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쉽게 말해 줘야겠지.
“이제까지와는 달라. 그러니 이전에 기억하던 영웅의 전장에 대해선 잊으라고.”
“뭘 잊으라는 겁니까?”
“여기선 죽으면 죽어.”
죽음이 곧 죽음이라니.
말도 안 되게 모순적인 이야기.
우습다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이 안에서는 결코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나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그럴 만도 하다.
죽음이 무서워 도망쳤던 녀석들인데.
죽음을 바로 앞에서 맞닥뜨리게 되니 두렵겠지.
이해한다.
죽음이란 거.
누구나 두려운 것이다.
이미 반은 경험했다 할 수 있는 나조차도 두려운 것이니까.
그러나.
두려운 죽음 앞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었다.
그 할 일은 단순했다.
“그러니 저기 있는 걸 깨야 해.”
“……저 탑 말입니까?”
내가 가리키는 방향.
손끝이 향하는 곳에는 거대한 탑이 있었다.
아키텍쳐가 보란 듯이 세운 탑.
맵 중앙에 있는,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존재가 저 탑이다.
“그래. 저걸 등반해야 해. 그래야 놈이 해 놓은 수작질이 깨지니까.”
“……놈이라고 하면 성좌일 것이고. 성좌의 수작질을 우리가 깰 수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냐. 해야 하는 거지.”
“…….”
우린 저걸 정복해야만 했다.
등반해내서 그 끝을 보아야만, 우리를 이 안에 가둬 둔 아키텍쳐의 수작질을 최종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이곳에 영역을 형성한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결국 저것을 깨지 못하면, 다들 아키텍쳐의 놀음에 잡아 먹힐 수밖에 없게 된다.
점차 아키텍쳐의 속삭임에 물들게 된다.
그렇게 그의 신도가 되고, 결국 그 영혼까지도 성좌 아키텍쳐에게 바치게 된다.
그래.
여기는 본래부터 존재 자체가 덫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자들을 잔뜩,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유희와 권력, 명예를 나누어주던 불완전한 세계였다.
그리하여, 성좌인 아키텍쳐가 흡족할 만한 수가 모였을 때.
덫이 작동한 것뿐이다.
원래의 목적을 위하여.
그 목적이 바로 신도 확보였고.
이를 위해서 그간 아키텍쳐는 꽤 많은 힘을 소모했을 거였다.
어쨌거나.
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웅의 전장을 열기 위해서는 꽤 많은 힘의 소모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 생긴 게 저 탑이다.
일종의 용의 역린과도 같은 거랄까.
아키텍쳐가 제아무리 대단한 성좌라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데 제한이 없을 리 없다.
유저인 헌터들을 세계에 묶어두었다면, 그 반대로 나갈 수 있는 출구도 만들어 줘야 했다.
그게 체계가 말하는 균형이란 거니까.
문제는.
‘그 출구로 나가는 게, 거의 죽어 나갈 정도로 힘들다는 거지.’
밸런스 자체가 쓰레기라는 거다.
괜히 내가 망겜망겜 거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밸런스 잡겠답시고 출구는 있는데, 사용하기가 너무 어렵다.
전생에도 칠 인이 모여서 겨우겨우 깼더랬다.
그나마 이번은 낫긴 하다. 내가 준비한 자들이 있으니까.
문제는…….
“그, 그럼…… 여기에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여기 있으면 어떻게든 구출대가…….”
“구출대는 무슨. 헌터를 구출하려면 대체 누가 와야 하냐?”
“…….”
이 자식들이 도무지 의지가 없단 거다.
내가 데려온 자들을 제외하고.
본래 이 영웅의 전장의 유저였던 자식들은 당장 도망칠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예상하긴 했지.’
적어도 반 정도는 나서 줄 줄 알았는데.
내가 보기만 해도 눈을 슬금슬금 피하고. 어떤 놈은 뒷걸음질까지 치고 있었다.
튀고 싶다 이거지.
우습다.
이런 놈들을 구하자고 몸소 영웅의 전장까지 달려 온 내가 다 웃길 지경이다.
그래도 어쩌랴.
