해 되잖아요.”
“팰리···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우리에게 하라 마라 끼어드는 거냐?”
“맞아. 아무리 나보다 키가 크더라도 넌, 너무 건방져! 넌, 우리에게 목욕값을 줬어!”
“야 인마~ 목욕값이 아니라 모욕감이야.”
예전이라면 분명 이런 소리들로 다시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때가 아니다. 170Cm로 훌쩍 자란 14살의 팰리스. 그에겐 어느새 총독의 권위와 관록이 붙어버렸다.
'공장 일에 방해된다.'는 팰리스의 한 마디에 시끌벅적했던 소란이 단번에 잦아들었다.
“어, 어? 알았다. 조용히 하면 될 거 아냐.”
“방해한 거 아닌데. 그냥 반갑다고 인사한 건데···”
항상 거만한 모습이던 드워프들이 변했다. 드워프들의 변화에 팰리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17. 발전하는 아나톨리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