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나는 현실도 영웅의 전장도 아닌 곳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수십여 번도 더 넘게 온 곳.
나의 정신세계였다.
‘이 빌어먹을 부유감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
정확히는 나의 영력이 녹아들어 있는 영적 세계.
이전엔 겨우겨우 들어섰던 그곳을, 근원을 꺼내 들 수 있을 때부터는 쉽게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들어서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엉망진창이로구만.”
-네 정신세계를 투영하는 것이 네 영적 세계이니라.
“시끄러. 난 원래 단조로운 녀석이라고. 이렇게 정신없지 않아.”
오기만 하면 정말로 정신이 멍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혼을 흡수해 버린 나 아닌가.
몬스터면 몬스터, 인간이면 인간.
천족에 마족들도 호로록 먹어버린데다가, 악마도 꽤 많았다.
그런 놈들이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날뛰고 있는 게 내 영적 세계였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나는 꼭 온전한 상태의 영혼만을 흡수하지 않지 않았는가.
조각조각 난 영력이라도 내게 도움이 된다면 흡수하고 봤다.
그 때문일까.
-크히히히!
-헤헷. 이건 똥이다. 똥이라고!
-똥이 아니라 카레라니까?
도무지 제정신이 아닌 영혼들이 너무 많았다.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리던 미국도 안 저럴 건데.
수많은 인종, 종족, 조각조각 난 미치광이들까지!
“……미친 새끼들.”
-후후. 여길 욕하는 건 널 욕하는 것이니라.
“시끄러.”
혼란이라는 말의 예시라 할 만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 혼돈에 나는 말 그대로 혼돈의 기운을 끼얹기까지 했다.
-끄아아악!
-이게 뭐야!
-킥…….
덕분인지 안 그래도 혼란스럽던 이곳은 대격변이 이뤄지고 있었다.
바깥에서 내 영력으로 파고들어 온 혼돈의 기운.
그것은 마치 [공허]가 내려앉는 듯 내 영적 기운들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검게, 더 검게.
안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혼돈에 기운에 의하여 이 세계 전체는 금방 검어질 듯 보였다.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긴 한데…….’
내 개인적으로는 색색깔의 막장스러운 본래의 세계보다.
차라리 어둡기만한 조용하고 차분한 세계가 더 낫다 싶기는 했다.
그리 만들기만 한다면.
‘그 녀석……. 유보라도 더는 버티지 않고, 나오지 않으려나?’
여태껏 불러낼 수 없는 그 녀석.
유보라가 제 발로 부활을 하고 나올 거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
-켁.
뭐든 잡아먹을 듯한 저 혼돈의 기운.
[공허]와도 비슷해 보이는 저 기운은, 내 영력을 물들이기 위해 가져온 게 아니었다.
여기서는 아주 약간만 섞여야 할 뿐.
전체가 다 섞여서는 내가 쓰기에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만.”
내 영력을 잠식하려 하는 혼돈의 기운을 멈춰 세우려 했다.
적당히만 섞여야 했으니까.
그러나.
그조차도 쉽지는 않았다.
[당신은 혼돈의 기운을 조종하고자 시도했다.]
[시도가 실패했다.]
[시도가 실패했다.]
[시도가…….]
혼돈의 기운을 만들고 공격용으로 휘두르는 건 쉬웠으나.
아주 미세한 컨트롤까지 해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놀라진 않았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영력도 다루기가 극히 힘든 기운일진데.
영력에 사마력, 마력, 성력과 오러까지 섞은 게 혼돈의 기운이다.
다루는 게 쉬울 리가.
애당초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이것을 다루고자 시도하는 거 자체가 도박이다.
다만, 도박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내 영역이나 다름없는 이 영적 세계에 이것을 가져왔을 뿐이다.
“후…… 다시.”
때문에 나는 계속해 혼돈의 기운을 다루고자 시도했다.
[당신은 혼돈의 기운을 조종하고자 시도했다.]
[시도가 실패했다.]
그것이 계속된 실패를 말할지라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 내 영혼의 세계가 검게 물들어감에도, 시도는 계속됐다.
