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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은 세상으로 나와 미래를 준비하다.
팰리스가 별다른 생각 없이 아버지에게 선물하겠다고 준비한 각궁은 본의 아니게 여러 변화들을 불러왔다.
일단, 드워프와의 계약을 체결하지는 못했지만 미래의 시다바리 후보들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변화. 팰리스가 준비했던 계획을 일부분 수정해야할 상황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팰리스는 본래 마나호흡을 이용하여 일정한 수준으로 성취를 끌어올린 후에야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었다.
“지켜낼 힘도 없으면서 함부로 보물을 드러내면 큰일 난다. 보물은 그것을 지킬 힘을 가졌을 때에만 유효하고 보물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 그 자체다.”
그랬다. 칠성은 매우 평범한 ‘산업역꾼’으로 살았지만 98년의 경륜과 경험을 가졌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시절에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도 대기업에게 빼앗기는 중소기업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기술을 탈취당하기만 하면 양반일지도 모른다.
대기업에 의해 회사가 망하고 가정까지 파탄 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렇게까지 꼭 해야 하냐고? 회사가 망하고 가정이 깨지면 우리에게 재판을 못 걸잖아? 명심해라, 김차장! 나도 당신도 사주(社主)의 일개 부속품에 불과해, 부속품! 알았나?]
그렇기에 팰리스는 자신의 미래를 신중하게 계획했던 것이다.
“그래, 최소한 익스퍼트급이다. 신체 외부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무조건 조심해야 해.”
물론, 익스퍼트급도 자신과 자신이 가진 보물을 지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너무 늦게 나오면 세력은 언제 키우고 예쁜 레이디는 언제 꼬드길까!
그래서 절충한 성취 수준이 익스퍼트급으로 앞으로 10년 후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각궁의 성능에 크게 만족한 아르펜이 그만 (당분간 황도에서 생활하는)영주를 대리하는 다니엘 메이플 자작에게 각궁을 ‘신무기’로 보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히 팰리스는 이런 아버지의 독단과 경솔함이 불만이었다.
‘10년 후를 예상했는데 벌써 세상에 나오다니··· 마음에 안 들어.’
뭐, 아주 작은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일주일 후의 이른 아침이었다.
깨끗한 새옷 차림의 팰리스는 아르펜과 함께 짐마차의 마부석에 올랐다.
예상대로 불만스런 팰리스와 안절부절 못하는 아르펜의 표정이 꽤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팰리스~ 이제 곧 출발해야 한다.”
“아빠~ 파이오니아에 꼭 가야해요?”
팰리스가 말한 파이오니아는 백작성이 위치한 영지의 중심도시로 마차로 이동하는 데에 한나절이 걸린다.
“그게··· 메이플 자작님께서 널 꼭 보자고 하시는 바람에··· 미안하다, 팰리스.”
아르펜은 머쓱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른 짐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어서 가자!”
‘이~히히힝~’
‘덜거덕, 덜거덕~’
“하아~ 마음에 안 들어.”
알다시피 가이아는 철저한 신분제사회였다.
그린 포레스트에서만 살아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했지만 신분제도는 팰리스에게 강한 거부감과 함께 상당한 걱정거리였다.
거 있잖은가!
옷을 더럽혔다고 목을 뎅강 잘라내는 악덕영주와 그에게 고혈을 빨리는 불쌍한 영지민들···
게다가 이번 방문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팰리스는 예정보다 일찍 드러내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말본새가 다소 삐딱했다.
“뭐, 귀족나리께서 부르시니깐 싫어도 어쩔 수가 없는 거겠죠? 우린 평민이니까요.”
“그렇게 말할 것 까지는··· 팰리스~ 이제 좀 그만하자.”
“쳇~ 내가 뭘 어쨌다고요.”
“네 친구들은 영주님의 성에 가는 널 부러워하잖니. 근데 너는 왜···”
보통의 아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영지에서 가장 큰 도시에다 영주가 사는 성을 방문한다. 아마도 밤잠을 설칠 정도로 설렐 것이다.
