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혼돈의 기운이 베어먹고 남은 자리.
그곳에 더는 아키텍쳐의 폭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키텍쳐도 깨달은 것이다.
저곳에 자기 기운을 계속해 투사해보아야 남은 건 손해뿐이라는 것을.
결국 모든 것은 손해냐 이득이냐 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결과로 이뤄지는 것.
[성좌 : 아키텍쳐가 당신에게 큰 분노를 표출한다!]
놈은 어마어마한 분노를 보인다만.
“꼭 겁먹은 개새끼들이 짖더라. 화나면 오든가. 와와. 드루와. 드루오라고.”
그뿐이었다.
계속해 분노를 표출해봐야 자기 손해를 깨달았으니 어찌하겠는가.
결국 그 분노조차도 혼돈의 기운에 살라 먹힐 뿐인데!
여기까지 보여 준 행동도 아키텍쳐라는 성좌치고는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것이었다.
체계라는 이름에 걸맞은 저 성좌는 본래라면, 적당히 힘을 쓰고 말았어야 했다.
손해인지 아닌지 정도는 ‘체계’를 통해 금방 알아낼 수 있었을 거니까.
그럼에도 무차별 폭격을 날린 것은.
‘놈이 체계라는 이름하에서 아키텍쳐라는 성좌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성좌면서도 감정에 휘둘린다는 반증이겠지.’
저 대단한 힘을 가진 듯 보이는 성좌조차도, 결국은 감정에 휘둘리는 일개 개인일 수 있다는 증거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다.
“결국 성좌 새끼들도 힘만 센 애새끼란 거지.”
힘만 세고 대단할 뿐.
인간을 떠나 수많은 종족으로부터 추앙받는 게 성좌다만.
결국 그것들도 힘만 셀 뿐, 제 감정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머저리들이다.
-……신랄한 발언이로구나. 반박할 수 없는 게 더 큰 문제고.
“이른바 팩트 폭행이란 거겠지.”
-……그런가.
그런 성좌의 모습을 본 마왕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는 듯했다.
이해는 가는 바다.
그 또한 회귀 전 우리 세계를 잡아먹었더라면.
‘성좌가 됐을지도 모르지.’
내 보기에 하나의 격이 더 상승할 수 있었다.
세계를 잡아먹음으로써, 우리에게 상과 벌을 주는 체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함으로써 성좌가 되면…….
마왕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했다는 말을 진정으로 실행할 수 있었을 거다.
어떻게?
전이라면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생각보다 단순한 방법이었어.’
성좌가 되어 자기 세계를 자신의 성역으로 선포하면 된다.
그뿐이다.
성역은 그 어떤 성좌라도 넘보기 힘들어하는 그만의 영역이니까.
그리하면 그 [공허]조차도 잠시 물러나 줄 것이다.
무려 체계가 인정하는 것이니까.
‘우습다…….’
결국 마왕의 방법이란 것도 그런 것이다.
체계의 힘을 사용해 쌓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성좌가 되는 업적을 인정하는 것도 체계고.
[공허]를 불러들이는 거도 지금 와서 보면 결국 체계다.
물론 반박하는 자들도 있다.
누군가는 [공허]가 내려왔음에, 뒤이어 체계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 반대일 가능성도 충분하지.’
체계가 내려오기에 [공허]가 내려올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좌들이 체계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툭하면 제멋대로 굴고.
제 감정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신들.
성좌라 지칭하지만, 자리를 놓치면 그대로 외신이 되어버리는 머저리들.
그런 것들이 체계의 말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자신들이 가진 성좌라는 힘이 체계로부터 비롯됐기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라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이 세계를 겪고 파헤치며 얻은 작은 결론이다.
이 결론.
증거는 없다.
보기에 따라 빈틈은 넘쳐나고. 반박당하기 좋을 만큼 허술하다.
그럼에도 어쩐지 내 감은 이게 맞다 말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 기회에 나만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증명할 수 있었다.
그 증명. 단순했다.
[당신은 성좌 : 아키텍쳐의 성역 일부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
[부서진 성역의 일부가 당신의 영역으로 치환됐다.]
[대단한 업적!]
[당신은 성역을 잡아먹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당신의 업적이 체계에 기록되어 빛난다.]
혼돈의 기운이 아키텍쳐의 성역을 잡아먹자.
이에 신이 난 듯 체계는 호응했다.
‘기록되어 빛이 난다니…… 재밌네.’
회귀 전에도 보지 못했던 말을 던져내더니.
드드드드득-!
드득-!
마치 업적에 대한 서비스라도 던져주듯이, 체계가 직접 힘을 써주었다.
혼돈의 기운으로 다 말미암아 부서졌던 성역.
오롯이 아키텍쳐의 영역이어야만 하는 그곳에.
“……호오.”
새로운 땅이 떠올랐다.
겉으로 봐선 다른 땅과 다를 게 없으나, 나는 그 땅에 서서 강력한 부유감을 느꼈다.
전지전능!
이 안에 있는 모든 게 파악되는 듯하고,
또한 모든 걸 부술 수 있을 힘이 느껴졌다.
일개 개인이 가지기엔 너무도 큰 힘.
흡사.
‘성좌들은 이런 기운들을 성역에서 갖는 건가?’
나만의 성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느낌이다.
성좌들이 지닌 힘의 일부를 엿보았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되었다.
이 모든 기운, 고양감, 능력.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체계가 허락해서 만들어지게 된 거지…….’