얼마간 반복됐을까.
[당신은 혼돈의 기운을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대단한 업적!]
[당신의 업적이 체계에 기록된다.]
“됐다!”
-……허.
끝끝내 혼돈의 기운을 다루는 데 성공했다.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다.
“큭…….”
내 손에 들어 온 혼돈의 기운은 바로 반항했다.
당장에라도 내 조종을 빠져나갈 것처럼 거칠게 굴어댔다.
그그그긍-
주변이 흔들리고, 내 심상 세계나 다름없는 영적 세계도 같이 흔들린다.
놈은 내 조종을 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 날뛸 뿐이었다.
‘……조금. 아주 조금만.’
그러나 버텨내야 했다.
딱 한 가지 작업을 완료해야 했다.
그 작업.
이 영적 세계에 들어 온 혼돈의 기운을 정제 후 바깥으로 뿜어내는 거였다.
그리해야만 성좌 아키텍쳐의 영역에 내 영역을 한 발 걸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온몸에 극심한 탈력감이 느껴지는 와중에서도 집중을 계속해 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금이다!’
이제는 날뛰는 혼돈의 기운을 놓아줘야 할 때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을 놓듯이.
나는 통제하에 두었던 혼돈에 기운을 툭하고 풀어놓았다.
그 반동 때문일까.
후욱-!
거대한 혼돈의 기운이, 내 영적 세계를 넘어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침범이었다.
침범의 대상은 내 영적 세계가 아닌 바로 아키텍쳐가 새롭게 보인 영웅의 전장이었다!
* * *
느껴지는 부유감.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영웅의 전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개의 세계를 오고 가면서 달라진 건 하나였다.
그어어어-!
혼돈의 기운이 흉포하게 날뛴다는 거.
그 하나만이 전과 달라져 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하나였으나, 그 파급효과는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나로부터 퍼져나간 그 혼돈의 기운은 계속해 주변에 휘몰아쳤다.
흡사 태풍처럼.
혹은 갈피를 잃은 광풍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혼돈의 기운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만이 느껴지는 기묘한 리듬감이 있었다.
‘내가 심은 거니까.’
그 리듬이 아키텍쳐의 온전한 성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전장을 두드려댔다.
쿵. 쿠우웅. 쿵.
부수고. 또 부수고. 다져대고. 이끌고.
혼돈의 기운이되, 동시에 내 조종을 받아 혼돈의 기운이 아니게 된 그것은 계속해 성역을 두드렸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뭐야……?”
“땅이 변하잖아?”
결국 변화를 만들어 냈다.
내가 디디고 선 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땅이 만들어졌다.
이미 있던 땅은, 더 검게 물들어갔다. 마치 혼돈의 기운처럼.
그것은 잠식이었다.
아키텍쳐가 쌓아 올린 성역에 내가 만들어 낸 혼돈의 잠식.
그 잠식이 얼마간 이어졌을까.
고작해야 100여 미터나 내 영역이 만들어졌을 때.
[영웅의 전장의 주인이 당신의 행위에 분노하고 있다.]
성좌 아키텍쳐는 분노했고.
그 분노를 곧바로 표출하였다.
하늘에서 만들어진 기운.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그것이 영역을 잠식해가는 혼돈의 기운을 때렸다.
콰아아앙-!
쾅!
마치 폭격처럼 이어지는 힘의 세례.
성역의 주인인 성좌의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성역에서만큼은 성좌도 힘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는 터.
그러기에 그 공격은 맹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어어어-!
그러나 그에 반항하는 혼돈의 기운도 보통은 넘어선 무언가였다.
안 그래도 내 조종으로 말미암아 화가 났던지.
놈은 자신을 막아서려 하는 아키텍쳐의 폭격에 몸서리치듯 성을 냈다.
그리곤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버렸다.
“……먹어 버리는데? 미친.”
“와아아!”
분명 공격으로 날아들었을 폭격들.
그 폭격의 기운들을 혼돈의 기운은 살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폭격이 끝나고 흩어지는 파편을.
