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61 --------------
‘뭐야! 무슨 시험인가? 웬만하면 그냥 주지.’
팰리스의 생각대로 이는 파이온 백작이 내리는 시험이었다.
지금의 팰리스는 꿈에도 몰랐다.
그 시험의 결과에 따라 그의 운명이 크게 뒤바뀐다는 사실을···
“팰리스! 너로 인해 개발된 가꿍을 중앙군에 납품했다. 일시적이나마 영지의 자금이 풍족해졌지. 그만한 자금이면 피닉스기사단과 레드울프기사단의 낡은 갑주들을 새로 교체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너는 그 자금을 이용하여 앞서 언급한 사업을 건의하고 추진하였다. 맞느냐?”
“그렇습니다, 영주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영지는 여타 영지보다 세금이 낮아 자금사정이 꽤 빠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적자를 면한 것이 아주 용할 지경이었지. 그런데도 너는 왜! 그 사업들을 제안하고 추진하였느냐! 솔직하게 말해보아라.”
백작의 물음이 끝나자 자작이 재빨리 질문을 보충했다.
“팰리스~ 영주님께서는 네가 올린 보고서를 이미 살펴보셨다. 그러니 잡다하고 세세한 이유가 아닌 본론만을 이야기해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자작님.”
‘그런다고 달랑 결론만 이야기하면 좀 그렇잖아요.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리고 이곳이 너무 더럽고 병에 걸릴까 무서워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문제잖아요. 쩝~’
자작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인 팰리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위해 잠시간 뇌에 마나를 두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전생을 평범하게 살았던 팰리스가 한 영지를 지배하는 자를 납득시킨 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21세기의 평균적인 성인은 18세기의 모든 정보에 해당하는 지식보다 더욱 많은 지식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물론, 단순히 알고 있다는 의미의 지식(知識)과 그런 지식을 효율적으로 적재적소에 이용한다는 개념의 지혜(智慧)는 전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먼저 제가 두 사업을 건의한 이유는···”
팰리스는 공공화장실과 대중목욕탕 사업을 추진하게 된 이유와 배경부터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이 사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이익들을 하나씩 열거해갔다.
다소 지루한 설명이었다.
간단하게 결론만 밝히라는 자작의 뜻을 어긴 면이 없지 않았다.
“잠깐! 그래 팰리스~ 이 사업을 통해 내가 얻는 가장 근본적인 이익이 무엇이지?”
답답했는지, 잠자코 설명을 듣던 백작이 팰리스를 중단시켰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팰리스가 의도했던 순간이었다.
“흠흠~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말해보아라.”
“넵! 영주님과 우리 파이온 영지가 취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자 이익은 바로···”
팰리스가 말을 잠시 멈췄다. 여기저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의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길이 쏘아질 것만 같았다.
‘꿀꺽~’
‘꼴딱~’
“···”
“바로 사람입니다! 이 사업의 근본은 사람의 수를 늘리려는 목적입니다.”
“사···람?”
“사람의 수를 늘린다고?”
차례대로 백작과 자작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네, 영주님!”
“흐음~ 네가 메이플 자작을 도와 행정업무를 처리했으니 제법 우리 파이온의 대략적인 사정을 알 것이다. 우리 영지는 항상 식량이 부족했다는 사실 말이다. 무턱대고 사람이 늘어나면 당연히 식량사정이 더욱 악화되지 않겠느냐?”
“외람되지만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그럴 것입니다.”
“으, 응?”
백작과 자작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의 견문은 그것 밖에 안 된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팰리스는 호통이 떨어지기 전에 급히 발언을 이어갔다.
“영주님! 식량이 부족하면 지금처럼 식량을 수입하면 그만입니다. 단기적으로요. 장기적으로는 황무지를 개간해서 농토를 늘려 근본원인을 제거하면 그만입니다. 땅은 넓지만 그 땅을 일궈낼 사람이 부족한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토지가 부족한 한국과 달리 가이아 전혀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를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팰리스의 물음은 백작의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지배자들이 아주 단순한 이치를 몰라서 지금껏 시행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역대 영주들은 파이온영지와 더불어 제국의 동부를 지키고 유지하는 임무에 충실해왔다.
