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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86화 (186/235)

"...막내야. 정신은 있지? 괜찮아?"

세르나는 말을 몰면서도 대답이 없는 막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 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저 막내가 이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기에 세르나는 자신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그래, 죽겠지."

세르나는 덤덤하게 대답했고, 그 말에 진위는 작게 몸을 떨었다.

"휘...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걸 느낀 세르나가 애써 그런 그를 위로 했다.

"단지... 빈손 선배가 선택한 거뿐이야."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막내를 구하러 가기로 결심했고, 그런 빈손의 결정에 모두가 동의했다.

애초에 그렇기에... 세르나도 빈손을 따라온 것이었으니까.

"..."

진위는 침묵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

그러니까... 사실 빈손이 죽는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아야 할 거다.

그걸 분명 각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

아니었다.

진위는 빈손이 죽을 거란 말을 듣자 몸이 떨렸다.

마음은 당장에라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몸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몸은 그런 진위의 의지를 거부했다.

그맇기에... 진위는 눈을 감았다.

그제야 빈손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목숨의 무게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것인지...

진위는 빈손의 존재로 인해 처음으로 목숨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

"하아... 하아..."

빈손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손은 빈손이었다.

그의 검은 이미 부러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으니까.

반면에 저 괴물은 막내와 겨루고도 지치지도 않았는지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카오파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고작 상등병사가 이 정도의 기량이라니. 그 소년 같은 천재성은 없었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건실하게 쌓아온 강함이 있었다.

'젠장... 역시 안 닿나.'

하긴 크릴라이가 자랑하는 핵심 중 한 명이다.

대장군 진만과 카오파이의 일전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다.

그 결투로 진만은 크릴라이에서 제국의 호랑이라 불리게 되었고, 카오파이는 비상하는 매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니까.

당연히... 빈손도 진지하게 그에게 닿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그 눈. 어떤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

카오파이는 빈손이 제법 탐이 났다.

저런 전사가 자기 밑으로 들어 온다면... 이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 나도 출세했네. 다른 곳에서 제의도 받고."

빈손은 그 제안에 웃었다.

그는 평범한 집안에 평범한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나름 좋은 부모를 만났음에도... 그때 빈손은 철이 없어서 건달짓이나 하고 돌아다녔다.

마음에 안 들면 사람을 패고, 이름값한다고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어서 돈을 빼앗았다.

그런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든 것은... 할바르 백부장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철이 없어서 아직까지도 군인에게 시비를 걸고 있던 빈손에게... 그는 갑자기 다가와서는 뺨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소리쳤지.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 무슨 무례냐! 멍청한 자식!]

그 말을 들은 순간  빈손은 얼이 나가버렸다.

멍하니 맞은 뺨을 부여잡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백부장님이 말했다.

[넌...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해 본 적이 있냐? 그 잘난 힘을 남을 위해서 써본 적은? 그러지도 못한 녀석이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하는 기분이었다.

그걸 알고 싶어서 그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알았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은 참으로... 무겁다는 것을.

그걸 각오한 군인을 그런 각오도 없던 자신이 비웃었던 게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첫 살인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잡아주며... 그것이 생명의 무게라며 가르쳐 주던 할바르 백부장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어리고 미숙하던 자신은 어느새 한 부대의 최고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의 손은 빈손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루고, 지켜내온 것들이 말이다.

"...벽을."

카오파이는 빈손의 손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기검을 보고는 감탄했다.

그 손에 자리 잡은 선명한 붉은색 기검은... 그가 드디어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카오파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전사는 적수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으니까.

전심전력으로 부수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그래도... 빈손은 아니네.'

빈손은 그대로 달려들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가기 전에 빈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서걱.

"...아, 조금."

그대로 달려들었던 빈손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래도... 조금은 모자랐다.

푸아악!

빈손의 목이 잘리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카오파이의 팔이 공중을 날면서 피를 뿜어냈다.

"그래, 조금이었어."

잘린 팔에서 나오는 피를 지혈하면서 카오파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조금이었다.

아주 조금만 더 그의 공격이 날카로웠다면 확실히 저기 뒹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으리라.

'나쁘지 않다.'

카오파이는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저런 훌륭한 전사를 죽였다.

비록 희생이 있었다고 해도 경지에 오를 정도의 재능을 가진 전사를 죽인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

그 소년을 결국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손해처럼 느껴지는 걸까?

카오파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해도 손해를 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목숨의 무게라...'

황제는 이젠 정말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가진 그 무게를.

그 무게에 짓눌릴 거 같은 때도 많았다.

빈손 형님의 말이 맞았다.

죽일 땐 알지 못했다.

빈손 형님의 목숨은 참으로 무겁다 여겼으면서... 정작 복수할 땐 목숨을 누구보다 가볍게 여겼다.

그렇게 죽이고 죽이다 보니... 어느새 알아버렸다.

그 하나.

하나가 누군가에겐 더없이 무거웠을 목숨이라는 것을.

그걸 알게 되자 너무나도 무거워졌다.

스스로의 죄가 이리도 무거워졌다.

목숨이 귀하다는 말에 의미를 지금의 황제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네가 날 만나러 올 줄은... 몰랐구나."