이후엔 파편을 통해 기운을 분석해냈는지, 폭격 그 자체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우걱우걱 기운을 씹어대는 말도 안 되는 모습이라니!
‘……마치 [공허]같군.’
공허가 내려앉으며 보였던 모습이 떠오르기에, 나로선 지독히도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 또한 마찬가지인지, 절로 몸을 떨어댔다.
신이 난 건 오롯이 이사야뿐이었다.
모든 전말을 다 알고 있지만, 직접 [공허]를 겪은 바는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하고, 황홀해하고 있었다.
“사마력도 이리 흡수되면 좋을 텐데. 아니지! 비슷한 속성이 있긴 하잖아?”
감탄 뒤엔 그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혼돈의 기운이 보이는 것들을 따라 하기까지 했다.
스스슷-
그리고 비슷하게나마 성과를 냈다.
그녀의 마력이 점차 차오르는 게 보였다.
‘과연 괴물…….’
눈으로 보고. 영감을 받고. 그를 실시간으로 익히다니.
대단하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한 일을 쉽게 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나의 감상을 두고.
마왕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 온다.
-누가 괴물이란 것이냐. 이런 걸 불러일으킨 네가 괴물 아니더냐.
‘헛소리야. 나는 회귀를 했으니 가능한 거고. 쟤는 천연이잖아?’
-……허. 되었다.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니.
‘시끄러, 이 녀석아.’
근래 들어 툭하면 나를 치켜세우기는 한다만.
그런다고 콩고물을 줄 것도 없었다.
그래도 저런 헛소리가 도움이 되긴 했다.
괴물 같은 이사야를 보면서 느꼈던 긴장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마왕과의 짧은 대화로 한결 씻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 작은 씻어냄 정도면, 내 정신을 환기하는 데는 충분했다.
감상도 여기까지지 않겠는가.
“이제 도와줘야지.”
-도와?
“어.”
내가 부른 혼돈의 기운이 잔뜩 날뛰어 주고 있다.
예상보다 더 선방하곤 있지만,
아무래도 아키텍쳐의 힘에 의해 약간씩 밀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혼돈의 기운을 통해, 나는 내 영역을 구축해 내야만 했다.
그게 처음 생각한 목표니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이쪽도 최선을 다해야 할 터.
‘이게 좋겠군.’
[당신은 가호 : 존재 포식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오랜만에 내 근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존재 포식을 꺼내 들었다.
그를 이용하여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아키텍쳐의 힘을 흡수해 나갔다.
이 흡수는 딱히 대상을 선택할 것도 없었다.
이 세계의 구성 자체가 아키텍쳐의 것.
이 세계 그 자체에 손을 가져다 대고 흡수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하여 상당한 힘을 모으게 되었을 때.
‘혼돈의 기운은 다른 기운들을 잡아먹어 나오는 거니…… 그 종류가 많을수록 좋겠지.’
혼돈의 기운을 강화시켜 줄 만한 수단을 찾아낸다.
오러, 마력, 사마력, 영기, 신성력.
온갖 기운을 잡아먹은 혼돈의 기운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단 한 가지 기운만큼은 아직 주지 않았었다.
그건.
[당신은 가호 : 존재 포식으로 얻은 기운을 가호 : 그림자의 것으로 변형했다.]
바로 그림자의 힘.
영력과 미칠 듯한 궁합을 보였던 그것을, 나는 혼돈의 기운에게 먹이로 준 바가 없었다.
나는 뒤늦게 그걸 눈치챘다.
‘어리석었지.’
어리석은 행위는 금방 수정하면 될 문제지 않겠는가.
“먹어라.”
내 온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자라난다.
빛이 없이도 만들어지는 그림자.
짙은 어둠을 내포한 그것을, 나는 망설임 없이 혼돈의 기운에게 쏘아 보냈다.
그어어어-!
그에 화답하듯 혼돈의 기운!
그리고 그 기운은, 기어이!
콰드드드득-!
아키텍쳐를 물어뜯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