그러나 팰리스가 어디 보통의 아이였던가.
칠성시절에는 인구 1,000만의 거대도시 서울특별시에 살았었다.
“제가 뭐, 어린 아인가요?”
“···아니었니?”
“쳇~ 아, 네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아르펜은 아들의 이런 냉담한 반응이 내심 당황스러웠다.
‘에휴~ 우리 팰리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런 까닭에 부자간의 대화가 한동안 단절되었다.
마차로 지나치는 오솔길 주변은 개발이 되어 있지 않았다. 땅은 넓고 인구가 적은 가이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답답했는지 아르펜이 슬슬 주변을 구경하는 팰리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팰리스 너도 자작님을 좋아할 거야. 우리 주군(主君)처럼 아주 훌륭한 분이거든?”
“아, 네에~ 그러시겠··· ”
불현듯 다소 어울리지 않은 용어를 들은 것 같았다.
“아참~ 그런데 주군이라고 말하셨어요?”
“어, 그런데?”
“백작님이나 영주님이 아니라 주군··· 맞아요?”
아무래도 파이온 백작을 뜻하는 것 같은데 주군이라는 명칭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용어였다.
“어험~ 너도 알다시피 영주님과 나는 보통 사이가 아니거든?”
“아, 네에~ 뭐, 그러시겠죠.”
‘쳇~ 또 허풍 치시네.’
팰리스에게 아르펜은 항상 멍청해 보이는 ‘아들바보’였다.
그 때문에 본래보다 훨씬 낮게 평가되곤 했다.
“아우~ 또 아빠를 못 믿니? 진짜라니깐? 아빠 말 정말 못 믿어?”
‘솔직히 말해서 네~ 그래요!’라고 말하면 아르펜이 하루 종일 삐칠 것이다.
그래서 너그러운 팰리스가 은근슬쩍 넘어가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빠~ 영주님은 어떤 분이세요?”
팰리스가 생각하는 (소설로 접한)중세시대의 영주는 높은 세금으로 백성의 등허리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 그것으로 사치를 일삼는 매우 뚱뚱한 남자였다.
“영주님? 그야 딱 기사(Knight)중의 기사라고 할 수 있지. 실력도 아주 뛰어나시고.”
“기사···요?”
“그렇지. 얼굴까지 아주 잘 생기셨단다. 당분간은 황제폐하를 모시느라 황도에 계셔 존안을 뵙지 못해 아쉽지만···”
‘뭐야~ 아버지가 설마··· 영주님 빠돌인가?’
“아, 네에~ 그런데 영주님이 정말 기사에요? 관리가 아니라?”
“보통의 기사가 아니지. 네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만 우리 파이온 영지는···”
제국의 동부지역을 수호하는 변경영지로 대수림(大樹林) 즉, 마수의 숲과 인접한 바람에 다소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영지와 달리 정예병을 상시 고용하고 군기를 엄정하게 유지했다.
이런 사정이니 영주는 전통적으로 문관(文官)이 아닌 무관(武官). 브라이트 파이온백작은 이런 영지사정에 걸맞은 매우 강력하고 유능한 변경백이었다.
“그럼, 병사의 수가 아주 많겠네요?”
“당연하지. 기사단이나 레인저 같은 직속부대를 제외하고도 일반 고용병사만 삼천이 넘는단다.”
“삼천이나요? 그것도 고용병으로요?”
100만 대군이 어쩌고 하는 것에 비하면 고용병 삼천은 얼핏 너무 적은 수로 느껴진다.
그러나 자유민 50만의 영지에서 고용병사 삼천은 상당한 무리를 해야 겨우 뽑아낼 수 있는비율이었다.
지구의 중세시대 기준이지만, 병사 1인당 평균인구비율은 1: 150~200 수준이었다. 그런데 삼천의 숫자에는 레인저나 기사단, 공병대, 정보부대 같은 영주 직속의 무력이 제외된 숫자였다.
“좀··· 많지?”