이 임무만으로도 영지가 보유한 여력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듣는 자의 입장에서는 솔직하게 현실을 말하자니 자칫 변명으로 들릴 분위기였다.
‘젠장~ 이것이 이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런, 이런··· 시원하게 속내를 풀어내면 변명으로 들리겠군.’
파이온 백작과 메이플은 말을 못하고 애만 태웠다.
“···”
“네,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메이플 자작님을 도와 영지의 업무를 처리해왔습니다. 그 때문에 영지가 현실적인 문제로 힘들었고 여력 또한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흠흠~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이것을 아십니까? 황무지를 개간하든, 병사를 징집하여 몬스터를 토벌하든, 그 근본이 바로 사람이란 사실 말입니다.”
“···”
“서재의 책을 읽다가 규모(規模)의 경제(經濟)를 배웠습니다.”
‘아차~ 삼천포로 빠졌다. 이걸 설명하자면 좀 골치가 아파지는데···’
살짝 후회하는 팰리스. 그런데 그가 방금 언급한 용어는 가이아에 존재할 수 없는 용어였다.
경제(經濟)라는 용어조차도 생소해 행정을 다뤄본 귀족이 아니면 태반이 모를 것이다.
“응? 규모의··· 뭐라고?”
“영주님! 방금 규모의 경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나저나 팰리스~ 너의 답변을 끊어 미안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이지?”
살짝 당황한 백작을 대신하여 메이플이 대신 나서 규모의 경제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팰리스는 부리나케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저장되어 있던 ‘폴더(?)’를 뒤져 ‘규모의 경제’에 대한 항목을 찾아냈다.
그리곤 중세시대의 사람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기 시작했다.
“규모의 경제가 무엇이냐면··· 에~ 일정규모의 생산을 능가한 이후에는 생산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물품을 생산하는 비용이 줄어드는 반면 이익의 폭은 늘어난다는 개념으로···”
팰리스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백작의 눈꺼풀이 깜빡거리는 횟수도 늘어났다.
사실, 규모의 경제를 이해하려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대표되는 현대의 시장경제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가이아는 대량생산이라는 개념조차도 생소한 세계였다.
그래서 방안의 누구도 알고 싶지 않았던 팰리스의 설명이 자꾸만 길어졌다.
참다못한 파이온 백작이 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하~ 그렇군. 참 좋은 말이야. 메이플 자작··· 그렇지 않나?”
‘저 아이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웬만하면 그만 좀 마무리하지?’
“하! 하핫~ 당연히 아주 좋은 말입니다, 영주님!”
‘젠장~ 이해는 둘째 치고··· 졸려 미치겠구먼.’
메이플이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토머스는 서서 코를 골고 있지 않은가.
보다 못한 아니, 듣다 못한 아르펜이 팔꿈치로 ‘가격’해 토머스를 깨웠다.
“드르렁, 드르렁~··· 어, 어? 옆구리를 누가 간지럽··· 헙!”
아르펜은 급히 토머스의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아주 자그맣게 속삭였다.
“야 인마~ 너 미쳤어? 정신 안 차릴래?”
“퉤퉷~ 아저씨! 이제 나 기사 먹었거든요? 이젠 아저씨보다 높은 사람이라고요.”
토머스는 역시 분위기 파악이 젬병이었다.
아르펜도 살짝 비슷한 유형이라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행동했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너 뒤통수에 화살 한 대 달아 볼 텨? 밤길 조심해라!”
“에이 씨··· 어? 그런데 아저씨~ 우리 이래도 되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그제야 둘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한참 ‘독서삼매경(?)’ 즉, 정보를 읽다시피 지껄이던 팰리스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흠흠~ 그런데 방금 설명한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갖춰야할 전제 기반이 존재합니다.”
