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 말을 정말 믿는 거니?"
리아는 모처럼 찾아와서 한다는 게 황제가 자신들을 용서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인 제렌을 노려보면서 되물었다.
찻잔을 든 그녀의 손은 분노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게... 안 믿으면? 뭐가 달라져?"
"..."
제렌이 볼을 긁적이면서 반문하자 리아는 부정하지 못했다.
황제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그걸 믿지 못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리아는 알고 있었다.
사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예전부터 넌 늘 그랬지. 멍청하고, 그래서 사람을 쉽게 믿었어. 그 결과가 이거고."
물론 그렇다고 그걸 선뜻 인정하고 싶진 않았기에 리아가 날이 선 반응을 보였고 제렌은 바로 비아냥거렸다.
"대단해. 그렇게 대단하고 똑똑하고 남한테 잘 속지 않는 언니는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건가 봐?"
"..."
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제렌이나 리아나 결국 황제에게 패배한 건 똑같았으니까.
서로 헐뜯어봐야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너어..."
"아무튼 난 전했으니까 간다."
제렌은 리아의 얼굴이 흉흉해지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 없어 하던 리아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찻잔을 내려다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용서한다고...?"
그 말이 정말 황제에게서 나왔다고?
리아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못한 자신이 참으로 작고 볼품없어 보였으니까.
--
"형님은 그런 사람이지. 그건 보고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이유도 모른 채 잠시 황제의 명령으로 황궁을 떠났다가 돌아온 미친왕은 사하크의 질문에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미친왕은 황제가 가르치고 있다는 이 구르타의 왕자에게 제법 흥미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형님이 거둔 사람이었으니까.
"얼굴을 따라 할 수는 없잖아?"
"네... 그렇죠."
아무래도 황제의 매력에서 가장 큰 요소를 차지하는 게 얼굴이니까.
그건 타고 난 거라서 도저히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근데 소문과 좀 다르네? 뭔가 예의 바르다 너?"
'황제의 동생한테 어떻게 함부로 대하냐.'
미친왕의 말에 사하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전이면 모를까 황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는 지금은 그 동생인 미친왕에게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오싹했다.
직접 작두로 사람을 두 동강 내는 그 모습은 꿈에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으니까.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 대상이 자신이 될 거 같아서 사하크는 두려웠다.
'절대 못 따라 하지.'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은 아무리 보고 배워도 황제의 반도 따라 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도...
'막상 떠나고 싶진 않으니 원.'
그냥 옆에서 좀 더 지켜보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따르고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하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어느새 그 사람에게... 이리도 깊게 매료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
처소에 도착한 황제는 자기 품에 안긴 아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자신을...'
이리도 좋아해 주는 걸까?
황제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황제는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여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본 자신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감정이 기쁜 한편으로는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 감정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질까 두렵고.
자기 본성을 알아버리면 환멸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제야 알았다.
황제는 그녀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겁쟁이었다.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앞에 설 수 있는데... 인간관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가 거리를 두었다.
늘 누군가 배신해도 상처 입지 않도록,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시간이 지나서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그들을 어느 정도 신용하게 되었으면서도... 막상 그런 거리를 유지하지 않은 존재는 황제에게 여전히 단 세 명뿐이었다.
어머니, 모용진, 그리고 오르테가.
그 셋만이 황제가 온전하게 믿을 수 있는, 그렇기에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아네스는...
늘 미안한 존재였다.
황제는 그녀에게 미안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 그녀의 어리광에 어울려주는 걸지도 모르지.
그리고 아네스도 황제의 그런 감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네스는 황제를 원했다.
아네스는 이미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황제를 사랑했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네스가 그런 황제의 시선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황제를 보면서 애원했다.
그녀는 황제가 그런 죄책감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말았으면 했다.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아도 좋으니까... 적어도 죄책감으로 자신을 봐주지 않았으면 했다.
"...그대는 내가 아니었다면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황제는 그런 아네스에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게 황제의 본심.
다른 비들에게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이런 문제투성이의 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녀도 더 행복했을 텐데.
황제가 그런 생각할 때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네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네스가 사랑한 것은 황제였지 다른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제가 사랑한 건 폐하예요.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그 감정에 확신할 수 있나?"
