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유보라의 손을 잡고 나왔을 때.
저 바깥으로, 진득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단순히 빛으로 표현하는 검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 안에 기운들이 담겨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쇠약하게 하고, 그 의지를 박탈하여 버리는 힘들이 담긴 기운이었다.
-열쇠다!
-열쇠가 출현했다!
-흐히히히. 이 무슨 생각지도 못한 횡재야?
-멍청이들! 열쇠를 이리 꺼내면 안 되거늘……!
그 뒤로 들리는 의지들.
-악마로군요. 과연 빠르네요.
“이런 일엔 가장 빠르니까. 시끄러운 약탈자들이지.”
“여전하네, 저것들은.”
의지의 주인은 악마들.
이전에 잡아먹힌 머저리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무시할 존재들은 분명 아니었다.
악마 하나, 하나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고.
그 개성만큼이나 강력함의 정도가 다르니까.
편의를 위해서 악마라고 뭉뚱그려 말할 뿐이다.
저들은 하나, 하나가 각기 다른 종족이라 봐도 무방한 존재들이었다.
그만큼 그 격과 힘이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달려오고 있을 때.
콰가가각-!
한발 늦게 소란스레 게이트가 열린다.
그게 수십이었다.
-머저리 악마들이! 어딜 노리고!
-이전부터 여긴 우리의 영역이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마족들이었다.
-맙소사. 여가 없는데도 잘도…….
그런 마족들을 보고, 이제 와 소환된 마왕은 제 이마를 쳤다.
회귀 전에도, 온갖 협잡질로 인간을 유혹한 마왕.
그러나 잘 보면, 그는 마계에서도 온건파에 속했다.
‘급진파에 가까운 마족은 인류의 절멸을 바랐으니까.’
결국 얼마나 죽이냐로 온건과 급진이 나뉘게 되니, 일종의 상대적 온건파이긴 했다만.
어쨌건.
마왕은 제가 있는 마계에 공허가 내려앉을 걸, 이 지구로 미루는 대신에.
백만 정도는 살려 주려고 했던 게, 그나마 녀석이 최악은 아니라는 거겠지.
뭐 내가 보기엔 수십억이 죽어 나가는 판국에 백만을 살려봐야 그게 그거긴 하다만.
멸종될 동물을 겨우 숨만 붙여 놓는 꼴이랑 비슷하지 않나?
마계에 가서도 우리 인간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대충 보이고 말이다.
지금은 그게 정반대인 상황이었다.
이전엔 마왕이 우리가 넘어설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강자였다면.
내가 아키텍쳐의 영혼을 잡아먹고, 여러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은 역전되었다.
나를 옆에서 지켜본 마왕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 이래서야 네게 할 말도 없구나.
“그걸 이제 알았냐?”
-최소…… 최소만 살려 주거라.
그러기에.
내가 이전에 하였던 약속처럼.
내게 역으로 자비를 바라고 있었다.
공허의 방아쇠를 어찌 당길지 내가 알게 된 지금.
이대로 몇 가지 손만 쓰게 된다면, 내려앉을 공허는 인류가 아닌 마계로 향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현재는 지극히 내가 유리하단 이야기.
그러기에 마왕은 나와 처음 보았을 때 맺었던 그 계약을 말하며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전에는 최소의 인류를 그가 살려 주었다면.
지금은 최소의 이곳에 있는 마족 중 일부라도 살아 돌아가길 구걸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냉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건 봐서 결정해야지. 미리 약속된 건 알고 있지?”
-안다. 여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
때문에 이전에 했던 계약을 언급했다.
마왕은 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리 없는 계약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계약을 진행키 위해서.
“그래. 알면 어서 가라고!”
고오오오-!
나로부터 대량의 영력을 주입받아, 존재력을 키운 마왕은.
-……다녀오마.
곧바로 게이트를 통해 쏟아지는 마족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혼파망이구만.”
“……반은 한휘 네가 만든 거잖아.”
내 말데로였다.
유보라가 드러남으로서 공허를 일으킬 방아쇠 꺼내는 데 성공했다.
시간과 영혼.
성좌들도 잘 다루지 못하는 이 둘을 익히고 나온 괴물.
그 괴물이 부활하여 이 차원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체계가 지니고 있는 저울의 추는 기울 게 돼 있었다.
공허를 불러들이는 방향으로.
이건, 이미 시작되는 순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족과 악마 따위가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하나.
방아쇠가 되는 유보라를 자신들이 차지하였을 때!
공허를 불러들일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그녀를 얻었을 때 얻는 이득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존재한다면, 다른 타 차원을 터트리는 것도 쉬워질뿐더러.
혹 그 필요가 다하면, 그녀를 잡아 먹음으로써 얻는 바가 또 있으니까.
때로 좋은 제물은 성좌들로부터 많은 걸 얻어낼 수 있는 보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불러일으켰지 않나.
판은 내가 깔았다 할 수 있었다.
여기다가.
“흐흐흐. 그래서 더 뿌듯하다고.”
“……여전하네, 정말.”
하나를 더 뿌렸다.
그것이 바로 마왕이다.
나와 계약을 맺은 마왕은 내가 그녀의 고향인 마계에서 난장판을 부리지 않는 대신.
살아생전 그녀의 세력만큼은 내게 힘이 되어주리라 약속하였다.
그게 나와 마왕이 처음 맺은 계약이었다.
물론.
‘믿지 않았지.’
그걸 믿을 리가 있겠는가.
상황이 언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면.
그 계약을 지키기는커녕, 파기하고 제 몫을 챙기겠다고 갈 녀석이 마왕이다.
그런 녀석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대신.
‘조종할 순 있지.’
상황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녀석을 내 패로서 써먹을 수 있다곤 생각했다.
