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가만 눈을 감고 있던 지한휘.
그가 눈을 떴을 때, 벨린카니스는 겉과 달리 떨리는 속을 숨기기 위해 애써야 했다.
“또 실패인가.”
-역시 그럴 줄 알았느니라.
어울리지 않게 괜스레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를 취하기까지 했다.
신경 쓰이는 걸 숨기고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서였다.
“쯧. 또 약 올리지는 말고.”
-약 올리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괴물 같으니라고. 이사야랑 이자는 비할 바가 아니야.’
이사야와의 대화로 잠시 집중이 깨졌을 뿐.
마왕의 신경은 언제나 그를 향해 집중돼 있었다. 그러기에 마왕은 그가 영력을 수련할 때 느꼈다.
그건 전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왕은 지한휘가 가진 영력의 흐름이 보였다.
서로의 영혼이 이어져서였다.
그런 그의 몸 안을 움직이는 거대한 영력.
일개 개인이 움직일 만한 게 결코 아닌 거대한 영력.
이 영력을 그대로 움직인다라.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었다.
특별한 비술과 비법도 없이 용케 영력을 움직이고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체계라는 것이 쉽게 쥐어 준 기술과 마법.
그것들의 힘을 이용해 영력을 우격다짐 식으로 움직인다고 폄하했었다.
그런데 아니다.
서로의 영혼이 연결되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스스로 해내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영력을 단순 움직이는 걸 넘어서 헤집고 분류한다?
분명 불가능해야 했다.
상위 존재에 속한다는 마족과 악마들도 힘든 일이었으니까.
영혼을 인도하며 다루기를 천직으로 여기는 천족들도차, 일부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장담했다.
자신이 지닌 마계의 비전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한데, 지한휘는 해내고 있었다.
마왕으로서는 고작해야 방향만 잡아줬을 뿐인데도.
해낸다.
사실 방향을 잡아준 거조차 일종의 악의였다.
방향을 아예 모른다면 모를까. 하는 방법을 알면서도 이를 제대로 못하면 감질맛이 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갈증이 생기게 된다.
마왕은 그에게 갈증을 일으키려 한 거였다.
자신감도 있었다.
쉽게 말해 이론은 가르쳐줬어도, 실전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지 않은가.
자신이 하는 건 글로 검법을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에 자신을 가졌다.
그런데 지한휘는 마치 벨린카니스가 보란 듯이 해내고 있었다.
스스로 단계별로 나아간다.
수련 시간이 긴 것도 아니다.
‘수련한 지 고작해야 3일이야.’
고작 3일이다.
그런데도 내부에 있는 자신의 영력을 점차 찾아가고, 분류까지 해내고 있다.
마력과 영력을 다룬 지가 만 년이 넘어가는 마계. 그곳에서도 이자처럼 해낸 자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곳에 있는 수많은 비전과 마법, 노하우.
그것들을 이용해 내서도 하지 못한 자가 수두룩한데?
그런데, 눈앞에 지한휘를 봐라.
그는 고작 며칠 만에 해내고 있었다.
처음 존재할 때부터 영력을 다룬다는 신이나 성좌 정도가 이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고.
또한 마왕은 곤혹스러웠다.
‘마계의 비전을 미끼로 협력을 끌어내려고 했거늘…… 이래서야 계획이 깨지지 않는가.’
감질나게 유도하려던 그 계획도 전부 끝이었다.
처참했다.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패배해 버렸다.
‘대체 무슨 괴물인 거냐.’
이대로 두고 본다면.
그는 스스로 해내겠지.
‘……어찌한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긴 했다.
마왕, 그 자신을 이겨냈던 자이자. 그 괴물 둘의 영혼이 그의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유보라와 마리.
그의 내부에 남아 있는 둘.
전자는 신의 영역이라는 시간을 간섭하는 자.
후자인 마리는 이름 높은 성녀이기 이전 성좌로서 가능성을 지녔던 자다.
지한휘는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런 둘의 영혼이 지한휘를 돕고 있을 거였다.
그걸 감안한다면 이해 못할 바는 분명 아니긴 하다.
