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직항으로도 16시간 20분.
전엔 12시간이면 가는 경우도 있었다는데, 변한 항로에선 이게 최선이고 최고다.
덕분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다들 감탄부터 터트렸다.
“대단하네요, 화승이란 곳도.”
“어. 예상보다 더 대단하긴 해.”
“와…… 이렇게 여기에 올 줄 몰랐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멀리 나온 건 나도 처음이야!”
이러한 반응들은 당연했다.
현재 우리가 도착한 곳은 프랑스 파리.
무려 유럽이다.
이제 와 유럽에 대한 환상 따위는 없었다.
‘사람 사는 게 그게 그거지. 거기다 막장도 봤는데, 환상이 있을 리가.’
사실, 환상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다.
종말이 다가오는데도 인종차별 하는 새끼도 봤고.
막판엔 나라 몇 개가 자기들끼리 봉쇄하다가 큰일 터지는 거도 몇 번 봤다.
이런 곳에 와서 감탄은 무슨.
“한휘. 아무리 계산해도 화승의 힘은 가질수록 이득이야.”
“백 퍼센트 동의해.”
여기에 한 번에 데려다준 화승의 힘에 감탄할 뿐이다.
아직 공허가 본격적으로 내려앉은 시기는 아니긴 하다만.
현 상황에서 유럽과 한국을 이리 오가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화승은 우리를 이곳으로 금방 데려다줬다.
그러다 보니 나나 이사야나 의욕이 샘솟는다.
어떻게든 작전에 성공할 의욕이!
그 의욕이 다소 과했는지.
옆에서 우리를 수행해 주던 직원이 헛기침을 삼킨다.
그로선 우리의 말이 다소 당황스럽겠지.
“큼. 그래도 저도 화승의 직원입니다. 그런 제 앞에서 화승의 힘을 말씀하시는 건 좀…….”
“괜히 뿌듯하죠?”
“그런 말이…….”
“에이, 저라면 막 자부심이 생길 거 같은데요?”
“……됐습니다. 안내부터 해드리죠.”
하지만 나는 딱히 뭘 숨길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한 모든 말들이 수행원을 통해 한 회장에게 들어가긴 하겠다마는.
어쩌랴.
내가 알기로 한회장 성격 자체가 대놓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박장대소할 거다.
재밌는 녀석이 나타났다고.
그 전에 작전에 성공해야겠지만 말이지.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유럽으로 오기까지 하루.
다시 돌아가기까지 또 하루.
손자가 죽은 게 반나절.
벌써 이틀 반이 지났다.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9일하고 12시간 정도.
우리는 이 시간 내에 던전을 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여깁니다. 루브르 박물관.”
“드디어 도착인가.”
온갖 약탈품을 모아놓고 대놓고 자랑하는 그곳.
가끔가다 지들 기분 좋으면, 선심 쓰듯이 물건을 돌려주기도 하는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 * *
루브르가 닫히는 시간은 6시.
유럽 곳곳에서 던전이 열리고, 터져나가곤 하는 상황에서도 프랑스는 기어코 루브르를 유지했다.
마치 자신들의 자존심이라도 되는 거처럼.
덕분인지 관광객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꽤 많았고.
꽤 많은 자들이 우리를 바라봤다.
“사람 많네요.”
“그만 좀 쳐다봤으면 좋겠는데.”
“자식들, 예의가 없어요.”
시선의 의미야 뻔하다.
예전이야 모르겠다만, 현재는 세계 여행 자체가 쉽지 않았다.
비행깃값이 미치도록 비싸거든.
그러다 보니 관광객 수는 줄었을 거고.
특히 아시아 쪽에서 오는 자는 더 적었을 거다.
해서 신기하게 본다는 거야 알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쳐다보는 건 영, 예의가 아니지 않나.
“쯧. 안 그래도 급한데 왜 은근슬쩍 둘러싸는 거야.”
“해치울까, 한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가 처리할게. 영력 분리. 영력 부풀리기.”
[당신은 영력을 분리하였다.]
[당신은 영혼 마법 : 영력 부풀리기를 사용하였다.]
파아앙-!
공격은 아니었다.
단지 영력을 부풀려 저들의 시야를 교란하였을 뿐이니까.
“꺄아아악!”
“뭐, 뭐야!”
덕분인지, 우리 옆을 따라다니던 녀석들이 놀라긴 했다만.
알게 뭐람.
애당초 옆을 따라다니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였다.
‘머저리들.’
나는 일행을 이끌고, 놀란 자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빠른 걸음으로 얼마나 안으로 들어섰을까.
가만 내 뒤를 따르던 마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예요, 한휘!”
목적지였다.
* * *
어떤 거대한 그림 앞.
프랑스어가 잔뜩 적혀 있는 표지판 앞에 마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 뒤 그녀가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자 이변이 발생했다.
스스스스-
한 여인이 그려져 있던 그림의 형태가 점차 바뀌었다.
얼굴이 가려져 있는 어떤 여신의 형상이 비친다.
‘……웃고 있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느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미소와 함께 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애로운 미소였다.
“와…… 뭐예요?”
“어떤 분이시지?”
“대단해!”
그 미소가 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팀원들 모두 그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림이 뒤바뀌고 그 안에서 성좌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안 놀라는 게 이상하다.
반대로 나는 잔뜩 골이 났다.
저 자식, 마리 뒤에 있는 나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데 어쩐지 나를 바라볼 때는, 미소가 아니라 인상을 찌푸려댔다.
거기에 분노까지 느껴진다.
자애 다음에 분노라니.
무슨 병 걸린 거도 아니고.
하여간 저 자식은 나만 보면 저런다.