황제의 반문에 아네스는 그대로 황제의 얼굴을 잡고는 그대로 키스했다.
이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수 백 번 물어도 대답은 같아요."
아네스는 답답했다.
왜 전해지지 않는 걸까?
분명 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다시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게 그녀는 정말 서운했다.
"왜..."
그 말에 황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황제가 그녀 앞에서 진심을 털어놓았다.
"대체 왜 나 같은 남자를 사랑한 것이냐."
자신은 사랑 받을 자격 따윈 없는데, 그저 죄인일 뿐인데...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고 있었다.
무거웠다.
그녀의 사랑이 참으로 무겁다.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는데.
자신 같은 죄인이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건가?
알고 있었다.
그럴 자격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자꾸만 욕심이 나지 않느냐."
황제는 점점 욕심이 생기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싫지만 의무적으로 진행하던 관계가 싫지 않아졌다.
어느새 그녀들과의 시간이 즐거워졌다.
어쩌면... 자신이 그녀들을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마저 들고는 했다.
그래서...
황제는 더욱 두려웠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과분해서.
자신 같은 최악의 죄인한테는 너무나도 과분한 것들이라서...
황제는 늘 심장 한구석에 바늘이 박힌 기분이었다.
"욕심을 부리시면 되잖아요."
아네스가 말했다.
"죄인이라면 더욱 욕심을 부려도 되잖아요."
스스로 죄인이라면서... 왜 그렇게 바보처럼 죗값을 치르려고 하는 걸까?
진짜 최악의 죄인이라면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도 될 텐데.
바보같이 착한 사람.
그렇게 많은 피를 손에 묻힌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착한 사람.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폐하를 사랑하는 절 사랑해주세요."
아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죄인이어도 좋았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그런 황제였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스로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그것에 괴로워하는 가녀린 남자였으니까.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아네스는 그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도 필요가 없었다.
그 말에... 황제는 아네스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난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구나.'
그녀도 정말 많은 용기를 내서 한 말일 텐데... 감정을 고백하는 게 그토록 어렵고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혐오하느라 그녀를 제대로 봐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애써 용기를 내서 한 고백을 외면하고 있었다.
바보 같이.
황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야 말로 정말 최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그렇구나."
덜덜 떨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꼭 껴안으면서... 황제는 중얼거렸다.
황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확실히 자신이 틀렸다는 걸.
"사랑해. 아네스."
처음으로.
다른 감정을 담은 사랑해가 아닌.
말 그대로의 감정을 담아 고백하며, 황제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제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녀들에게 더욱 상처가 될 걸 알기에.
스스로를 혐오하더라도 그녀를 사랑할 생각이었다. 설령 그로 인해 배신 당하더라도 그것 역시 스스로의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그녀들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최선이었으니까.
--
"저기... 괜찮으십니까?"
다음 날 아침.
황제는 재상의 걱정이 담긴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금 피곤할 뿐이니 너무 걱정하진 말 거라."
결과적으로 그녀와 어울려주느라 밤을 꼬박 세웠다.
황제는 졸린 눈으로 작게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훨씬 편했으니까.
충분히 괜찮은 상태였다.
"그보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황제는 드디어 길었던 합궁도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오페아 가문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재상이 생각났다는 듯이 황제에게 서찰을 건네주자 황제는 가볍게 봉투를 찢어서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리아가 보냈구나. 흐음... 별일이군."
조만간 보자는 별거 아닌 내용이지만 황제는 의외라고 여겼다.
그녀가 먼저 이렇게 자신에게 연락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조만간 황궁으로 오겠다는 구나."
"그... 괜찮으십니까?"
둘의 사이를 알고 있는 재상이 조심스럽게 묻자 황제가 그 서찰을 가볍게 태워 버리고는 대답했다.
"괜찮다."
황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에 이미 형제들은 용서한 지 오래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래 피해선 안 되겠지.'
그들은 황제가 증오하는 존재이면서... 참으로 잔인했던 황제의 죄를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이번 합궁으로 그들과 제대로 마주 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죄이자, 증오스러운 존재인.
크릴라이족과의 합궁으로... 모든 원한과 증오를 매듭지을 생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