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이 미친…… 미래가 이건 그냥 돈X랄이 아니잖아?’
자존심을 부리기엔 너무도 많은 돈, 아니 조건이었다.
그녀가 가져다주는 조건. 단 몇 가지만 골라도 보통을 넘어서 있었다.
1. 던전 사냥을 통해 나오는 수익금의 100%는 내 것.
2. 사냥을 위한 파티 구성과 지원은 언제나 최상급.
3. 전투 준비를 위한 숙소 및 기본급, 훈련 지원.
…….
‘이건 퍼 주다 못해 미친 짓 아냐?’
1번만 해도 그랬다. 100% 수익 지급이라니. 이걸 다 건네고 나면 미래 그룹에 남는 게 있기는 할까? 다 퍼 주는데?
그런데도 남길 줄 알았다.
“이거 조건이 너무 좋아서 말이 안 나오는데. 나한테 100퍼센트를 주고도 돈이 남나?”
“저희 그룹은 직접 가공해서 팔면 되니까요. 아, 물론 걱정은 마세요. 원가를 후려치진 않아요. 때론 시세보다 더 준답니다?”
“이야. 내가 원자재를 구해다 주면 그걸 가공해서 수익을 내겠단 거네.”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쉽게 말해 던전에서 내가 사냥한 걸 전부 자신들이 매입. 그걸 가공해 파는 걸로 수익을 남기는 형태다. 다른 곳이라면 힘들겠지만.
‘몬스터 사체 도축 기술부터 시작해서, 가공 기술까지 이미 가지고 있으니 무리도 아닌가.’
무려 미래 그룹이다.
추후 공허가 닥치기 직전까지도 이 세계의 10대 세력을 이룬 곳. 일개 기업이 아니라, 남은 세계를 이끌어가던 그곳이니 이해는 가는 바다.
‘어떻게든 사체만 가져다주면 써먹을 수 있다, 이거지?’
미래 그룹이 가공하지 못할 사체라면 다른 곳 그 어디도 가공치 못할 테니까.
그러기에 나온 조건들이었다.
몇 개의 세부 사항이 있기는 하다만.
“그래도 저희도 완전 퍼주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유니크 이상의 완제 아이템이 나올 경우엔 협의 하에 처리해 주셔야 해요.”
“그 정도야 당연한 거잖아? 어차피 드물게 나오는 거고.”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
그 정도는 쉽게 넘어갈 수 있을 정도. 상식선 안에서 있는 수준이었다.
“집은 어딘데?”
“당연히 강남에 해 줘야죠.”
“시작부터 최고네?”
“애써 구한 헌터를 치안 때문에 잃을 순 없잖아요. 뭐, 사실 치안 때문만은 아니라 능력을 보고 미리 지원하는 것도 있어요. 벌써 헌터 서른은 넘게 처리했잖아요? 거하게 처리하셨던데요?”
“……그걸 벌써 알았나.”
“이런 건 기본이죠. 처리할 때 사용한 능력 자체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영력만 사용한 거 아니죠?”
“글쎄?”
“역시 쉽게는 안 알려 주시네요. 상관없긴 해요. 차차 알아가는 거도 재미있을 테니까.”
보아하니, 김시연은 내가 사채업자에게 다녀온 거까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일을 벌인 지 고작해야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바로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무서울 정도의 정보력이다.
“어쨌건, 훈련소도 당연히 근처예요. 이 외에 다른 편의 시설은 여기 다 정리돼 있답니다?”
“미쳤네.”
여기에 따로 준비가 된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계약하겠다는 걸 장담이라도 한 듯, 한 꾸러미의 짐을 미리 가져왔으니까.
그녀가 가져온 짐에는 숙소 키로 짐작되는 카드 열쇠와 훈련, 편의 시설에 대한 두터운 안내 책자가 함께 있었다.
‘햐. 참. 돈은 쓸 때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건가.’
저 책자의 두터움이 곧 내게 주어지는 편의와 혜택일 터.
놀라웠다.
아무리 공허가 들이닥치기 이전이라지만, 다른 그 어떤 곳도 이 정도 혜택을 준비한 곳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내거는 조건은 하나다.
“이 모든 걸 누리는 대신에 전에 말한 건 꼭 지켜 주셔야 해요.”
“한 달에 두 번 이뤄지는 의무 사냥. 맞나?”
“예. 오로지 그거뿐이에요.”
의무 사냥. 그거도 한 달에 두 번이었다.
사실, 보통의 헌터라면 주 1회 사냥이 평균이었다. 마력 회복이나 정신력이 강하다 싶으면 주 2회 정도다.
“두 번이라지만 우습게 볼 건 아니에요. 사냥 난이도가 꽤 되는 곳을 갈 거거든요.”
“그쯤이야.”
하지만 나로선 유달리 어려운 조건도 아니었다.
망하기 전, 공허가 본격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하고. 사냥은 던전이 아니라 곳곳에서 이뤄졌다.
던전이 죄다 터졌거든!
그때는 도시 간 이동을 할 때도 사냥을 해야 했을 정도다.
