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큭큭."
황제는 웃었다.
그 웃음을 들은 통신 마도구 너머의 남자는 바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 우스운 말투도 접어치우고 서운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리처드였으나 황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된 일이 아니냐.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법이라는 말도 있으니."
아파리는 크릴라이의 새로운 칸.
물론 지금 크릴라이는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라고 해도 오랜 세월 제국을 상대로 버텨 온 그 저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앵글족에서도 손에 꼽는 명문가인 고드프리 가문과 크릴라이의 칸이 결합하는 건 제국 처지에선 견제해야 하는 일이긴 하나... 황제는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둘이 결합하게 된다면 그를 축하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리처드가 머뭇거렸다.
폐하께서 무슨 말하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적극적인 여자는 별로라서.]
"취향 문제였나."
황제는 모용진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어서 같은 대답이 안 나와서 조금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리처드에겐 당연한 말이었다.
절절했던 감정도 세월이 지나면 희석된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증오하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용서하기로 한 이상 좋은 인연이 생긴다면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리처드가 아파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그냥 아파리가 리처드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냉정하게 말해서 리처드에겐 전우로는 괜찮지만 아내로는 괜찮지 않은 여인이었다.
[아무튼 오늘도 올 거 같아서 말입니다. 자리 바꿔 주세요.]
즉 리처드의 요구사항은 그녀가 부담스러우니 국경 방위 사령관에서 수도 방위 사령관으로 직위 변경을 요청하고 있었다.
솔직히 황제의 관점에선 크릴라이가 굴복한 지금은 둘의 위치를 바꿔도 크게 상관이 없긴 하다.
그 정도는 황제가 리처드를 위해서 해 줄 수 있고, 할바르는 국경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자 때문에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다. 거절은 직접 남자답게 하도록."
[거절해도 달라 붙...]
뚝.
더 듣기 싫다는 듯이 연락을 끊어 버린 황제는 최근 올라오지 않는 상소 대신 장계를 살폈다.
워낙 이 제국이란 땅이 거대하다 보니 봐야 하는 장계의 양도 정신이 아득해질 양이었다.
"이걸... 다 보시는 건가요?"
그런 황제를 위해서 커피를 타고 있던 나르타가 질린 표정으로 쌓인 장계를 보았다.
그녀에겐 저 많은 장계를 전부 읽어보는 황제가 검을 들고 있을 때보다 더 괴물로 보였다.
"예전에 비하면 적은 편이 아닌가?"
그러나 황제는 그런 나르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전에 이만한 양의 상소까지 따로 읽고 답장을 적어야 했는데 지금은 장계만 보면 되었으니까.
게다가 장계의 경우는 그냥 살펴보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만 하면 되니 황제에겐 사실 장계를 살피는 것이 훨씬 편했다.
"요즘 제국이 확실히 살만한 거 같구나."
최근 올라오는 장계에선 큰 문제를 살펴보기 힘들었다.
기껏 해 봐야 폭설로 길이 망가졌다던가, 산사태로 길이 막혔다는 정도의 문제만 있을 뿐.
애초에 황제가 최근 재상을 볼일이 조정에서 회의 때 말고는 없다는 것 자체가 제국이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오르페나 공주님이 또 금위대장을 데려간 모양이더라고요."
"아예 그냥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지."
황제는 모용진이 들었다면 소름이 끼쳤을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면서 나르타가 타준 커피를 마셨다.
"점점 실력이 느는구나."
"어머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나르타에겐 이런 작은 시간이 천금같이 귀한 시간이었다.
그녀에겐 늘 바쁜 황제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으니까.
"합궁도 이제 막바지인가요?"
"그렇게 되겠지."
황제는 마리프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케이크를 가볍게 한 입 먹고는 긍정했다.
이제 정말 합궁도 끝이 보이고, 황후도 슬슬 윤곽이 보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아들을 낳는 자가 황후가 된다.
그것은 정말 소수의 황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킨 관례였고, 황제 역시 이를 어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황제는 기본적으로 이 제국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유지하고자 하는 쪽에 더욱 가까웠지.
실제로 황제가 이 제국을 바꾸겠다 마음먹었다면 진작에 합궁부터 없앴을 거고, 무력으로 모든 것을 굴복시켰을 거다.
허나 황제는 그리하지 않고 어지간하면 모든 일을 원칙과 법도대로 처리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 제국이 해온 것을 유지하고 지키겠다는 황제 나름의 의지표명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르타가 시계를 보더니 아쉬운 얼굴로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만 가보거라."
나르타가 떠나자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황제는 커피를 마시면서 다른 손으로는 빠르게 장계를 넘기고 있었다.
"들어오거라."
"네? 드,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황제가 덤덤하게 말하자 화우란은 덜덜 떨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훈련이 할 만한가보구나. 이렇게 찾아오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오다니 심심한 모양이야?
황제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 시선을 받은 화우란은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위축되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러니까... 천하제일인께서 오신다고 들어서..."
화우란의 말에 황제는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하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했다.
"그 남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네... 폐하께서는 그분을 어쩌실 생각인가요?"
황제는 그녀의 질문에 고민했다.
글쎄... 그건 사실 황제도 아직 확실하게 정한 건 아니었다.
"겨뤄보고 평가를 내려 봐야겠지. 걱정 말거라. 죽이진 않을 것이니."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를 부른 것은 자기 호기심이었고, 설령 그 실력이 자기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그 대답에 안도하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가 물었다.
"그 남자는 어떤 존재인가?"
