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이창복이를 데려오지.”
“예?”
이창복. 여기서 그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북부 대장벽을 쌓았던 그다.
설치에 있어, 그를 따라잡을 자는 없었다.
그는 무려 건축에 관련된 성좌의 성자 중 하나니까.
대장벽을 쌓아 낸 이후.
많은 성력을 잃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그는 은퇴한 게 아니었습니까?”
“흘. 반쯤 은퇴한 것은 맞네. 성자로서 성도들을 모으겠다고 하고 있기도 하고.”
“그가 부른다고 올까요?”
“올 거네.”
그런 그를 부르겠다고 한다.
가능한 일일까.
화승 회장의 얼굴엔 분명한 확신이 있기는 한데.
의외로 나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도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않았던 자니까.
유보라가 찾아가 설득을 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그였다.
그런 그를 어떻게 움직이게 한다는 건가?
“이 대통합이 욕심나는 건 이해합니다. 그렇다 해도 말도 안 되는 걸로 저를 현혹하려 하면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허허. 이 늙은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지금은…… 솔직히 그렇게 보이는군요.”
“흘흘…… 이해가 안 갈 만은 하지. 안 갈 만은 해.”
허허로운 듯 웃어 보이는 회장.
그도 내 입장을 이해하는 듯했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 건가.
그러다 고민이 끝났는지, 그는 품에 있던 걸 꺼내 보였다.
“그건……?”
“증표일세. 이창복, 그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증표.”
“……허, 성좌의 증표를 그것도, 이걸 왜 회장님이 갖고 계신 겁니까.”
그건 성좌의 증표.
성좌를 모시는 성자와 성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증표였다.
회귀 전에도 딱 두 번 보았던 게 증표다.
그것도 이창복의 것은 없었다.
‘이모텝 녀석이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그 녀석 걸 봤었지. 망할 배신자 놈.’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런 걸 대체 왜 회장이 갖고 있단 말인가.
어쨌건 그의 손에 있는 건 진짜 증표다.
가짜라고 하기엔 증표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거기까지는 늙은이의 비밀로 해두지. 알려 주지 않는 게 이 증표를 받으면서 한 약속이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아쉽게도 그는 어찌 증표를 갖게 됐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순순히 내가 물러나자, 그는 아쉽단 표정을 지었다.
“흘흘. 쉽게도 물러나는군.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도 잘 알기도 하고. 과연…… 자네는 참 나도 모르는 비밀을 많이도 품고 있단 말이지. 대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게 됐는지 알려 줄 생각은 없나?”
“이것도 제 영업 비밀이라고 해두죠.”
“재밌군.”
보아하니, 자신이 증표를 갖게 된 걸 무기 삼아 내 비밀을 알아보려 한 거 같다.
하기야.
그가 보기에 나는 불가사의한 존재일 거다.
그 힘이 빠르게 강력해지는 것도 있거니와.
마치 미래를 보기라도 한 거처럼, 꽤 많은 일을 해내고 있으니까.
단순히 강한 헌터는 많더라도, 나만큼 여러 곳에 영향력을 끼치는 헌터는 거의 없을 터.
그러니 그가 나의 비밀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늙은이라니까.’
-제대로 된 능력도 없이, 여기까지 오른 자다. 그러니 한 일가를 이룬 자는, 하위 존재라 할지라도 존중을 해줘야 하는 법인 거지.
‘알아. 괴물들이나 일가를 이루는 법이니까.’
-맞다. 그런 거다.
늙었지만, 대단한 여우다.
늙은 괴물.
즉, 노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은 자가 이 회장이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한이수를 살려냄으로써, 이 사람은 완벽히 내 사람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노괴라 하더라도, 전에도 지금에서도 그의 신용에 대해선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으니.
나는 장난스레 말을 던져 줄 수 있었다.
“알려 주지 않겠습니다. 다만, 능력이 되면 알아보세요. 제가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지, 온갖 일을 해낼 수 있는 지를요.”