내 스스로 얻은 게 아니었다.
나는 계기를 만들고, 작은 틈을 찢어발기었을 뿐이다.
결국 이러한 영역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은 체계의 힘이었다.
보아라.
[성좌 : 아키텍쳐가 당신에게 분노하며 일 보 후퇴했다.]
[주의!]
[성좌 : 아키텍쳐가 자신의 성역에 큰 힘을 보태었다.]
체계가 내 영역을 선포하듯, 인정하고 나서야 아키텍쳐가 물러나는 것을.
답지 않게 행동할 정도로 잔뜩 흥분했던 주제에.
저리 쉽게 물러나는 게 말이 되는가.
내가 두려워서 물러나는 게 아니다.
그만큼 체계가 가진 힘이 두려워서 물러나는 게 분명하다.
결국…… 지금 보이는 모습들은 하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겠어. 그리고 어쩌면…….’
전생을 겪고, 회귀를 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의 총체.
그를 통하여 얻은 결론.
그 최악의 결론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좋지 못하네.’
그 결론이 맞는다면…… 결국 답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공허]를 물리치자고 여태 고생을 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공허]는 물리칠 수 없을 존재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장 다른 답은 없지 않은가.
되지도 않는 작은 발악이라도,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인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쉼으로, 나중에 다다를 결론에 대한 미련은 툭 던져버린다.
대신.
“후아.”
크게 숨을 내쉼과 동시에,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거처럼 큰 미소를 지어 올렸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다들 이리 와! 여기는 안전하니까!”
성좌 아키텍쳐의 성역.
그곳에 나만의 영역을 구축했음을 선언했다.
우선.
그래 우선은.
이 작은 선언이라도 중요한 때였으니까.
* * *
다른 자들에게 모든 이해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 증명되지 않은 나만의 가설을 떠벌리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은 먼 미래에 관해서 논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앞.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게 중요했다.
꽤 많은 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길드원들이나 내 요청으로 영웅의 전장에 있던 자들을 제외하고도.
나와 다른 곳에서 영웅의 전장을 즐기고 있던 꽤 많은 자들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설명을 구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는 설명을.
‘이제 와 숨길 필요가 있을까.’
정확한 때는 몰랐어도, 성좌 아키텍쳐가 지금쯤 움직이는 건 이미 예측하던 바였다.
내가 할 일은 그에 대한 설명뿐.
“지한휘. 당신이 말한 게 이런 거죠? 아키텍쳐가 모두를 잡아먹는다고 했던 거.”
“맞아. 보다시피…… 꽤 많은 자들이 갇혔잖아. 그치? 로그아웃도 안 되고 말이야.”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되더군요.”
“그러겠지.”
다행인가.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자들은 내 예언 아닌 예언을 듣고도 이곳에 들어 온 자들.
설사 이곳에 죽더라도, 그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디를 가든, 언제든 위험을 들이닥칠 수 있고.
그 위험 가운데서 죽음은 필연적인 거라는 걸 이해했을 뿐이다.
그게 헌터니까. 그뿐이다.
이들은 이 안에 떨어졌음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되려 불안해하는 건 다른 쪽이었다.
“으으으…… 뭐야 왜 안 되는 거야?”
“너지? 네가 뭔가를 한 거지?”
“대체 뭐야!”
이능력을 타고난 주제에.
그럼에도 그 능력을 던전이나 사냥터에 쓰기보다는 영웅의 전장에 쓰기를 원한 자들.
죽음이 두려워 피했던 이곳의 유저들.
그들은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두려움에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힘을 가진 주제에, 이 일에 대한 해결을 갈망하기보다는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힘을 가진 주제에 저런 꼬락서니라니.
우습긴 하다.
“하기는 뭘 해. 다 들었잖아? 영웅의 전장이 본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야.”
“그럼 이건 뭔데!? 여기는 뭐야? 네가 뭔가를 한 거잖아.”
“했지. 너희 같은 머저리들을 어떻게든 살리겠답시고 쉘터를 만들어 낸 거다.”
그 우스움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현재 내가 필요로 한 것은, 상황설명 뒤에 이어질 도움이다.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이 아니라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 편이 되어 줄 자들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하등 쓸모도 없는 자들에게까지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었다.
그 모습에 놈은 반항이라도 하는 듯 소리쳐 보지만.
“머저리!? 네가 뭔…….”
“닥쳐.”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고 때린 한 방에 놈은 제압되어 버린다.
“……컥.”
“목숨도 걸지 않고, 유명세나 찾아다니는 머저리 주제에 어디서 입을 놀려.”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바라보면서도. 감히 대항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우습게도 딱 이 정도다.
그래도 이런 놈이 있어 도움되는 게 하나 있었다.
상황 정리는 편해졌다는 거.
“…….”
“…….”
“이제 좀 조용하네. 딱 좋아.”
폭력행사를 본 주변이 고요해졌다.
본의든 타의든 간에 적어도 들을 준비는 되었다.
현재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게 최선의 장면이었다.
이런 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또 부족한 전력이 되어달라고 말하는 게 퍽이나 우습긴 하다만.
어쩌겠는가.
되면 되는대로,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이 있다면 가져다 써야 하는 것을.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여는 건 결국 나였다.
“자자, 잘 들어보라고. 들어봐야 너희들이 살길을 찾을 수 있으니까.”
모두의 입이 다물어진 가운데서.
나는 나지막이 이들에게 상황 파악을 시켜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뒤지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