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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177화 (177/235)

황실의 사냥터.

그곳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가 무심한 눈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팽팽해진 팔근육이 돋보였고, 그의 날카로운 금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주름진 얼굴에서 보이는 세월의 흔적도 그에게서 미를 앗아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남자의 뒤에는 갈색 피부를 가진 척안의 사내가 그 거구를 자랑하면서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었고, 옆에는 몸이 병약하기라도 한듯이 창백한 인상의 귀여운 소년이 덜덜 떨면서 차마 '과녁'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푸욱!

화살이 시위를 떠났고,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이젠 비명을 지를 수도 없게 된 과녁을 보면서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과녁이 이젠 수명이 다 했구나. 다른 과녁을 가져오거라."

그 명령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곧 새로운 과녁을 가지고 왔다.

"폐, 폐하! 부, 부디 살..."

"쯧."

새로운 과녁이 끌려오면서 빌자 눈에 띄게 인상을 찡그린 남자는 무사에게 말했다.

"과녁이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주었지?"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자, 잠시 말 아하게으미다. 그러히 부히..."

서걱!

그대로 과녁의 입을 억지로 벌려서 혀를 잘라버린 무사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과녁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걸 태연하게 보고 있던 남자는 활을 다시 겨누면서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덜덜 떨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소년에게 말했다.

"왜 떨고 있느냐? 이 아비와 사냥이 즐겁지 않느냐?"

그런 소년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남자가 물었다.

"이, 이건... 사냥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년이 작게 항변하자 남자는 뒤에서 얌전히 서 있던 척안의 사내에게 말했다.

"바른. 태자가 사냥의 의미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 하는 거 같구나."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이 척안의 사내가 바로 그 유명한 바른 키무르베리.

독룡을 사냥한 용사냥꾼이자 지금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금위대장인 남자였다.

"아니다. 짐의 부덕함이 더욱 크겠지."

그런 바른의 말에 덤덤하게 답하고 있는 금안의 남자는 당연히 황제였다.

황제는 그대로 과녁의 목에 화살을 명중 시키면서 말했다.

"사냥이란 목숨을 빼앗는 행위다. 죄인의 목숨을 빼앗는 지금도 사냥과 다르지 않지."

"허나... 이렇게 잔인하게."

하실 필요는 없었잖아요.

태자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황제는 그런 태자가 참으로 연약하다 생각하면서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있다. 명아. 가장 확실한 지배 수단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그 대답에 다시 시위에 화살을 올리면서 말했다.

그야 이 아이는 모르겠지.

이 무르고 연약한 아이는 아마 그 말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공포란다. 다시는 짐에게 대적하지 않게.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게."

이 잔인한 처벌은 공포를 주기 위해서.

제국에게.

저항하면 이리 된다는 것을 불온한 자들에게 보여주는 보여주기식 처벌이었다.

푸욱!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와 사랑이 아니다. 공포지."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눈은 싸늘했다.

설육이 그토록 가르치던 사랑, 자비.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들은 허상이다.

황제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은 사랑과 자비 같은 그런 무른 것이 아니었다.

차마 저항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강철처럼 단단한 공포였다.

"언젠가 황제가 되어야 할 아이가 이리도 유약하니... 참으로 걱정이구나."

전혀 이애하지 못하는 것 같은 태자를 향해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과녁을 보면서 말했다.

"이게 마지막인가?"

"그렇습니다."

휙.

무사의 대답에 활을 뒤에 서 있던 바른에게 맡긴 황제는 다리에 힘까지 풀려 버린 태자를 안타깝게 쳐다보더니 그대로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런 그의 손길은 생각보다 자상했다.

"이걸로 반란자 처리는 끝났나?"

태자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황제가 묻자 바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심한 놈들 같으니."

독룡의 추종자라니 참으로 멍청한 놈들이다.

용 따위에게 복종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지.

실제로 독룡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반란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나?

황제는 그들을 조소하며 아직도 떨고 있는 태자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참으로 나약하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황제는 가볍게 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나약함이... 그렇다고 싫은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기에 더욱 애틋하고, 신경 쓰이는 편이었다.

황제는 태자를 사랑했다.

누구보다도 사랑을 비웃는 그였지만... 그래도 자기 자식까지 공포로 지배하고 싶진 않은 게 아버지의 마음이었으니까.

--

"지긋지긋한 놈 같으니."

조정에서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황제는 대놓고 짜증을 냈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이러했다.

조정에서 재상과 실랑이를 하거나, 태학정 그 늙은이의 꼬장을 들어 주거나.

황제는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영역이라 생각하지 않는 부분에선 신하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는 편이었다.

이렇게 늘 다투더라도 결국 황제는 국정에 있어서는 어지간하면 그들의 뜻을 따르는 편이었으니까.

"바른."

황제는 집무실은 원래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건 재상의 일이지 황제의 일이 아니라 믿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그런 건 전부 재상에게 일임해 두었다.

황제의 의사결정이 필요할 정도의 중요한 서류가 아니면 딱히 서류를 만지지도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바른이 자연스럽게 뒤에 자리를 잡았다.

