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뭘 바꾸느냐.
이에 대한 답은 결국 방향이다.
“더 이상 끌려다닐 수만은 없어.”
“끌려다녔다고?”
“어.”
“우리는 나름…… 성과를 내고 있지 않았나?”
“있긴 했지, 문제는 그게 ‘나름’이란 거야.”
세상을 구하겠답시고 다닌 나다.
그러나 그 방식이 문제였다.
언제나 반 발자국 혹은 한 발자국 더 빠르게 움직인 게 다였다.
적이 움직이면 그에 대한 대응을 하고.
그 대응을 통해서 적의 예상보다 크게 한 방 먹이고.
딱 그 정도였다.
“계획을 깨고. 부수고를 반복하긴 했지. 성과가 없었느냐 하면 있었어. 통쾌하기도 했지. 근데 문제는…… 딱 그게 다란 거야.”
“직설적으로 말하면 수동적이라 이건가?”
“맞아.”
이사야가 정답을 말해온다.
마리도 입술을 질끈 물었다. 반박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모두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공허]를 막는다는 거.
단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거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최선을 넘어서야 했고.
노력 이상의 것들을 얻어 내야 했다.
설사 그게 행운에 기대는 거라도 상관없었다.
성과만 얻어 낼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되든 해야 했다.
물론.
‘지금까지 제대로 안 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만…….’
지금까지도 잘해왔다.
잘해왔기에 내가 성좌 아키텍쳐를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 있지 않았겠나.
그를 통해 지금의 힘을 얻었고, 말이다.
잘하지 못했다면, 나는 거기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 터다.
분명히 우리는 잘해왔다.
“이미 알겠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알지?”
“알아요. 새로운 정보, 힘을 얻었으니 그에 맞춰 계획을 변경하자는 것뿐이죠.”
“바로 그거야.”
덕분에 더 잘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게 됐다.
“그를 위해서 우린 뭐부터 하면 되는데요?”
“더는 수동적이지 않게. 주도적으로 가자고. 그에 대한 방안으로는…….”
나는 그 잘할 수 있게 된 방법들을 설명했고.
이사야와 마리는 그걸 가만 듣더니, 더 구체적인 방안을 짜냈다.
내가 설계한 기본 바탕이, 그녀들과의 교류 속에서 현실화됐다.
“됐어…… 이 정도라면…….”
“좋네요.”
“몇 배는 더 빨라지겠는데?”
“후후. 사람도 더 많아지겠죠.”
그 방안들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고.
우리들이 만족하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자, 동료들을 부활시키는 데서, 일 막.
그들과 함께 힘을 쌓아 지금에 이른 게, 이 막.
이제 마지막 삼 막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설계도는 전부 만들어졌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지 않겠나.
“움직이자.”
“오케이!”
“예!”
다시 러시아를 넘어 움직일 때가 왔다.
전처럼 수동적인 게 아닌 우리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 * *
“한휘. 제가 못 가서 미안…… 음?”
러시아 북부를 정리하고 온 나헤나.
잔가지들이 남아 있긴 하다만.
지금의 그녀는 남부의 여왕이 아닌, 러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여왕이라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달리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자도 없으니까.
그 유명했던 독재자조차 이젠 손을 쓰기 어려웠다.
제 수족들이 역으로 그녀의 수족이 된 지가 오래였으니까.
그래선가.
회의실을 들어오는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아니.
밝았었다가 맞겠지.
그녀의 표정이 다시 구겨지는 데는, 이 안의 인기척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내는 몇 초로 충분했으니까.
그녀의 무너지는 표정에 상관없이, 인기척의 주인이었던 김시연이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왜 한휘가 아니고, 당신이 있죠?”
“그가 제게 이곳의 일을 맡겼으니까요.”
“하…… 그 말은 저를 두고 떠났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
나헤나의 표정이 다시 구겨진다.
‘정말 끝까지……! 자기 마음대로라니까!’
어떤 의미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러시아의 여제로서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한 명의 개인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를 아직 그녀도 잘 몰랐다.
어쩌면 그 둘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중요한 건 지금 그러한 게 아니었다.
일의 처리가 우선이다.
그 정도쯤은 나헤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간 짜증을 부리는 것으로, 그녀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다시 원래의 그녀다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여왕의 모습으로.
“한휘가 맡겼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어떤 자리인지도 알겠네요?”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새로운 여왕과 협의를 하는 자리죠.”
같은 자리에 서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제 밑 자리를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나헤나였다.
러시아를 지배하다시피한 지금.
그 성격을 숨길 생각도 없는 그녀였다.
나헤나는 김시연을 도발했다.
“그걸 정확히 아는데도…… 꽤 자신만만한데요? 한휘도 없는 지금, 제가 당신을 세뇌할 수도 있다는 거 알아요?”
“가능하실 거 같습니까?”
그런 나헤나의 도발에도 김시연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그녀에게 그보다 강한 도발이 있을까.
화아악-
그녀는 보란 듯이 매혹의 힘을 일으켰다.
‘경고 정도는 해두어야겠지. 자신이 누굴 상대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진심으로 김시연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이득이더라도, 후에 지한휘가 알았을 때 받을 타격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사람을 건드린 자에겐 확실히 보복하는 자였다.
김시연은 항시 같이 다니지는 않으나, 분명히 그가 챙기는 자.