“네. 좀 많네요. 그렇다면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금이 좀 세겠네요?”
차츰 6살 아들과의 대화로 적당하지 않은 내용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아르펜은 아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꿀 요량이라 이점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뭐, 알았다하더라도 팰리스가 원체 애어른이라···
“어험~ 그렇다면 내가 훌륭한 영주님이라고 말했을까!”
“그럼, 세금이 낮나 보죠?”
“당연히 낮지. 다른 영지는 최하 수확량의 60% 이상을 세금으로 낸단다. 영지전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80%를 걷기도 하지. 하지만 우린 겨우 50%밖에 안 돼. 이런 저런 잡다한 세금이 거의 없고.”
‘50%의 세금을 겨우라고 말하다니···’
팰리스의 생각과 달리 50%의 세금은 주변보다 꽤 낮은 세율이었다.
여기에 인두세를 제외한 사망세, 결혼세, 시설이용료 등의 경우에 따라서는 배보다 배꼽이 클 잡세(雜稅)가 거의 없다는 건 영지민에게 상당히 유리한 세율이었다.
“그럼, 군대는 어떻게 유지하는 거예요? 유지비용이 엄청날 텐데요.”
“변경영지라 황실의 세금이 면제받기도 하지만 최대한 아끼고 아껴서 군세를 유지하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아끼는 건 한계가 있을 텐데.”
평화로운 시기의 병사들은 강력한 소비 집단이자 언제든지 사고 칠 위험성이 너무 다분했다.
삼천의 군세를 유지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할 것이다.
“정말이라니깐? 그래서 영주님이 무척 검소하게 생활하시지. 아~ 불쌍하신 우리 영주님. 황도에서 명예도 모르는 귀족들에게 창피나 안 당하실 런지··· 쯧쯧쯧~ 아참~ 메이플 자작님도 참 소탈하시고 유능한 분이시지.”
다소 오버 같지만 이런 아르펜의 노력이 통했을까?
영주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선입견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아휴~ 아버지도 참··· 다행히 걱정했던 그런 악덕영주는 아닌가보군.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검소하고 유능하다는 귀족이 왜··· 아~ 그래. 아마도 각궁 때문이겠지?’
“아참 아빠~ 메이플 자작님께 각궁을 보여줬다면서요?”
“그래서 널 찾는 거라고 말했잖니. 아참~ 그거··· 드워프에게 얻었다고 했지?”
솔직하게 밝히기 곤란했던 팰리스는 이렇게 대충 둘러댔었다.
“네, 아빠. 우연찮게 만난 드워프에게 얻었어요. 그런데··· 왜요?”
“흐음~ 그럼, 안 될 것 같은데···”
아르펜의 미간이 급격하게 좁아들었다.
“뭐가요?”
“궁병대 말이다. 내가 가꿍으로 무장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거든? 그때 별생각 없이 메이플 자작님께···”
‘이제야 생각해 보니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 말이죠? 뭐, 각궁은 서비스 차원이니까 통 크게 나가죠. 기회가 되면 편전 사용법도 나중에 알려주고요.’
편전은 아버지가 각궁에 익숙해졌을 때에 알려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각궁이 영지에 알려지는 통에 공개를 살짝 뒤로 미뤘다.
“그래요? 그럼, 궁병대를 각궁으로 무장시키면 되겠네요, 뭐!”
“···어떻···게?”
“그야 잘!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어떻···”
아들의 말장난에 아르펜이 버럭 성을 내려고 했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아하~ 혹시··· 너도 만드는 법을 알고 있구나?”
“헤헤헤~ 네, 아빠~ 드워프에게 졸라 만드는 법까지 알아냈어요.”
영악한 드워프들이? 턱도 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팰리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르펜의 좁아졌던 미간이 활짝 펼쳐졌다. 아니, 고삐까지 내던지곤 어린 아들을 끌어안은 채로 양 볼을 마구 비벼댔다.
“오~ 팰리스··· 어쩜 이리도 예쁠까!”
