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처음 빛은 모두를 휘감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한 빛은 이내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지한휘.
다른 하나는 나헤나였다.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나헤나였다.
그녀가 눈을 뜨는 순간.
지슨은 자신이 무언가와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그 연결의 정체.
나헤나였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는, 존재감이 더욱 짙어졌다.
그럼에도 지슨은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그 반대를 느꼈다.
친밀감이었다.
“나헤나…… 나왔군요.”
“오랜만이에요, 지슨.”
둘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
그 시작은 슬라임에게 잡아 먹힌 이후라 말했지만, 이전부터 인연이 닿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로 연결됐군요.”
“예. 덕분에요.”
“그래. 내 덕분이지.”
연결이 됐다는 그 사실.
지한휘 덕에 그들의 연결은 더욱 짙어졌다.
연결의 중심은 나헤나고.
그 주변의 러시아 헌터들과 사람들이 모두 하나처럼 굳게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연결을 통해 느껴지는 일체감은 어마어마했다.
나헤나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졌으니까.
단지 느낌뿐만이 아니다.
‘충만하다…….’
‘뭐지?’
‘힘이 더 강해진 듯한데.’
실제 나헤나가 있음으로써, 이들의 힘은 강력해졌다.
각성자의 이능력은 강화되고.
육체적인 능력은 마리가 버프를 걸어 준 듯 강력했다.
흡사.
바실락 여왕 곁에 있는 그의 부하들처럼.
“이 정도라면…….”
“후우. 당장이라도 깨부술 수 있겠는데.”
짙은 고양감에 다들 자신감이 차올랐다.
보호받기 위해서 뒤로 물러나 있던 피난민들, 그들 중 일부는 전장에 참여하겠다고 나설 정도다.
무리도 아니었다.
당장 뭐라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강한 호승심이 느껴졌으니까.
그뿐이랴.
꽈드득-
몸에서 느껴지는 이 강력한 힘이라면. 당장 실전에 나가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전 경험이야 일천하기 그지없다만.
때론 경험 따위가 없어도, 압도적인 힘을 이용하여 적을 격살하는 일도 있으니까.
“가자.”
“흐흐흐. 좋네, 좋아.”
전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앞에 서기 시작했고.
“오…… 더 앞으로!”
“밀어붙이자.”
그 옆에서 보조를 맞춰줬던, 지한휘의 길드원들도 잔뜩 흥이 나 전진을 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키이!
달려들고 있는 바실락 거미들.
그들을 처리하기 위한 전진이었다.
흥분에 휩싸인 전진이었다.
그게 누구라도 막지 못할 거 같은 전진이었다.
그러나.
그 전진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대로 두고 볼 거야?”
* * *
지한휘. 나헤나의 옆에 서 있던 그가 그녀를 채근했으니까.
“힘을 얻은 건 좋지만, 그에 취해서 망가지면 언제든 거둬버릴 거라고.”
“……칫, 하여간에 잠시도 틈을 안 준다니까요. 알겠어요. 멈추죠.”
그 채근의 의미를 다른 이는 몰라도 나헤나만큼은 잘 알았다.
이 모든 사태.
갑작스레 달려드는 바실락 거미를 막으라는 의미였으니까.
그걸 잘 알기에.
나헤나는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
* * *
단순히 걸어감에도, 그녀로부터 흘러나오는 묘한 향기가 있었다.
스스스스-
그 향기.
전투 중이라는 걸 순간, 잊어버릴 정도로 몽롱한 향이었다.
“아…….”
“뭐지?”
짙은 고양감으로 잔뜩 흥분해 있던 자들이 순간적으로 멍해질 정도의 향이다.
급작스레 전장 속에서 피어나온 그 향.
그 향의 중심에 선 나헤나는 작게 손짓했다.
후우욱-
그녀의 손짓을 따라 향이 넓게 퍼져나갔다.
잡을 수도 없는 향을 누가 막아 낼까.
인간도, 바실락 거미도 이를 막아 낼 순 없었다.