그런 그녀를 매혹해보아야 남는 건 없다.
그러나 적어도 경고 정도는 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여왕인 자신을 앞에 두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그녀의 콧대를 눌러 줄 생각이었다.
그리함으로써, 이 회담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계산까지도 확실히 해 둔 상태였다.
그러기에 한 점 망설임 없이 힘을 끌어 올렸고.
김시연을 잡아먹으려 했다.
“가능하지 않을 리가…… 읏……?”
[매혹의 조종자인 당신은 매혹의 힘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분쇄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들어 갔다.
매혹의 힘.
러시아 전역을 휘어잡게 만든 그 힘이 막혔다.
아니.
사라지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지닌 전체 힘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일부이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뭐지……?’
놀랄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그녀의 놀람에 상관없이, 김시연은 회담을 할 때 특유의 무표정으로 물어 왔다.
“후음…… 느껴지지는 않지만, 힘을 쓰신 거죠? 그리고 막히셨구요?”
“……당신이 한 게 아니야?”
그 물음의 의미를 나헤나가 모를 리가 없다.
이건 눈앞에 김시연이 한 게 아니었다.
김시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여왕을 막을 정도의 힘은 저도 없거든요.”
“그럼 대체 누가……? 설마……?”
그럼 누구란 말인가.
“누구겠어요. 여왕인 당신을 막을 수 있는 자가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이곳의 일을 김시연에게 맡겼다.
그 의미는 곧 그가 이곳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떠났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자신도 열을 내지 않았던가.
“……갔다고 하지 않았나?”
“떠났죠. 아주 확실히요.”
“이미 떠난 그가 나를 막았다고?”
“그런 거 같네요.”
“하…… 떠난 주제에 잘도…….”
어떻게 떠나며 이런 일을 해낸단 말인가.
매혹의 조종자가 되며 그녀의 격은 상당히 높아졌다.
지금 이 순간도 그 격은 끝없이 상승하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었다.
그때 얻었던 영혼의 확장과 섞임.
그를 통해서 그녀는 일개 개인의 영혼이 아닌, 하나의 군집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까.
이전처럼 매혹의 힘을 사용했다고 사라지는 식도 아니었다.
총량도 계속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했다.
이전과 달리 그와 대등한 자리에 설 수 있다고.
그런데 지금 상황은 뭔가.
눈앞에 있지 않은 그가 그녀를 막았다.
‘대체 뭐야…….’
알 수 없는 허탈함이 느껴진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해봐야 얻어지는 건 지독한 열등감밖에는 없을 터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김시연은 동질감이라도 읽은 걸까.
무표정하게 잘도 말을 이었다.
“수작을 부렸겠죠. 항상 그는 그런 식이니까요.”
“잘 아네.”
“이미 몇 번이나 당해서요.”
“당신도?”
“예. 아마 그에게 가장 많이 당한 자를 찾으면, 저일걸요?”
마치 피해자 모임이라는 투이지 않은가.
무표정으로 잘도 그런 소리라니.
묘한 갭이 느껴진다.
때문인가.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피해자끼리 잘도 모아놨다는 거네.”
“그런 셈이죠.”
이전보다는 덜 딱딱하게 대응하는 나헤나였다.
때문일까.
대화는 조금의 진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 어떤 식으로 힘을 쓰는지는 몰라도…… 허튼수작은 부리지도 못하겠고. 이렇게까지 그가 힘을 쓰면서 둘이 대화를 하라고 만든 이유는 있을 거야. 그렇지?”
“예. 러시아와 한국의 통합을 본격적으로 하자더군요.”
그것은 본격적인 통합.
단순히 도로를 깔고, 물류 흐름을 잇는 걸로는 만족 못 한다는 의미다.
‘원래 계획보다도 더 빠른데?’
언젠가 이어질 일이긴 했다.
그러나 나헤나가 알기로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시연의 어투로 봐서는 지금 당장 통합을 해야 한다는 투이지 않은가.
무언가 이상했다.
“너무 급한 거 아닌가? 이제 막 물류가 조금씩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말이야. 보통 이런 일은 수십 년은 걸리는 일이라고.”
“이해합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하니까요.”
상대도 그 이상함을 모르지 않았다.
“한휘도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예. 어떤 면에서는 저희보다도 철저한 게 그이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럼 이유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네.”
“그렇죠.”
그 이상함을 껴안고도 움직일 이유가 필요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는 그렇게까지 서두르는 것일까.
한 걸음 다가갔다 싶으면, 두세 걸음은 멀어져 있는 그가 속도를 더 더한 상황이다.
‘이젠 고작해야 몇 걸음 정도 차이가 아니야. 단순히 힘이 문제가 아니라…… 그 템포 자체가 문제인데.’
같이 달려가야 할 그가 이렇게 빨라져서야, 일을 같이 도모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유가 중요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가 말이다.
‘이번만은 들어야겠어.’
전이라면 어물쩍 넘어가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계획한 대로 러시아를 이제 막 잡아먹었다.
사실 잡아먹었다 해도, 그 뒤가 더 문제였다.
내실을 다질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전체 전력을 가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건 지슨 같은 신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해서 그녀는 물었다.
“대체 이유가 뭐래?”
“말을 하는 저도 믿기 힘든 이야기긴 합니다만. 있는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건…….”
그리고 뒤이어지는 말에 그녀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