"무림에서는 모두가 존경하는 전설이죠. 무, 물론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제가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이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만요..."
화우란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금위대에서 그야말로 그간 알아오던 상식이 무너지는 걸 경험했다.
초식을 펼치는데 언령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무림의 가르침과 달리 이곳에서는 그것을 하수의 행동으로 지양하고 있었으니까.
언령은 쓸 필요 없다.
오로지 몸과 기,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될 뿐.
언령 사용을 기본으로 하는 무림에 몸을 담고 있던 그녀에겐 생각보다 훨씬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럼 짐과 겨뤄볼 만 하겠느냐?"
"으음..."
화우란은 망설였다.
황제와 노신의 비교라... 그건 그녀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다.
"봐야... 알 거 같은데요."
"그건 짐도 보면 바로 알 수 있단다."
보면 누가 모르겠는가? 황제가 그런 생각을 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답하자 화우란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 그녀에게 유익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기에 황제는 대충 그녀에게 오늘 추가 훈련을 지시하고는 돌려보냈다.
'언제 오려나.'
때가 되면 알아서 온다고는 했다만...
벌써 황제는 몸이 달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찾아가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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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 존재하는 작은 별궁.
낮에도 어두워서 은은한 조명만이 유일한 빛인 이 방에서... 모용진은 주술로 팔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저기... 공주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선을 넘으신 게 아닐까요?"
모용진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모용진에겐 전혀 달갑지 않았다.
"선을 넘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건데요?"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모용진이 황제를 방패로 삼아보려 했으나 정말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인데요?"
"젠장!"
설마 황제가 배후에 있었을 줄이야?
하긴 이 황궁에서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금위대장을 이렇게 가두는 행동이 황제의 허락 없이 허용될 리가 없다.
모용진은 절망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억지로 하진 않으실 거야.'
모용진은 이렇게 자신을 묶어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말만 저렇게 하지 정말 일선을 넘을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착각을 했다.
"역시 공주님이시네요. 제대로 잡아오셨네요?"
"세르... 나?"
그러나 그 생각은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르나를 보자 싹 사라져 버렸다.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지?
게다가 옷차림도 이상했다.
녀석은 그 작은 체구와 대비되는 커다란 가슴이 강조되는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 둘이 싸울 필요는 없잖아요. 둘이 나누면 되는데요."
"예?"
모용진이 오르페나의 느긋한 말에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저희 합의했거든요. 공주님이시니까. 전 두 번째로도 만족할 수 있어요."
"...아니, 내 의견은?"
세르나의 해맑은 대답에 모용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둘이 합의를 하건 말건 당사자의 의견이 없었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터억.
그런 모용진 위에 올라탄 오르페나가 그대로 모용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스륵.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언니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가슴이 천의 압박이 풀리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 무슨!"
모용진이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세르나도 제법 크긴 했지만, 이쪽은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크기였다.
보는 순간 홀릴 거 같아서 모용진은 두려웠다.
"...전 안 되는 건가요?"
그런 모용진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공주님."
모용진은 그제야 오르페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왜 울고 계십니까?"
울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의 첫 번째는 될 수 없다는 걸요."
알고 있다.
그의 마음에 자리한 그녀는 너무나도 크고 거대해.
오르페나는 그의 마음속에 작은 자리 하나를 마련하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물론 싸워 보려고 했다. 그 조그마한 자리라도 얻고 싶어서 노력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아무리 가까워지고 싶어도,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았으니까.
"제가..."
그럴 때마다 이런 감정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오르페나는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먼저 좋아했는데."
뚝.
오르페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먼저 좋아했는데.
아직도 좋아하는데.
이 마음이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는다는 게 서러워서.
그녀는 눈물이 나왔다.
"공주님..."
모용진은 그런 오르페나의 행동에 솔직히 당황하고 있었다.
언제나 느긋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위에서 아이처럼 떼쓰면서 울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장..."
세르나가 실망이라는 눈으로 자신을 보자 모용진은 어느새 주박이 풀린 손으로 일단 공주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네요."
모용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걸까?
어째서... 이런 자신을 원하는 걸까?
모용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도 못했고, 스스로 주군을 상처 입히지 않겠다는 맹세조차 지키지 못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저 실수에 후회하는 것밖에 하지 못 하는 한심한 남자인데.
왜 이런 남자를 좋아해 주는 건지 모용진은 이해되지 않았다.
"제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
궁금했다.
어떤 점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 정도로 좋았는지.
모용진은 그게 정말 궁금해졌다.
"절 구해주셨을 때... 그 상냥함이 좋았어요."
오르페나가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위로해주던 그 말이, 그 목소리가, 그 행동이 그녀의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소한 계기로 생겨난 연심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희석되지 않고 오히려 깊어졌다.
나중엔 그냥 모든 게 좋아졌다.
목소리도, 그의 눈동자도, 얼굴도, 몸도, 풍기는 체취도, 이렇게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도, 이 닿는 감촉조차도,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서.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다 말할 수 없는 걸요.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좋아하니까요."
오르페나의 말에 모용진은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그녀의 감정이 이렇게 깊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안 되는 건가요? 전?"
"그건..."
그녀의 애절한 질문에 잠시 머뭇거린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리 노력해도 공주님은 제 첫 번째는 될 수 없을 겁니다."
그 자리는 이미 그녀가 죽은 순간 그녀의 자리가 되었으니까.
그 자리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모용진은 그녀에게 미안 하지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고백도, 그 어떤 여인도, 모용진에게서 그녀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것은 몇 년이 흘러도, 영겁의 시간이 흘려도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