황제는 자신을 이자가 만나러 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앞에 남자는 당당했으나, 팔랑거리는 소매가 그가 한 팔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상하는 매라고 불러줄까?"

"...날개 한쪽이 날아간 매가 어찌 비상할 수 있겠습니까."

비상하는 매... 였던 남자가 그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황제의 뜻을 알고자 크릴라이에서 사절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절이 설마 이자일 거라고는 솔직히 황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짐이 그대를 어찌할 줄 알고 이리 당당하게 온 건지."

황제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예전이었다면 분명 눈앞에 있는 이자를 바로 찢어 죽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 지금도 마음 같아선 이자를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참았다.

지금은 황제니까.

사실 황제가 정말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왔다면 죽을 놈들이 참으로 많았으리라.

"그래서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폐하께서... 정말 저희와 공존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공존이라..."

황제는 웃었다.

공존. 공존이라.

"반대로 묻지. 그대들은 짐에게 복종할 생각이 있느냐?"

복종.

크릴라이는 공존을 물었고, 황제는 복종할 것인지 물었다.

그 질문에 카오파이가 솔직하게 물었다.

"저희를 복종시킬 생각은 있으십니까?"

"..."

아니, 사실 없었다.

지금도 딱히 없다.

황제는 그 사실을 알기에 침묵했고, 그 침묵은 카오파이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게 대답이시라면..."

"솔직히. 짐의 개인적인 생각은 그대들이 싫다."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게 정말 어처구니없는 감정이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이 저들을 증오할 요소보다... 사실 저들이 황제를 증오할 요소가 더 많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감정이 같을 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황제가 할 대답은 하나였다.

"허나 짐의 자리가 그런 자리가 아니지 않느냐. 받아들일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 하겠다.

황제의 말에 카오파이가 물었다.

"그걸 저희가 어찌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당장 짐이 그대를 찢어 죽이지 않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황제의 대답에 카오파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요."

황제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면 자신은 애초에 이렇게 멀쩡하게 황제 앞에 설수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것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그렇기에 카오파이는 바로 반응했다.

"저희 크릴라이는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대로 크릴라이의 예법대로 머리를 땅에 박으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그를 보면서 황제가 말했다.

"그대들이 충성하는 한. 제국은 그대들을 보호할 것을 약속하마."

'묘한 일이군.'

카오파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예전에는 그가 황제가 되면 크릴라이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가 보호해주겠다는 말이 이토록 든든하게 들릴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공적인 일은 다 끝났으니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다."

황제의 말에 카오파이는 일어나서는 대답했다.

"무엇입니까?"

"그대는... 짐이 미운가?"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카오파이의 대답에 황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말 많은 크릴라이의 사람들이 황제의 손에 죽었다.

어쩌면 그들이 죽인 것보다 더한 수였다.

당연히...

"허나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걸 누가 원망하고, 증오하겠습니까? 전 전사였습니다."

팔을 잃고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카오파이는 전사였다.

목숨의 무게를 알기에... 그 목숨을 가지고 무게를 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가..."

"오히려 폐하께서는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제 손에 폐하의 전우가 많이 죽은 걸로 압니다."

"..."

전우라는 말로 설명이 될까?

황제에게 그들은 가족이었다.

특히... 빈손은 형이 없던 황제에겐 그야말로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대가 밉지 않아. 더욱 싫고, 증오스러운 존재가 있으니까."

황제 역시 이젠 더 이상 카오파이를 미워하지 않았다.

호불호를 따지자면 개인적으로는 분명 불호겠지만 그렇다고 증오하진 않았다.

이제 황제가 증오하는 것은...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피를 묻힌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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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곳에 있는 사찰.

그곳에서 스님은 가볍게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런 스님 앞에서 한 여인이 느긋하게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먹처럼 검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종이를 보고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비녀로 가볍게 정리했다.

그런 그녀의 붓이 움직일 때마다 순식간에 선이 그어지더니 곧 승천하는 용이 종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용문사에 딱 어울리는 그림이군요."

그 그림을 받아보면서 목탁을 두드리던 스님이 작게 감탄했다.

마치 언제라도 종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현실적인 그림이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스윽.

화구를 챙기면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안경을 슬쩍 고쳐 썼다.

그녀는 사실 오늘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벌써 가십니까? 좀 더 머무르시지 않고요."

스님이 눈에 띄게 아쉬워했으나 그녀 처지에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느긋하게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고 있자니 허공에서 갑자기 남자가 나타났다.

"모시러왔습니다."

'크라이스 마법부장...!'

스님은 그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일이...

그제야 그녀가 말한 중요한 일을 눈치챈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벌써 그런 때가 되었구나. '

그런 생각하면서 스님이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그런 스님을 향해 고개를 숙여주고는 크라이스에게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남은 의뢰는 이걸로 끝냈습니다."

이번 용문사에서의 의뢰가 그녀에게 들어온 마지막 의뢰였다.

그녀는 화백으로서의 모든 일을 끝내고는 이제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으니까.

부용족이 고른 폐하의 합궁 상대.

그게 바로 지금 그녀의 역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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