그게 지금의 상황이다.
유보라가 아무런 조치 없이 마계로 튀어 들어간다면, 공허는 마계로 내려앉을 수도 있는 터.
그런 유보라를 잡아먹겠답시고 머저리 마족들이 수십 개의 게이트를 열고 이쪽에 오지 않았나.
무려 마계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것들을 수십 개나 연 거다.
그런 상황이니, 마왕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 현재 우리의 실력으론, 저 수십 게이트 중 하나쯤은 금방 뚫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전엔 우리가 방어를 해야 했다면, 이제 녀석들이 침공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지.’
때문에 마왕은 열심히 달려간 거다.
그걸 막자고.
물론, 막힐 리가 있나.
마왕이 무려 왕이란 칭호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가장 큰 세력을 지녀서일 뿐.
가장 강해서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내게 영혼이 잡아 먹혀 있는 지금.
그녀는 가장 강한 존재조차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하나였다.
“이야. 잘도 싸우네.”
“그러게나 말이야.”
콰가가각-!
-이것들이!
-크흐…… 왜 막느냐!
-캬아아악! 망할 마족 새끼들!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말을 따라주는 몇몇 충신들과, 같은 마족을 막아 내는 거.
간간이 적의를 지닌 악마 정도의 움직임을 막아 서로 싸우는 거다.
이름하여.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메타랄까.
악마, 마족, 마왕을 따르는 마족.
삼파전이 벌어지게 되는 거다.
서로 죽고 죽이는 거지.
이런 난장판을 만들어 냈으니, 상큼할 수밖에.
물론, 이 모든 게 우리에게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건 저 위에 있는 체계란 것은 공허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린 그 공허를 막기 위해, 마계든 음의 차원이든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음차원으로 갔겠지. 그게 계약이니까.’
전생에 마족이 자신들에게 내려앉을 공허를 우리에게 던져줬듯이.
반대로 이번 생에서는 악마가 있는 음차원에 던져 버리는 거도 좋은 방법이었다.
정 안 되면 마계도 방법이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달라졌다.
아키텍쳐의 영혼을 흡수하고는 생각해 낸 방법들이 있으니까.
반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나.
“한휘. 할 수 있겠어? 널 믿고 오기는 했지만 실패한다면…….”
“두 번의 패배겠지. 근데, 내가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봤어?”
“……아니.”
“그러니, 믿으라고.”
“후…… 그래.”
언제 나와 유보라가 행하던 일이 도박이 아닌 적이 있던가.
“자, 그럼 어서 시행해 줘. 다음 단계로 가야 하니까.”
“그래.”
혼란스런 상황을 만들어낸 지금.
우리는 이 단계로 갈 시간이었다.
* * *
일 단계가 혼란스런 상황 만들기라면,
이 단계는 그 혼란에 혼란을 더하는 것이다.
그를 위하여 나는 온갖 패를 모았고.
이제 그 패를 꺼낼 때였다.
그 패를 꺼내는 것은 내가 아닌, 유보라였다.
“후우…….”
스스스스슷- 스스-
한숨을 푹 내쉰 유보라.
그녀가 나조차 알 수 없는 언어들을 주문 삼아 외워댄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들.
‘제 스스로 언어를 만든 건가?’
그녀만이 알아들을 언어의 순환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순환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그녀가 그려 낸 마법진도 속도를 더해간다.
거대해져 가는 마법진은 이내 우리가 있던 구미호의 거처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
그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낸 끝에.
유보라가 나지막이 한마디를 던진다.
“……다중 이동 게이트. 발동.”
파아아앗-!
그 한마디가 마법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시동어.
시동어가 던져짐에 마법진은 거대한 다차원의 도형을 그려내었다.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마법진이, 태엽이 돌 듯 돌아간다.
그리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크고 작은 수십여 개의 게이트.
그 게이트를 통해서.
“한휘!”
“히히. 미친…… 정말 이 정도란 말이지?”
“으음…….”
“호움. 재밌군요, 역시 재밌어요.”
“크큭. 나도 왔어, 한휘.”
오래도록 모은 나의 패들이 앞으로 나선다.
마리. 이사야. 나헤나. 지슨. 신이현, 이한철, 이창복, 백택수.……
그리고 이모텝과 아이단에 이어 건맨까지.
과거의 칠 인이 현재에 와서 모이게 되었고.
그로도 모자라.
칠 인을 보좌하여주던 천인대보다도 더 많은 자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미래 길드와 정부의 인원들 전부가.
“이런 미친 짓은 정말 마지막이에요!”
“후후. 나도 두 번은 못 한다고.”
미래 그룹과 그 아래 있는 불퇴권사 김시연의 뜻을 따라 이곳에 와줬으니까.
그 외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연이 크고 작든 상관없이 온 자들.
또는 나로부터 약속된 이득에 따라 달려 온 자들까지.
개중에는.
-도령, 오랜만이야!
-허허. 재밌는 구도구려.
인간이 아닌 자들도 존재하였고.
또 일부는.
“할 이야기가 많아, 한휘. 이제는 이해할 테니까.”
-재밌네요. 저자가 움직였다는 말이죠. 하기는 전에도 그는…….
“자자. 거기까지 하자고, 꼬리 아홉아.”
-……시끄러워요.
이모텝과 구미호처럼. 그 정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자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와 줘서 고마워, 모두들.”
회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달려왔던,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패들.
그리고 이 패들이 만들어 줄 이 다음은.
“자, 그럼 다 죽이러 가 볼까?”
“미친 짓은 언제나 환영이지!”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에 상황을, 사파전으로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였다.
콰가가가가가각-!
수천이 넘는 이능력자들이, 삼파전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