‘한 천재가 수 세기를 뛰어넘는 것도 가능한데…… 셋이서 영혼까지 합일되고 있는 상황이니…….’
분명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후우…….
결국 저 지한휘의 재능이 전혀 없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건 일은 벌어졌다.
마왕으로선 놀라우며, 허탈하고, 동시에 두려운 일이었다.
* * *
그러기에, 마왕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더 처절한 패배만이 예정되어 있겠지. 그건…….’
다시 한번 이어질 마계의 패배를.
패배는 더 최악일 터였다.
전과 달리 지금에 이르러선, 마계엔 마왕 벨린카니스조차 존재치 않으니까.
언제고 마왕에게 반기를 들려고 했던 ‘그들’이 더 날뛰고 있는 지금의 마계.
그 마계가 과연 괴물이 되어가는 그를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회귀가 이런 식으로 성공할 줄 알았더라면, 내 영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더 저항해 볼 것을.’
그가 뛰어난 만큼 이제 와 후회는 더 커진다.
그러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지한휘는 스스로 비전을 만들어 낼 거다.
그 뒤 스스로 존재를 키워, 그 힘을 마계를 막는 데 사용하겠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몰랐다.
마왕이 마계에 가야 할 <공허>를 이곳에 가지고 왔듯, 그 반대로 행할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
하지만 눈앞에 이 녀석은 그런 일을 잘도 해내고 있었으니.
‘어쩌면 우리 마계가 무너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하기는 공허에 잡아먹히는 걸 만 년간 유예한 게 용한 일이었지.’
그를 바라보는 거만으로, 놀라우며 동시에 절망이 드리운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서도, 티를 내서도 안 됐다.
지금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힘과 영혼은 모두 그에게 잡아먹혔을지언정, 자신의 이성은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마왕은 속내를 숨겼다.
더욱 비죽이 웃음을 짓고 다리를 꼬아 태연을 가장해 나갔다.
그저 담담한 척하며 그에게 물을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은 해 봤느냐?
“이 와중에 무슨 생각?”
-내가 도와달라 했던 이야기 말이다.
자신이 요청에 대한 도움에 대한 의중을.
그 말을 들은 지한휘는 여전히 어이없어했다.
“도움이라…… 하. 그거 되게 뻔뻔하지 않냐?”
-안다.
“알면서도 당당하네.”
-나는 그리 요청할 수밖에 없으니까. 전에도 말했지 않느냐.
그걸 모르지 않으나,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왕에게도 사정이 있었으니까.
물론, 적으로서 만난 사이이니 그 사정을 서로가 들어 줄 필요는 없다.
지한휘도 마왕도 회귀 전이라면 분명 그리했을 터였다.
듣기 전에 서로를 죽이자고 무기를 들었겠지.
그러나 서로가 가진 사정이 회귀 전과 달랐다.
그러기에 셈법을 다르게 가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하, 참. 네가 왕으로서 존재하는 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라 이거지?”
-그래. 나는 왕이나 진정한 왕은 아니니라.
마계의 왕이라 칭해지는 마왕.
그러나 동화 속에 나오는 왕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마왕의 명령에 모두가 복종하는 일 따위.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제아무리 강자존의 세계라도 이는 불가능하기만 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인간도 그러하듯, 마계에도 이성을 지닌 존재들이 있었다.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게 될 리 없다.
각자의 이성(理性)이 존재하니까.
서로의 사정과 이권, 여러 이유들로 말미암아 마왕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그에 속한 몇 개의 세력이 억지로 규합돼 있는 게 마계의 현 상태였다.
그걸 묶어내던 마왕 자신이 사라진 지금.
이쪽이나 저쪽이나 위험했다.
마왕이 보기엔 지한휘가 마계를 이겨낸다 해도 공허의 방향을 비트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결국 남는 건 사이 좋은 마계와 지구의 멸망이다.
-뻔뻔하나 우리 모두 위험하다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그건 네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의 위험이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야. 네가 말하는 강경파가 득세한다는 거, 내 보기엔 똑같아. 침략자는 침략자일 뿐이니까.”