흰머리가 성성한 노년임에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태자는 무얼 하고 있던가?"

"공부 중입니다."

바른의 대답에 황제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공부라... 짐은 사실 공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단다."

"그래 보이십니다."

바른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런 바른을 쳐다보았다.

"...요새 좀 많이 솔직하단 생각이 드는구나?"

"과찬이십니다."

"칭찬이 아니야. 정말이지..."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도 그 이상 뭐라 하진 않았다.

이 제국을 지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그에게 이 정도 발언으로 벌을 준다면 그것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으리라.

독룡 토벌은 그 정도의 업적이었다.

황제에게 감히 막말을 해도 될 정도로.

"고민이 되는구나."

자신을 그나마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진만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것은 진류일까? 하지만...

"그래, 그래도 장자가 황제가 되는 게 맞지."

그래도 장자 상속이라는 기본 원칙을 벗어날 정도의 차이는 아니다.

다행히 명이가 눈치는 좋은 편이니 만이가 대장군으로 군에서 받쳐주고, 류가 재상이 되어 행정을 책임져 주면 제법 그럴듯하게 제국이 굴러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제가 바른에게 물었다.

"어떤가? 그래도 형제들인데. 이리되면 깔끔하지 않겠느냐?"

"흐음, 일리는 있군요."

바른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짐은 자식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장자 상속이면 관례가 그러하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다른 형제에게 황위를 넘기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느냐."

자식들끼리 싸우는 모습은 아무리 황제라도 그리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점에서 황제는 괜히 관례를 어겨서 싸울 여지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맞겠지.'

역시 이게 가장 적절하겠지. 이 셋에게 제국을 맡기자.

황제는 그리 결심하고는 활을 챙겼다.

고민을 끝냈으니 이젠 몸을 풀어줄 시간이었다.

"이제부터 사냥을 가려고 하니까 태자를 불러오거라."

언제나처럼 사냥을 가기 위해서 황제는 태자를 불렀다.

늘 데려갈 때마다 싫어하는 티를 내긴 하지만... 그래도 따라와주는 아들이 그는 참으로 고마웠다.

"오늘도 사냥입니까?"

바로 불려온 태자가 그런 황제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매일 같이 사냥을 나가니 솔직히 태자의 입장에선 황제가 영 못 미더웠다.

"짐이 일에만 몰두하면 아래 사람도 피곤할 거 아니냐. 적당히 놀아주는 모습을 보여야지. 이것도 군주의 덕목이다."

그런가...?

태자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그런 황제를 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니 맞는 말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만이랑 류는 잘 지내고 있느냐?"

"그 녀석들이야 뭐... 어련히 잘 지내지요."

그렇겠지.

황제도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는지 더 물어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태자는 친동생들 뿐만 아니라 다른 동생들에 대한 것도 잘 알았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

지금의 태자가 그러했다.

허구한 날 싸워대는 비들조차도 태자는 친아들처럼 아꼈고, 태자 역시 그런 비들을 친어머니처럼 대했다.

형제들은 모두가 태자를 싫어하지 않고, 태자는 모든 형제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니 이리 연약한 아이라도 어쩌면... 황제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황제는 그리 믿었다.

--

"명중이오!"

황제가 쏘아낸 화살은 확실하게 사슴의 목을 뚫어 버렸다.

"하하, 명아. 활은 여전히 못 다루는구나."

반면 태자가 쏜 화살은 제대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그걸 보면서 웃은 황제는 모처럼 중간에 합류한 진만에게 말했다.

"모처럼이니 한 번 시원하게 쏴보거라. 네 성취가 참으로 궁금하구나."

"넵!"

그 말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활을 받아 든 진만은 가볍게 활을 쏘았다.

푸욱!

"며, 명중이오!"

정확히 사슴의 눈을 맞춘 화살을 보며 몰이꾼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 설마 눈을 정확히 쏘아 맞출 줄이야.

대단한 실력이었다.

"하하! 걸작이구나. 좋은 솜씨야. 그렇지 않나?"

그 솜씨에 감탄하며 황제가 기분 좋게 웃었다.

바른도 그 솜씨에는 감탄이 나왔다.

"검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성취를 내더니 참으로 장하십니다."

"그 고명한 용사냥꾼에게 칭찬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른의 칭찬에 진만이 부끄러워하면서 활을 놓았다.

태자는 그런 진만을 감탄하며 쳐다보았다.

"대단해. 역시 내 동생이야."

태자의 말에 기분 좋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 진만이 태자의 앞에서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말했다.

"형님이 황제가 되면 내가... 대장군이 되어서 이 제국을 지켜줄게."

그런 진만의 선언에 태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믿어도 되는 거지?"

"그럼! 그러니까 형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야만족 따윈 내가 전부 막아줄 테니까. 류 녀석도 형님을 보좌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니까... 우릴 믿어줘."

그렇게 말하며 웃는 진만을 보면서 태자는 그런 동생이 참으로 든든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광경을 황제는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삼형제의 우애가 참으로 깊으니... 제국은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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