그건 장난스러운 도발이었다.
능력이 되면 내가 어떻게 이리 움직일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도발.
‘못 알아내겠지.’
-다른 동료들이 말하지 않는 한 어찌 알아내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래. 그러니까 대놓고 도발하는 거지.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라고. 크큭.’
승부욕 강한 이 노괴에게는, 그러한 내 도발이 꽤 크게 느껴졌을까.
그도 히죽- 웃어 보이더니 내게 장난스레 큰 한 방을 던졌다.
“흘흘. 자네가 강해지는 거보다…… 미래를 조금씩 잡아먹고 있는 자네의 수완이 알고 싶을 뿐이네.”
“……알고 계셨습니까?”
그가 던진 한 방.
그것은 내가 미래를 점차 잡아먹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정보였다.
‘이사야를 이용해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로선 결코 이 늙은이는 모를 거라 여겼다.
그만큼 미래의 자본을 은밀하게 잠식해 가고 있다고 여겼으니까.
사실 잠식이라기보다는, 곁다리를 조금씩 갉아 먹는 거기는 했다.
내 것으로 아주, 조금씩 조금씩.
티도 잘 나지 않도록 미래를 내 것으로 삼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모아간다면, 후에는 미래에 꽤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거란 계산에서였다.
미래를 잡아먹는 방법이 꼭 그들 내부에서만 있는 건 아니니까.
외부에서도 천천히 잡아먹을 수 있게 수작질을 부리고 있었던 나다.
근데 그걸 알 줄이야?
과연 무서운 늙은이다.
“미래의 주식이 오르는 게 너무 가팔라. 그 계열사도 본사도 말이야. 시중에 있는 게 도무지 안 풀리더군.”
“……흠. 요즘 미래에 호재가 많았으니까요. 그러니 다들 안 내놓는 거라 여길 만하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러겠지. 보통은 말이야…….”
“그런데 회장님은 어찌 아신 겁니까?”
“모르나? 내가 무엇으로 일어났는지?”
“회장님은 주식 장난 따위가 아니라 물류 흐름을…… 아, 그거군요.”
“흘흘.”
흐름에 있어서 그는 천재나 다름없다.
몬스터 사태 당시 물류의 흐름을 장악해서 여기까지 온 화승 회장이다.
그런 그에게는 주식의 움직임도 하나의 흐름으로 보인 듯했다.
그 흐름을 읽어냄으로써 내 움직임을 알아챈 것이고!
과연.
대단하다.
이러면 조금만 도발하기로 마음먹었던 내가 되려 한 방을 먹은 건데.
‘지고는 못 사는데 말이야.’
쯧, 근데 오늘은 내가 한 방 먹고 끝날 거 같다는 말이지.
“어떤가. 이 늙은이의 능력이?”
“대단하네요. 대단해.”
아군인 그가 능력이 출중한 건 좋은 일이긴 하다만.
어쩐지.
이대로 이 자리를 파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방 먹은 채로 끝나는 거.
그건 내 성미에 전혀 맞지 않은 일이니까.
“어쨌건, 다른 건 몰라도 이 공사는 내게 맡겨주게나. 이창복이의 마지막 걸작을 내가 함께 만들어 볼 테니까.”
“믿죠. 믿습니다.”
“흘흘. 그래, 앞으로 미래를 잡아먹는 데 키가 필요하면 내게도 말하도록 하고. 도움은 충분히 줄 터이니.”
“도움이라…… 명심하죠.”
“그럼 잘 자게나. 밤이 늦었으니, 조심히 들어가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나는 그의 인사를 받아들이면서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 늙은이에게 한 방을 먹이고 싶었으니까.
아군은 아군이나, 너무 기세 좋은 아군은 때로 내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할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미래를 견제하겠답시고 화승에 힘을 실어줬는데.