쉽게 말해 다 고립돼 있었다.
‘덕분에 물류는 다 망가지고, 아포칼립스가 제대로 시작됐었지.’
덕분에 매일매일이 사냥이었다.
안 하고 싶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그때의 고생을 다 하자면 연설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사냥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양식을 구할 때가 없어, 몬스터를 씹어 삼켜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내게 한달 2회의 사냥이라?
물론, 그냥 사냥은 아니었다. 팀을 짜 주고, 필요 아이템을 전부 준비해 주겠지만 한 명을 데리고 가야 했다.
전에 봤던 냥곰이.
아니, 정확히는 김민하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
전생의 나로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사냥터에 데리고 가야 했다.
저들의 계산은 훤히 보였다.
‘제대로 키우려는 생각인가 보네. 지난번 일도 있으니, 날 붙여 놓으려고 하는 거고.’
냥곰이 김민하가 지닌 특성이 생각보다 괜찮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위험한 사냥터에 제 핏줄을 집어넣는 거겠지.
그렇다 해도 위험한 건 사라지지 않으니까.
괜찮은 유망주인 나를 같이 끼워 넣는 거고.
미래 그룹에 유망주가 없진 않겠지만, 나만 한 녀석은 또 별로 없으니까.
거기다 듣기로 나를 꼭 부를 이유가 하나 있었다.
“아가씨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으셨어요. 꼭 당신이랑 같이하고 싶다고요.”
“후음. 날 뭘 보고? 본 거라곤 그때 딱 한 번뿐인데.”
그때의 사냥이 퍽 인상 깊었던 건가.
냥곰이, 김민하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었다.
“모르죠. 다만 아가씨가 감이 좋다는 건, 가문 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그런가. 감이 좋다고 하는 거 치곤, 지난번 일이 좀 걸리는데? 죽을 뻔했잖아?”
“……흠흠.”
그 이유가 감이 좋아서라는데. 내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였다. 진짜로 감이 좋았다면 지난 생에서도 활약을 했을 거니까.
그래도 뭐 날 찾는 걸 보면 감이 아주 없는 건 또 아니고.
‘지난 생엔 뭔가 꼬인 건가?’
어쨌거나, 짐 덩이 하나를 달고 사냥하는 대신에 이 정도 조건이라. 나쁘지 않다. 아니 아주 좋다.
나로선.
‘거저주는 거야.’
이건 조건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무단 침입까지 한 주제에 느껴지는 그녀의 자신감이 이해가 갈 정도.
하지만.
“어때요?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으세요?”
“좋기는 하네.”
“후후. 그럼 어서 사인해 주세요. 사인하시는 그 순간 곧바로 20억의 계약금도 더 들어갈 테니까요.”
“흐음…….”
그러기 전에 잔뜩 심술을 부려주는 게 나 아닌가.
이미 가지고 있는 50억. 그녀가 준 20억까지 더하면 무려 70억. 단 며칠 사이 얻을 만한 수익이라기엔 너무도 많은 돈.
이 돈을 이용하면 당장 유보라와 마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거다. 그 외에 아직 살아 있을 구하지 못한 동료들까지도.
본래라면 그리하겠지만.
돈X랄을 제대로 해 주겠다는 김시연이 눈앞에 있잖은가?
“몇 가지 조건만 더 추가해 주면 바로 사인해 주지.”
“예? 이 조건에 더요?”
“응! 흐흐. 뭐 별거 아닐 거라고.”
놀라는 김시연. 나는 그녀의 표정에 그제야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속으로 만든 몇 개의 조건을 나불거렸다.
* * *
“자! 완료!”
“……못 당하겠네요. 어쨌건, 계약은 성립이에요.”
지이익- 모든 것을 나불거리고 나서, 결국 계약은 이뤄졌다. 일(一)자로 지익- 그어준 정성스러운 사인과 함께 말이다.
내가 내건 조건은 현재 가장 시급한 일.
바로 유보라와 마리의 탐색이다.
사람 찾는 일은 이런 대기업이 아주 잘하니까.
미래 그룹이면 아주 확실히 찾아주겠지.
이 외에도 앞으로 계획에 필요한 준비들에 대한 대행을 맡겼다. 내게는 꼭 필요하지만, 직접 구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아이템들을 찾도록 했다.
지금으로선 별 쓸모가 없는 걸 찾는 거라 느낀 걸까.
아이템 리스트를 들은 김시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사람이야 사연이 있을 테니 그렇다 쳐도, 대체 왜 이런 것들을 구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나중 가면 놀랄걸?”
“……뭐, 기대해 보죠.”
이해 가는 반응이다.
불퇴권사 김시연. 미래 그룹에서 온갖 정보를 얻는 그녀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물건들일 테니까.
덕분인지 그녀는 작게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고.
어째선지.
심술보가 가득 찬 나로선 그녀의 그런 찡그린 표정이 아주 맘에 들었다.
‘내가 김시연의 감정을 조종했다! 그녀를 조종했다고! 조종했다고!’라는 아주 찌질스러운 감정이었을지도.