그 사정을 모두 이야기해 본다.
그렇다 해도 역시 지한휘는 벨린카니스의 말을 믿지 못하였다.
침략자의 수괴인 마왕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그에겐 그리 믿음직하지 못한 것이긴 하니까.
‘지한휘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침략자라 이건가…….’
이제 와 사이 좋게 협력을 이야기한다 해서 그걸 받아들이는 자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자는 미친 자거나, 정말 성자일 테니까.
그러나 그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 해도 어쩌랴.
이곳에서 둘이 서로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 사이에도, 모두가 공평하게 지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봐라.
-여는 너희를 보존이라도 해주려 했느니라. 뭐, 그래. 두고 보아라. 내 보아하니,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거 같으니.
“일? 무슨 일? 영혼 상태인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어?”
띠이이이이-! 띠이이이-!
일은 저리 울려 퍼지게 돼 있는 것을.
* * *
띠이이이-! 띠이이-!
이전 러시아에 울린 사이렌과 비슷한 소리가 서울을 한껏 머금었다.
소리가 의미하는바.
뻔하였다.
몬스터가 출현한 거다.
“이 시기에 이리 몬스터가 나올 리가 없는데. 이상 기후가 게이트에도 영향을 미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한휘, 네 기억이 틀렸다는 게 더 맞지 않겠어?”
“하 씨.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시기의 서울은 분명 안정적이었단 말이지.”
현실을 부정해 본다.
띠이이이-! 띠이-!
하지만. 저 X랄 맞은 사이렌 울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류도, 오보도 아닌 몬스터 출현이 있는 거다.
꺼지려면 진즉에 꺼졌겠지.
이상하다.
지금은 분명 사이렌이 울릴 시기가 아니었다.
‘저 녀석은 뭘 좀 아는 거 같기는 한데.’
마왕은 그 답을 알 거 같기야 하다만.
물어보면, 협상이나 해대려 하겠지.
확실한 건, 무언가 꼬였다는 거다.
그에 지한휘는 궁시렁거리면서도 나갈 채비를 했다.
귀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가깝게만 느껴졌고. 헌터로서 의무 수행에 소홀히 할 그가 아니었으니까.
-역시는 역시니라.
“시끄러. 내가 다녀오면 너는 해명을 좀 해야 할 거야.”
-해명이라. 그건 내가 일을 벌였을 때야 하는 것이겠지. 이건 여와 상관없는 일이니라.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데다 뻔뻔하기는.”
그렇게 딱 2분.
지한휘는 옆에 선 마왕을 째려보면서도, 준비를 완료하는 데 성공했다.
옆에서 있던 이사야도 마찬가지였다.
제 마법 도끼를 오른손에 치켜들고, 왼편엔 로브를 둘러싼 해골을 소환해 놓았다.
그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왕으로부터 배운 새 사령 마법을 쓸 생각에 흥분이라도 된 거겠지.
그런 그녀에게 지한휘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가자. 뭐가 나오든 다 깨부수러.”
“오케이!”
출격이다.
* * *
급작스레 등장한 비정규 던전의 출현.
흔히 이레귤러 게이트라고도 불리는 곳에 둘이서 도착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한 지한휘.
‘안 좋은데.’
그의 인상은 크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있는 숙소는 강남.
방비를 하겠다고 온갖 것들을 덕지덕지 설치해 놓은 곳이었다.
실제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던전 출현을 완벽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외곽으로 밀려 나가게는 만들어 냈으니까.
그 덕에 당시 자본의 힘이니, 땅값은 던전도 방어하느니 하는 우스갯소리가 심심찮게 날 정도였다.
‘웃픈 현실이지. 그때는 나도 꽤 낄낄댔고.’
때문에 그의 기억 속에 강남은 아직 안전한 곳이어야 했다.
후에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몇 년 뒤여야 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서 그 기억이 실시간으로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저것들…… 쏟아지는데? 대체 뭐야?”
-키에에에!
-키키킥.
한껏 벌려진 붉은 게이트 사이.
있지 말아야 할, 붉은 것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