‘……한 놈이라도 살려 놓으면 도움은 돼. 결국 회귀 전에도 그러했으니까.’
쓰레기라도. 재활용을 할 수 있는 쓰레기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온 진짜 목적은 꼭 이들의 구출은 아니었으니까.’
살길을 마련해줬더라도, 이 이상까지 꼭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구출대는 없을 거다. 죽음도 다가올 거고.”
“그럼 어떻게 하자고요!”
“말했듯이 가야지. 저기로.”
“우, 우리는…….”
때로 약한 적군보다도, 정신상태가 이상한 아군이 더 위험한 법이다.
애써 시간을 내고 영역을 구축했음에도 원하는 대로 넘어오는 자는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인걸.
그저 떠나기 전 나지막하게 한마디 조언을 던져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죽기 싫으면 선택들 하라고.”
과연 어떤 선택을 하려나.
알 수 없다.
더 들을 생각도 없었다.
눈치를 보는 유저들을 무시한 채, 나는 처음부터 나를 따라온 자들에게 말할 뿐이었다.
“가자. 여기 더 있다가는 구역질이 날 거 같으니까.”
* * *
탑을 향해 가는 길은 본래 결코 쉽지 않았다.
본래 끝없는 아키텍쳐의 속삭임을 들어야 했다.
말이 회유지, 자신의 성도가 되라는 속삭임 말이다.
성좌의 속삭임.
일개 인간이 성좌의 속삭임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정신력이 약한 녀석들은 금세 잡아 먹혀 버린다.
쉽게 말해 광신도가 되어 버린다.
여기 있는 자들에겐 그 속삭임이 큰 독이다.
안 그래도 정신력이 약해서 영웅의 전장이나 뛰는 놈들이다.
명예와 권력은 갖고 싶어도, 실제 던전까지는 가지 않는 쓰레기들.
그런 녀석들에게 성좌의 속삭임이라.
꽤 강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이외에도 수많은 수단이 있었다.
이제부턴 영웅의 전장에서 배고픔이 느껴진다. 그것도 보통보다도 더 크게!
이 또한 큰 고통이다.
문제는 피할 수도 없다는 거다.
전장에 누가 먹을 거 따위를 가져왔겠는가. 그저 굶을 수밖에 없다.
그 지독한 허기짐은 보통 이상이다.
그것에 더해 온갖 혹독한 환경 변화가 일어나고, 곳곳에서 재해가 일어난다.
정말 온갖 수단으로 괴롭혀댄다.
그 괴롭힘을 버티고, 또 버티다가도 한계에 이른 순간.
성좌는 또다시 속삭여온다.
이대로 자신에게 넘어오기만 하면 이 혹독함은 전부 끝이라고.
그 미친 속삭임에 꽤 많은 자들이 넘어가게 돼 있었다.
나는 영역을 갖춤으로써 그걸 막았을 뿐이다.
‘과연 막은 게 잘한 건가 싶긴 하다만…….’
해서 아키텍쳐는 크게 분노한 것이다.
제 좋은 설득 수단을 막았으니까.
문제는 정작 막은 나에게도 현타가 온다는 거다.
‘쓰레기가 대다수인 걸 알긴 했다만…… 이건 좀 심하단 말이지.’
뒤를 보면, 따라오는 자가 적다.
잘해야 20% 정도가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머지?
나를 따르지 않고, 내가 만든 영역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무려 80%나!
자기 손으로 제 목숨을 구하기보다는, 그저 구해달라는 식으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보기만 해도 한숨이 푹 나오는 행태다.
그런 내 안색을 읽기라도 한 건가.
“한휘. 저들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본래부터 그런 자들이고…… 앞으로도 그럴 자들이에요.”
“알아.”
마리가 와서 작게 위로를 해본다만.
역시나 소용은 없다.
아무래도 이런 행태를 보면 현타가 올 수밖에 없으니까.
회귀 전에 있었던 많은 일로 말미암아.
[공허]를 없애기 위해서 분투를 벌이고는 있다만.
저런 꼬라지를 보면, 내가 과연 이런 쓰레기들을 위해 어디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차라리.