순식간에 전장 전체가, 그녀가 피워 올린 향으로 가득 찼다.
이게 신호였다.
곧바로 이변이 발생하였다.
-키이이……!
-킥!?
흉포한 바실락 거미들이 몸을 멈추었고.
곧바로 부르르 떨었다.
뭔가에 놀란 듯, 여덟 개의 다리를 떨어댔다.
그 움직임 안에 내포된 감정은 다양했다.
하나는 놀람.
다른 하나는.
“……거미들이 두려워하고 있어?”
“왜?”
두려움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몬스터도 두려움을 느끼면 온몸을 벌벌 떨어대고는 하니까.
다만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 보기 힘들 뿐이었다.
겁많은 고블린 따위나 그런 모습을 보일 뿐이지.
바실락 거미와 같은 곤충류 몬스터는 그러한 모습을 극히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거 봐! 더는 안 덤빈다고!”
“뭐냐. 대체…… 디퍼브 기술이라도 얻은 거야!?”
적인 인간들이 있음에도, 놈들은 놀라 움츠러들기 바빴다.
덜덜덜-
떨림은 더욱 커져 갔다.
향을 내뿜는 나헤나.
그녀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갔으니까.
그녀가 열 걸음 걸어갔을까.
또 다른 이변은 금방 벌어졌다.
쿵. 쿠우웅.
가장 앞 열에 있던 바실락 거미 성체.
거대한 덩치로 흡사 행동대장처럼 굴던 사나운 녀석이 무릎을 꿇었다.
“뭐야!?”
마치 복종하는 자세처럼.
그에 사람들은 놀랐지만,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니까.
쿠우웅. 쿵. 쿠웅.
마치 파도가 번져나가듯이.
바실락 거미들 전부가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리곤 머리를 조아렸다.
마치 여왕을 배알하듯이.
* * *
갑작스레 벌어진 이변이었다.
몬스터가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이는 회귀를 겪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는 직업이 없는 건 아니다.
테이머 마스터라 불리는 존재.
흉포한 몬스터를 길들여서 부리는 자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잘해야 두세 마리.
최강자라 불리는 자도 수십 마리를 부리는 게 다였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은 뭔가.
수십, 수백 마리.
어쩌면 저 뒤에 있는 수천 마리가 무릎을 꿇고 복종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투는 멈춘 지 오래였고.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만 들려왔던 쉘터는 꽤 고요해졌으니까.
그 고요를 깬 건, 만족스레 웃고 있는 지한휘의 옆에 있는 자들이었다.
마리와 이사야.
그녀들이 물었다.
“대체 안에 들어가서 뭘 한 거예요, 한휘?”
“와, 이런 능력이 있으면 날 줘야 했던 거 아냐? 뭐야? 대체 뭔데? 응?”
말하는 방식은 둘 다 달랐다.
하지만 둘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궁금증이 가득 차올라 있다는 거.
지한휘는 그런 둘의 모습을 예상했다는 듯,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그러곤 바로 답을 해주었다.
“안에서 그녀가 능력을 얻었어.”
“능력이요?”
“그래, 하나는 통합. 다른 하나는 통제.”
그 답에 마리는 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 모두 본래 있던 거 아니었어요? 매혹의 능력에 모두 포함되니까요.”
“그 둘이 강화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와우.”
“강화라면…… 아. 그 안에 나헤나와 겹쳐져 있던 게 권능들이었군요. 희끄무레한 것들이요.”
“맞아. 그게 정답이야.”
“……흐음.”
지한휘의 설명.
군더더기 없는 설명이지만, 마리와 이사야는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헤나의 심상 세계.
그곳에 들어간 지한휘가 그녀에게 힘을 보태어 준 거다.
통합과 통제.
그 두 가지 권능을 나헤나가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방법? 알 수 없다.
영력이라도 부렸겠지, 하고 어렴풋이 예상할 뿐이다.
문제는 그 결과다.
“나헤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네요.”
