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손님이 사라지고 다시 합궁을 재개하게 된 황제는 진지한 얼굴로 다음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쳇코족인가..."
그리 큰 민족은 아니다.
오히려 미르예프의 경우와 같은 약소 민족이다.
"쳇코족의 주술사였던 여인입니다."
"수이라... 확실히 그렇구나."
미령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제의 기억에 있었다.
어릴 적 쳇코족의 거주지를 방문했을 때, 차기 민족의 주술사라고 소개받았던 소녀의 이름이 분명 그러했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보던 황제의 말에 미령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상화를 그려올까요?"
"되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오늘 밤 만나게 될 테니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미령에게 말했다.
"늘 고생이 많구나."
"녜?"
설마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걸까? 말까지 살짝 꼬인 미령을 보면서 황제는 웃었다.
"얼굴이 엉망이구나."
"...놀리지 말아 주세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푸욱 숙이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구나."
"크흠! 아무튼 전 합궁 준비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헛기침을 한 미령이 안경을 고쳐쓰고 급하게 자리를 뜨자 황제는 가볍게 붓을 들어서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곧 그쪽에서 보낼 여인과의 합궁을 앞두고 있기도 했거니와...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음선 장휘량.
그녀가 오고 나서 빗발친 어처구니없는 상소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학자란 자들이 고작 그런 거로 상소를 보내다니.
실망이 컸기에 엄중하게 항의할 생각이었다.
--
"흥, 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면서 여인은 느긋하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해왔는지 그런 그녀의 손길에 묘한 익숙함마저 느껴졌다.
강물처럼 청량한 느낌이 드는 푸른 머리카락을 댕기 머리로 묶고,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으로 바느질을 하는 그녀는 어쩐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저기..."
"아, 치장은 되었답니다. 중요한 첫날밤은 저희 전통으로 하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미령은 느긋한 그녀의 말투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상관은 없습니다만..."
뭘 하는 거지?
그녀가 정성을 들여 만들고 있는 인형을 보면서 미령은 머리를 긁적였다.
도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는 걸까?
미령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 내버려 두었다.
그들의 전통이 있다면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합궁의 원칙이었으니까.
"준비가 되면 말해주세요."
"네에!"
밝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미령은 얌전히 그녀가 쉬고 있는 별궁을 나왔다.
"비 전하께선 항상 바쁘시군요."
그때였다.
대장군이 되면서 서류 업무를 시작한 브레드가 서류를 든 채 부하들을 데리고 이동하다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브레드 대장군. 이동 중인가요?"
"아, 그렇죠. 자꾸 제가 대장군이라는 사실을 까먹게 됩니다."
처음엔 대장군이란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브레드가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브레드는 승부욕이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평소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렇게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하기는 무관 중에서도 가장 편한 편에 속했다.
"네, 오래된 서류를 서류 보관소로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벌써 그런 시기구나.
미령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합궁 상대인가요?"
브레드가 별궁에 있는 여인을 힐끔 보면서 묻자 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흐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군요."
브레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미령은 그 말에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프리아의 대표인 아네스의 차례가 다가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브레드 대장군은 아네스 씨를 참으로 많이 신경 쓰시네요."
"제가 젊은 시절부터 그분을 보좌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의 주군은 폐하시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애초에 브레드가 황제를 섬기게 된 이유도 그녀였으니...
브레드는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친우의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런 그의 진심이 담긴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준 미령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수고하세요."
미령이 그렇게 말하고는 바쁘게 사라지자 브레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참으로 바쁘신 분이군.'
어쩌면 모든 비들 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이 아닐까?
브레드는 그런 생각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작 그 역시 수도 방위 사령관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하면서... 리처드를 제외하고는 가장 바쁜 장군이 되었으니까.
--
"매번 찾아오면 안 지치나?"
그 가장 바쁜 장군, 리처드는 손님을 맞이하면서 까칠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
아파리는 그 까칠한 반응에 조금 상처를 입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해했다.
그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리 달갑지 않을 거란 걸 이해했으니까.
"사령관께서는 제 방문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아파리. 그쪽도 알고 있잖아. 업무 중에 이렇게 자꾸 찾아오면 귀찮다는 거. 사유우이 님은 내가 확실하게 지키고 있고. 그건 그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걸 왜 모르지?"
이젠 그녀를 상대로는 그 이상한 말투도 쓰지 않으면서 리처드가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물론 이제 그들에게 악감정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귀찮게 굴면 싫은데.'