‘대체 왜 나만 갖고 그러냐, 저 자식은.’
덕분에 저게 누군지는 알 거 같았다.
마리의 이름 모를 성좌겠지.
마리 덕후 자식.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만.
이 상황에서도 나를 째려볼 줄이야.
하여간 대단한 녀석이다.
저런 게 성좌라니.
하여간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는 녀석들이다.
내가 이래서 성좌를 혐오한다.
하기는 더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있나.
안 그래도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게 커졌다.
소란이 커져 갔다.
마리가 기도하자마자 그림이 바뀌고.
그 그림에서 신성력이 퍼져 나오고 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재촉했다.
“시답잖은 게, 째려보는 거 그만하고, 어서 열어 줘. 이러다 우리 잡혀가면 막힌다?”
-…….
내 재촉에도 놈은 한 3초간 나를 째려봤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곳곳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비상벨들이 들려왔다.
이거, 이거.
루브르의 경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단 거겠지.
그거도 보통 경비가 아니라 각성한 자들이 움직일 거였다.
온갖 보물들을 욱여넣은 이 루브르에선 심심찮게 신기들이 발견되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서 급하게 움직여야 했다.
“어서!”
-……후.
한숨인가?
그 소리와 함께, 여신은 그림 안에서 바닥을 퉁 쳤다.
그러자 그림 안의 바닥이 갈라져 갔다.
갈라짐은 그림 너머로까지 뻗어 나왔다.
그 갈라짐은 마리의 무릎 바로 앞에서 전진을 멈췄고.
그러더니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갈라진 허공.
우우웅-
던전 게이트가 열렸다.
[당신은 숨겨진 시험의 던전을 발견했다.]
이곳이 우리가 도달했어야 할 첫 목적지.
여기서부터는 이판사판이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랄 시간 없어. 다들 이거부터 받아.”
나는 그림자 주머니에 담겨 있던 장비를 팀원들에게 던졌다.
팀원들은 놀라면서도 금방 장비들을 챙겨 들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말했다.
“작전대로야. 알지? 다들 살아서 보자고. 아니 최대한 높이 올라서 보자. 어서 들어가!”
“예!”
이진성, 이진아가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뒤늦게 김민하가 내게 눈짓하며 들어갔고.
이사야는.
“후…… 이게 괜찮을까 모르겠어.”
“넌 살아만 와라.”
“응! 이따 봐!”
그녀답지 않게 잔뜩 긴장하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
“이따 봐요.”
“응.”
[당신은 동료의 기도 : 강화를 받았다.]
[이름 모를 성좌가 당신에게 분노한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축복을 걸어 주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쯤.
삐이익- 삐익-!
“거기 서!”
“너희들 뭐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루브르의 경비들.
내 예상대로, 그들 모두는 장비를 전부 장착하고 있었고.
느껴지는 기운들은 심상치 않았다.
저들의 목적은 훤히 보였다.
막자고 온 거다.
이곳 프랑스 안에서 발생한 던전.
그 던전은 이용하기에 따라 큰 이득이 될 수도 있으니, 지키고 싶겠지.
그런데 어쩌랴.
이번은 정반대의 상황인 것을.
“안 돼!”
“들어가는 것을 금지…… 아, 이런.”
“이번엔 네들이 한번 털려봐라.”
나는 저들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당신은 숨겨진 시험의 던전에 들어섰다.]
환한 빛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 * *
처음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암흑이었다.
그러곤 허공에 흰 글씨들이 떠올랐다.
[당신은 숨겨진 시험의 던전 : 천국의 계단에 들어왔다.]
[당신이 지닌 자격을 던전의 주인이 살핀다.]
[당신은 지닌 자격을 확인하였다.]
“자격이라…….”
이곳은 숨겨진 시험의 던전.
각 등급마다 들어갈 수 있는 특별 던전과 달리 특별한 조건을 달성하면 들어설 수 있다.
참고로 숨겨진 걸 찾는 거부터가 시험의 시작이다.
우린 그걸 마리 덕에 쉽게 깰 수 있었다.
‘위치를 알아낸 걸 이리 바로 써먹을 줄은 나도 몰랐다만.’
그녀가 특별 던전을 깨고 말한 위치.
그 위치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대략 십 년 뒤인가.
이곳과 다른 곳에서 이 천국의 계단이란 던전이 열린다.
그때 마리는 이곳에서 지팡이 하나를 얻는다.
그녀의 최종 병기, 생명의 지팡이.
그녀가 지닌 모든 기도의 성능을 올리고, 페널티는 낮추는 사기급 무구.
그녀가 가진 최상의 신기 중 하나.
회귀 전, 마리는 생명의 지팡이를 가짐으로써 완성되었다.
최후의 칠 인에 걸맞은 강력함과 신성력이 언제나 든든하게 파티를 받쳐 주었다.
때문에 이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지팡이를 특전으로 이용하면…… 이번 부활도 가능해진다.’
부활의 딜레이 자체를 줄일 수 있으니까.
그럼으로써 우린 한 회장으로부터 받은 의뢰를 완료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마리는 꼭 이곳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험을 통과하면 그 대가로 마리는 생명의 지팡이를 받게 돼 있으니까.
걱정은 없었다.
“이미 한번 한 건데, 두 번은 못 할 리 없겠지.”
-그녀도 너 못지 않은 괴물이니, 해낼 것이겠지.
마리는 분명 해낼 거였다.
어쩌면, 생명의 지팡이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구도 가져올지 몰랐다.
해서 그녀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문제는 나다.
그리고 마리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에게도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을 게 분명하다.
천국의 계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끝을 모를 정도로 높은 계단이 눈앞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시험을 진행하라.]
이제부터.
나는 저곳에 올라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