“차라리 죽기 전에 죽일까? 사령술 재료로 쓰면 쓸 만할 놈들이 넘치는데!”
“이사야! 그런 위험한 소리 마요!”
“왜! 그게 전력상으론 더 도움이 되는데?”
“……그런 게 아니잖아요!”
죽여서 전력에 더하자는 이사야의 말이 솔깃할 정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결국 이러한 고행도 내가 선택한 길 중의 하나인 것을.
이사야와 마리의 말다툼 속에서.
걸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멀게만 보이던 탑은 전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현타가 오는 것보다도, 나를 따라오는 자들을 챙기는 게 더 맞는 행동이겠지.
‘감정에 휘둘릴 시기는 진작에 지났으니까 말이야.’
결국 감정놀음을 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내 뒤를 따라오는 자들을 다시금 바라봤다.
좋게 생각하면 20% 정도.
그러니까 수천 명 중 수백 명은 날 따라온 셈이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줘야 했다.
이전에 내가 겪었던 경험들을.
“탑에 들어가게 되면, 적들이 달려들 거다.”
“적들이라니요? 같은 사람이 공격하는 겁니까?”
“아니. 영웅의 전장에 없던…… 유저들의 행동을 베이스로 만들어 낸 몬스터들이 나올 거다. 일종의 크리처들이지.”
“……허.”
통칭 크리처.
여러 형태를 가지고 등장하는 것들의 난도를 모르고 들어가면, 예상보다 강한 힘에 당황하게 된다.
크리처는 영웅의 전장 유저였던 자들의 데이터를 역이용하여 만들어진 거니까.
우리는 크리처를 처음 상대하는데, 크리처는 우리의 패턴을 이미 알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처음 들어갈 때 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적이 패턴을 역이용하니까.
이를 들은 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러나.
뭐든 방법은 있는 법이었다.
“공략 방법은 의외로 쉬워.”
“쉽다니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놈들의 약점만 깨부수면 생각보다 쉽게 죽어. 말 그대로 크리티컬이 들어가 버리거든.”
“약점이라면…….”
놈들에게는 약점이 있다.
그것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노출된 약점들이 있었다.
“어느 부위든 돌출된 수정들이 있을 거야. 그것만 깨면 돼.”
몸에 난 수정. 그걸 쳐 버리면 금방 몸이 산산조각 난다.
그러니 쉽다고 말했는데.
“쉽지?”
“……예?”
어째 당황들 하는 표정이다.
뭐지.
전에도 겨우겨우 공략하던 걸, 이걸 알게 되고 나서는 매우 쉽게 공략했었는데?
마리나, 이사야도 알겠다는 표정이지 않나.
근데 왜…….
다들 멍해진 거냐.
“아니, 보고 쏘면 된다니까?”
“그게 됩니까?”
“왜 안 돼?”
“……허.”
“거기다 힌트를 하나 더 주자면 적의 패턴을 역이용하면 된다.”
“역이용은 또 뭔데요?”
“말했잖아. 유저 패턴에 맞춘 데이터를 역이용해서 공격해온다고. 달리 말하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패턴 변화를 주면 얘들이 쉽게 대응을 못 한다. 이게 안 쉽나?”
“……!?”
……뭐지.
다들 내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무슨 괴물 보듯 바라보는데.
내가 어이없어하자, 이걸 예상했다는 듯 옆에 있던 김시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에 말했잖아요. 다들 못 받아들일 거라니까요.”
“대체 왜?”
“……다들 한휘 헌터처럼 괴물들이 아니라고요. 어쨌건 이제 봤으니, 제 방식대로 처리할게요.”
“하 참…….”
이미 예상했다는 식이다.
다들 적 패턴을 역이용한다거나, 드러난 약점들을 이용 못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 하는 걸까.
그리 안일해서야…….
어쨌건, 상황은 김시연의 말대로 됐다. 다들 내가 알려 준 걸 잘 써먹을 자신들이 없어 보였다.
이를테면 능력 부족.
다행히도 이를 예상한 김시연은 그걸 채우기 위한 걸 미리 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