‘사람이란 변하기 마련이고…… 그가 나쁜 쪽으로 변해서 이후 내 계획에 방해가 되면 그건 또 안 좋단 말이지.’
그런 그가 생각 이상으로 커져서, 내 계획을 방해라도 하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나 일어날 일이긴 하다만.
어쩐지 꺼림칙하단 말이지.
뭐…… 솔직히 그가 배신하는 걸 걱정하는 거보다는 한 방 먹은 게 열받아서긴 하다.
어쨌건!
지고는 못 사니까.
드륵-
그러기에 나는 그와의 회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방 먹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말씀을 못 드렸는데 말이죠.”
“뭔가?”
현재로선 그만 아는 진실. 아니 그만이 알아야 하는 진실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건.
사실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는 힘을 필요로 했다. 정확히는 힘을 가진 자들을 키워가고 있었다.
남몰래.
그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은밀히 한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나는 그걸 콕 집었다.
“필요하면 제가 가진 그 던전으로 보내세요.”
“누굴 말인가? 이수 녀석이 가면 될 일이지 않은…….”
“에이, 한이수 말고도 다른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수련이 필요한 자들요.”
아직 수련도 제대로 하지 못한 녀석들을 보내라고.
그 뜻을 알아들은 그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현재로서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해야 하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거니까.
장난기를 버리고 다시 심각해진 한회장.
“……자네, 설마. 그걸 아나?”
“후후,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대답 대신에 고개를 한 번 푹 숙여주고는, 작은 회의실을 나섰고.
드륵-
단 한 보도 멈추지 않은 채, 회의실 바깥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더는 그에게 대답해 주지 않겠단 신호였다.
그걸 회장도 알아들은 건가.
“휴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강화된 내 청각으로, 그의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신호였다.
‘예쓰!’
-……좋으냐? 기어이 늙은이를 이겨 먹은 게?
‘당연한 소리를!’
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신호.
나는 그 신호에 누구보다 기뻐하며, 회의실이 있는 건물 자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발표 뒤의 파티. 그리고 이어졌던 통합을 위한 회의까지.
꽤 늦은 밤까지 이어졌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그 뒤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창복이라고 하네.”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로군요.”
꼬장꼬장한 이창복이가 러시아로 들어왔다.
한회장이 준비한 최상급 비행기에 비즈니스석까지 타고 왔을 건데.
자세가 꼿꼿하다.
“한 회장이 아니었으면 보지도 않았겠지.”
“암요, 그러시겠죠. 힘을 지닌 자면, 이곳저곳 힘을 써주어야 할 텐데. 그것도 안 하시는 분이 움직이는 게 쉬웠겠습니까.”
“……자네는 입이 매섭군.”
“직업이 영혼술사가 아니었으면, 설검이 됐을 겁니다. 아시나요? 설검.”
설검. 혀를 검으로 삼는단 소리다.
사실 혀가 꽤 대단한 무기잖은가.
촌철살인이란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니고 말이다.
말로 사람 죽이는 거.
그거 일도 아니니까.
내가 고개라도 숙일 줄 알았나. 이창복이가 혀를 탁 찬다.
“……쯧.”
“거, 증표 때문에 움직여야 하는 거면, 싸게싸게 공사 들어갑시다. 쓸데없이 내 앞에서 꼿꼿하게 굴지 말고요. 아시겠습니까?”
“……내 명심하지.”
근데 어쩌나.
나는 상대가 꼿꼿하면 할수록 나는 더 꼿꼿하게 구는데 말이야.
“좋아요. 그럼 움직이시죠.”
“지금 바로 말인가?”
“네, 지금 바로. 그럼 시답잖게 환영 파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허…….”
“뭐해요? 안 가고.”
나는 그에게 바로 움직이라 말하였고.
그는 불만스러운 눈을 하고선, 곧바로 통합을 위한 한 발자국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가 전대 랭커면 어쩔 거야. 까라면 까야지.’
그리고 그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