뭐, 멸망을 지켜보면서 정신이 빌어먹게 비틀려버린 나로선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누가 왔든 간에 이리 심술을 부렸을 거다.
그게 설사 미래 그룹의 회장이든,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이든 간에 말이다.
‘……나 제대로 미친놈인가?’
어쨌건, 그녀는 웃고 있는 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곤.
“일은 금방 처리 될 거예요.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뭔데? 이제 와 계약 변경이야?”
“아뇨. 저 위에 112층 로열 스위트 비워놨으니까, 그리로 올라가시라고요. 이런 누추한 곳보단, 더 초호화스러운 곳이 좋지 않겠어요?”
“허…….”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유망주님.”
마지막까지 돈X랄로 날 놀라게 해 주곤, 자연스레 퇴장을 해 주셨다.
* * *
한 층!
고작해야 한 층이지만 그 변화는 극적이었다. 응접실은 말할 거 없고, 호텔에 방이 여러 개일 줄이야!
“와오……!”
새로이 개안을 하는 느낌이었다. 사치의 격이 올라갔다랄까.
하지만 이런 넓고 사치스러운 공간 안에서도 내가 할 일은 지극히 소박한 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치이익-!
“이거지.”
룸서비스로 있는 냉장고의 콜라를 따는 것.
꿀꺽- 꿀꺽-
“크흐으!”
한 캔에 2만 원짜리.
비싸다고? 원래 호텔 값이 다 그런 거다.
편의점에선 2+1로도 살 수 있을 콜라. 그걸 2만 원이라 붙여 놓고 마시는 목 넘김이란.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만족스러움으로 끝이 아니었다.
무려 로열 스위트룸은 냉장고 안 모든 음료가 무료였기에.
“좋다아. 내, 오늘 서민적인 마음으로다가 다 조져 준다.”
밤을 새우도록 모든 걸 다 마셔 줄 생각이었다. 아, 덤으로 냉장고 위에 준비된 육포와 주전부리도 전부 포함이다.
치이이익- 킥!
“크흐. 탄산. 이 얼마만의 탄산이냐. 맥주랑 또 다르네.”
콜라. 그다음 사이다.
고작해야 음료들이지만 가져다주는 만족도는 컸다. 뭐 전생까지 갈 것도 없고, 우선 공짜지 않은가.
“이 얼마만의 호사냐.”
매번 느끼고, 또 느껴도 좋을 수밖에 없는 즐김이었다. 알코올이 없어도 취하는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새로 계획도 세워질 정도였다.
“멸망 시작되고 얼마 가지 않아서, 콜라부터가 사라졌었지……. 크흡. 그때 생각하면…… 내 이번 생은 꼭 콜라 공장부터 살린다!”
코카콜러를 챙기고, 덤으로 환터도 살려줄 장대한 계획이셨다.
“거기다 통 크게 펩쉬도…… 아, 이건 좀 아닌가? 그래도 펩쉬는…… 커흠…….”
몇 가지는 어쩔 수 없이 못 살릴, 아니 안 살릴 생각이다만. 그거만으로도 꽤 괜찮은 계획이었다?
……뭐!? 왜? 뭐!? 이 와중에 고르고 앉았냐고?
“일부러가 아니라 나도 손이 부족한 거지. 암, 꼭 펩쉬라고 가리는 건 아닌데…… 후음…….”
미쳐 버린 듯 혼자 탄산음료들을 마셔대고.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혼자 얼마나 중얼거리며 호화로운 시간을 보냈을까.
맛있는 걸 만들어 주는 공장들을 살리겠답시며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던 나는, 어느샌가 저 바깥에 시선이 돌아갔다.
“자정이 다 돼가는데, 전광판 한번 요란하네.”
저 멀리 있음에도 보일 만큼 거대한 전광판 덕분이었다.
어두워진 밤에도 시야를 밝히는 전광판은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갈 만큼 화려했다.
그러한 전광판을 분위기에 취한 듯 몇 분이고 보고 있었을까.
연예인 이야기, 미래 그룹 휴대폰, 자동차…….
“저 때는 신형도 나왔었구먼. 이야, 쟤는 아직도 연예인 하고 있네? 아, 저 때는 톱스타긴 했지. 나중에 왜 약을 빨아 갖고는.”
몇 가지의 것들이 스쳐 가는 것들을 보며 과거의 향수를 느낄 즈음.
[전장에 참여하라!]
전광판을 수놓은 낯익은 문구가 분위기에 취해있던 나를 일깨우고 있었다.
“어? 저거?”
[그간의 모든 기록을 지울, 정식 시즌의 시작!]
“저게 지금 시작이었었나? 와, 그럼? 이거……?”
내가 잊고 있던 것 하나를 새롭게 상기시켜 주고 있었으니까.
“가만?! 저게 이제 막 정식으로 시작하는 거면……? 이거 잘하면…… 제대로 꿀 빨 수 있겠는데?”
전생엔 미처 빨지 못한 꿀이 저기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