“그, 그래? 그럼, 그 기반이 무엇이지?”
“충분한 인구! 충분한 사람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막말로 사람이 없으면 무엇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잖습니까? 한 마디로 사람이 있어야만 영지가 유지되고 한 발 더 나아가 영지가 발전해 더욱 강력해집니다.”
“인구라··· 하긴! 사람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몬스터도 토벌할 수 있겠지.”
그제야 파이온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가!
세금을 납부할 백성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수를 늘리는 임무였다.
“흐음~ 사람이라···”
파이온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깊이 사색하기 시작했다.
메이플 자작 이하 방안의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며 백작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았다.
“사람이 있어야 영지가 발전하고 강해 진다라··· 하핫~ 우하하하~”
심각하게 사색하던 파이온 백작이 난데없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그래! 팰리스 네 말이 맞구나. 네 말이 정녕 맞았어!”
“?···!”
“사람! 그래, 사람이 바로 영지를 이루는 가장 기본이자 근본이었지. 푸하하하~”
크게 웃는 파이온 백작. 팰리스에게 무슨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도 사람이 영지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전대 영주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깊이 인식한다는 건 큰 차이였다.
알고 있음과 그것의 실천하는 것과의 차이처럼···
‘아~ 다행히 제대로 통한 건가? 뭐, 반응이 나쁘지 않군.’
파이온 백작이 크게 웃자 팰리스는 내심 안도했다.
처음 생각과 달리 두서없이 진행되었지만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진다.
‘그나저나 나에겐 무슨 상을 내리실까?’
팰리스가 잠시 후에 받을 상을 기대하던 바로 그때였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백작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표정 또한 더없이 엄숙해졌다.
게다가 이글거리는 눈동자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길이 쏘아질 것만 같았다.
“아르펜 휘슬러와 라이나의 아들, 팰리스는 들어라!”
파이온 백작의 목소리는 너무도 엄숙하고 위엄이 가득했다.
주위를 장악한 위엄에 팰리스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의 토머스처럼···
“그래~ 팰리스 휘슬러! 본 영주는 마침내 너에게 내릴 상을 결정했구나.”
‘아싸~ 신난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대단한 상을 주시려고 이렇게 똥폼을 잡는 거야?’
만인(萬人)을 제압하는 백작의 위엄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엄숙한 분위기에도 팰리스의 맘속의 이렇게 경박했다.
“팰리스 휘슬러!”
“넵! 영주님!”
“본작은 너에게 100골드의 상금과 더불어 ‘파이온’이란 성을 하사하겠다.”
“네, 네?”
‘100골드야 그렇다 치고 성(姓)을··· 하사한다고? 나는 휘슬러라는 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요?’
팰리스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주위의 지켜보던 메이플 자작과 아르펜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르펜이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응? 왜··· 저런 표정이지? 파이온이란 성이 그렇게도 대단한가?’
알고 보면 정말로 대단했다.
지금의 팰리스는 몰랐지만 ‘파이온’이라는 성을 하사한다는 의미는 정말로 대단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여, 영주님! 너무 하십니다. 패, 팰리스는 제··· 아들입니다.”
아르펜이 당장이라도 울먹일 것 같은 표정으로 항의했다.
파이온 백작의 발표는 팰리스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응?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이래? 아버지~ 당연히 전··· 당신의 아들이잖아요!’
“아르펜~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내가 그것을 원한다.”
파이온 백작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것을··· 원하신다고요?”
“그렇구나. 한때는 나의 친우였고 이제는 충성스러운 나의 검이 된 자, 아르펜이여~”
“이, 이제 와서 왜···”
“그만한 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자격··· 말입니까?”
“그래 충성스러운 나의 검아~ 파이온이란 성을 가질 자격을 말함이다. 팰리스는 타고난 핏줄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증명했구나.”
“!···?”
‘뭐, 핏줄··· 이라고요?’
팰리스는 자꾸만 요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영문을 몰라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10. 팰리스 파이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