“앗~ 따가워! 그리고 아빠~ 운전조심! 운전 중에는····”
얼떨결에 칠성시절의 용어가 튀어나왔다.
“우, 운전?”
“앞을 잘 보고 마차를 몰라고요. 아니, 수염이 너무 따가워요.”
“하하하~ 미안. 그리고 걱정마라, 아들아~ 이래 뵈도 소싯적에 술을 잔뜩 먹고 친구들이랑 고속으로 마차를 몰았어도 이 몸께서는···”
‘음주운전? 폭주마차족? 그걸 자랑이라고··· 아버지! 그것들이 자랑입니까? 그건 명백한 범죕니다, 범죄!’
결혼 전의 아버지의 행실이 다소 의심스러워졌다.
“정말··· 그런 건가요?”
“아니 왜 그런 눈으로··· 흠흠~ 안심해라. 그것도 이젠 옛말이지. 이젠 홀몸이 아니라서 조심한단다.”
“그렇···겠죠?”
“아암~ 당연하지. 아참~ 자작님이 내리실 상이나 미리 생각해라.”
“상(賞)이요? 상이라면 설마 그···”
각궁에 대한 상이리라.
“가꿍으로 우리의 군세(軍勢)가 강해지는 거니까 당연히 상을 내리시겠지. 우리 영지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확실하거든? 하하하~”
“오~ 그 점은 마음에 드네요.”
“그렇지? 우리 영지가 최고지?”
“네, 아빠! 근데 지금 뭐해요? 빨리 가자고요.”
팰리스의 재촉에 아르펜은 짐마차를 좀 더 빠르게 몰았다.
그동안 팰리스는 상으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팰리스 일행은 마침내 예상보다 30분가량을 앞당겨 성문 앞에 도착했다.
“아~ 여기가··· 파이오니아?”
‘성벽이 정말··· 높고 거대하군.’
파이오니아는 높이 5m 높이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중세시대의 도시였다.
일반적인 영지라면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엄격한 검문검색을 당하고 다소 부담스러운 통과세를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자칭 아르펜의 앞마당이었다.
마침, 성문의 병사들을 지휘하던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중년의 기사가 쇳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달그락, 달그락~’
“아르펜 대장인가? 상당히 오래간만이군.”
“며칠 전에 들렀었는데··· 아참, 자넨 그때 비번이었나? 아무튼 고생하는구먼.”
‘오호~ 일반기사겠지만 기사랑 야자를 텄네?’
팰리스는 살짝 놀랐다. 허풍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일부분은 사실이었다.
“아~ 그랬었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아참~ 저 아이가 바로 라이나의···”
‘어라? 엄마를··· 아나?’
“아니, 나의 아들이네. 메이플 자작님께서 내 아이를 찾으셨거든?”
“흐음~ 그런가? 시간이 되면 언제 술이나 한잔하면 좋겠네.”
“그럴까? 그럼 이만··· 이랴~”
칠성시절의 ‘언제 밥이나 먹자.’와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둘 사이에서 신경전이 아주 살짝 느껴졌다.
‘뭐, 기사와 레인저 사이라서 그런가? 아참~ 드디어 중세시대의 도심을 구경하게 되겠군.’
무뚝뚝한 기사와 일별한 짐마차는 성안으로 들어섰다.
팰리스는 살짝 기대했다.
‘파이오니아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성안의 모습은 중시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처럼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그런데···
“하하하~ 깜짝 놀랐지? 이곳이 바로 우리 영지의 주도(主都) 파이오니아다.”
“윽~ 정말로 깜짝··· 놀랐네요.”
아르펜의 장담처럼 성안은 정말 깜짝 놀랄 만했다.
‘후웁~ 후우~’
“하아~ 반갑구나. 그리웠던 이 냄새···”
“뭐, 이 냄새가 그리웠다고요? 윽~ 우웩~”
코를 막은 팰리스가 토할 것처럼 마구 헛구역질했다.
맹렬한 악취들이 사방에서 마구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5. 작은 세상으로 나와 미래를 준비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