사유우이를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매번 찾아와서 확인하면 당연히 그만큼 귀찮고 짜증이 날 수밖에.
"그것 때문에 확인하는 게 아닌데요."
"?"
아니 그럼 왜 자꾸 와서 귀찮게 구는 거지?
리처드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순간 머리가 굳었다.
"...설마. 미의 몸을 노리고?"
일부러 더욱 과장된 몸짓하면서 리처드가 말하자 아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네요."
쩌적.
그 대답을 들은 리처드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 뭐라고?
리처드는 여전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당신한테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리처드 사령관님."
"..."
리처드는 침묵했다.
아파리와 자기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였지? 10살? 그 이상이던가?
"...혹시 그때 머리를 다쳤나?"
리처드는 진심을 담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만큼... 그녀의 말은 리처드에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으니까.
--
"아비는 어쩌다가 군인이 된 거야?"
식사를 끝낸 키야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비를 보며 묻자 아비는 도를 닦던 손을 멈추고는 대답했다.
"그야 친구 따라서? 이래 봬도 저 나름 우리 부족에서는 미래가 보장된 여자였다고요. 차기 족장이었으니까요."
오랑카이족의 차기 족장.
그녀는 그 자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제국으로 와서 군인이 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친구?"
"대흘이라는 놈인데요. 그 녀석이 갑자기 제국으로 가서 군인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비는 그때를 떠올렸다.
둘은 미래가 보장된 인재들이었다.
그녀는 훗날 오랑카이족의 족장이, 대흘은 대전사가 될 예정이었다.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대흘이 족장이 되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따라왔어요. 애초에 그 녀석이 없는 부족은 저한텐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혹시 아비는 대흘이란 사람을."
아비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식 웃었다.
"에이, 안 좋아해요. 그냥 제가 안 챙기면 그 녀석을 누가 데려간다고요. 제가 책임지고 데려가야죠."
'...그게 좋아하는 거 아닌가?'
키야는 그런 생각을 들었지만 아비는 당당했다.
"그 목석 같은 놈이 저 아니면 어디서 여자를 구하겠어요. 불쌍해서 따라온 거거든요. 불쌍해서."
어디까지나 자신은 감정이 없는데 대흘이 불쌍해서 따라왔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아비를 보면서 키야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렇게 강조할수록 오히려...
"그럼 그 대흘이란 사람은 어째서 군인이 된 건가요?"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나... 저도 잘 몰라요. 그 녀석이 말은 안 해 줘서."
아비는 투덜거렸다.
그건 대흘이 이 악물고 안 말해 줘서... 그녀도 모르는 거였으니까.
--
"제가 군인이 된 이유 말입니까?"
마차를 몰던 대흘은 달리아의 질문에 고민에 잠겼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그냥 말하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가비가 활을 정비하면서 말하자 대흘은 그런 가비를 보면서 더욱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국 사람이지요. 그분을 보고 활을 쥐었기에. 그분이 사랑한 제국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누구?"
달리아가 육포를 뜯으면서 묻자 대흘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독무제십니다. 한 번 제가 어릴 적에 그분이 와서 저에게 활을 가르쳐 주셨지요."
독무제.
그 사람이 언급되자 달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그분을 만나 보신거야? 진짜?"
소문으로는 병으로 사망하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그쪽으로 간 거지? 달리아가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대흘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대답했다.
"...네, 독무제께서는 말년을 저희 오랑카이에서 보내셨습니다."
병환으로 죽었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자신을 더 이상 찾지 말라는 의미로 퍼트린 가짜 정보.
실제로 독무제는 남은 인생을 홀로 오랑카이에서 보냈고, 대흘은 그런 그 사람에게 활을 배웠다.
"늘 그분은 제국을 생각하셨죠. 그렇기에... 그때의 제국을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차마... 제국의 참상을 그에게는 말할 수가 없어서 숨기던 시절을 대흘은 기억했다.
그래서 대흘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입대를 결심했다.
적어도... 그분이 사랑했던 제국이 무너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국경으로 향하는 것을 선택했다.
내분으로 갈라지면 그래도 제국은 제국이지만,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지면 제국은 제국이 아니게 되니까.
적어도 야만족은 막아 내보자.
그런 결심으로 그는 군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흘은 지금의 황제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그분이 사랑한 제국을 지켜 주었으니까.
대흘은 그런 폐하를 섬길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