“그런 셈이지.”
러시아의 여왕이 되어가고 있는 나헤나.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는 거다.
안 그래도 매혹의 힘으로 러시아 남부를 휘어잡은 그녀다.
그런 그녀가 더 강력해졌다.
러시아 전부를 잡아먹고도 남겠지.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거미처럼, 거미줄을 뿜어내서 러시아 전체를 꽁꽁 싸매고도 남을 여자였다.
때문에 염려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건, 나헤나가 다른 마음이라도 품으면 어찌해야 하는가에 대한 염려였다.
강력해진 그녀가 등을 돌리게 되면 제아무리 지한휘라도 힘들어질 테니까.
때문에 무언가라도 받은 건가 싶었는데.
“대가는요?”
“대가라…… 딱히 받은 건 없는데?”
볼을 긁적이며 말하는 지한휘. 그는 진심으로 받은 게 없는 듯했다.
저 표정은 진심이다.
그걸 보고 마리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한휘 치고 위험한 일을 했네요. 이번에도 변덕이 발동한 거죠?”
“뭐, 그렇지. 나는 대가로 받은 건 없지만, 나헤나는 대가를 내긴 했어.”
“이미 알고 있어요.”
“그건 나도 알겠는데.”
뭐, 지한휘는 대가로 받은 게 없긴 했다만.
나헤나는 대가를 지불하긴 했다.
“변형되어 버렸어.”
“변형이야!”
그녀는 이제 인간이자,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녀의 존재에서 여러 개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중심이 되는 존재는 나헤나.
그 곁으로 바실락의 기운과 슬라임의 기운들이 느껴졌다.
마리와 이사야는 그것을 느낀 거다.
“……나헤나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거네요.”
“저거, 조금만 까딱 잘못해도 주도권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응? 그러면 괴물이 되는 거 아냐?”
“위험해요.”
겉으로 봐서 나헤나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여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은 끝없는 전쟁터였다.
세 개의 기운이 같이 상주하고 있다는 거.
달리 이야기하면 이사야의 말처럼 안에서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단 이야기였다.
그 주도권이 나헤나가 아닌 다른 기운에게 넘어가는 순간.
그때의 나헤나는 그녀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될지 모를 일이다.
힘든 싸움이다.
언제고 무너질 만한 싸움이기도 했다.
저 주도권 싸움은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지는 법이었으니까.
마리나 이사야는 그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지한휘는 전혀 아니었다.
그만은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들 붙들어 매. 저 안의 기운들 내가 이어 붙여 줬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둘이 예상하는 일은 없을 거란 소리야. 내가 직접 세 권능을 이어 붙여 줬거든. 때문에 나헤나가 무너지는 일은 결코 없다고.”
그의 근원을 이용해 이어 붙인 것이다.
이제 와 그 결속이 깨어질 리가 있겠는가.
그의 근원이 망가지지 않는 한, 나헤나의 내부에서 이뤄진 결속은 단단하다.
그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와우.”
“…….”
마리와 이사야는 놀라는 것 외에 다른 건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지한휘가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다는 걸 확실히 깨달아버렸으니까.
나헤나.
그녀는 지한휘를 통해 완성되었고.
그 완성됨으로 인해서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아주 강력한 패가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더욱 불안한 듯, 마리가 다시금 말을 했지만.
“……그러면 더더욱 대가를 받았어야죠.”
말이 ‘대가’였지, 족쇄라도 채워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었다.
평소 마리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만큼 나헤나가 보인 능력이 뛰어나단 반증이기도 했다.
해서 그녀로선 걱정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걱정으로 인해 그녀의 긴장감이 커져 갈 무렵.
그 걱정을 깨는 건 지한휘가 아니라, 되려 그 주인공인 나헤나였다.
“대가는 무슨 대가예요…… 지한휘가 뭘 받아 갔는지 말 안 했어요?”
“에?”
“……정말, 심술궂다니까요. 그는 그냥 이어 붙여 주기만 한 게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