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어렵구나."
황제는 책상에 올라온 무수히 많은 여인들의 신상 명세를 살펴보며 신음하고 있었다.
당분간 합궁은 느긋하게 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미뤄온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첩이라도 들이시게요?"
집무실 구석에 시선을 주던 모용진이 그걸 보고 능글맞게 묻자 황제는 짜증을 냈다.
"이미 넘처 흐를 지경인데 무슨 첩을 들인단 말이냐. 라오허의 신부를 찾아보는 중이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빈은 한 명도 과했다.
"그딴 소리를 한 번 더 하면 저거와 같은 꼴을 당하게 해주마."
모용진에게 한 번 더 그딴 소리를 했다가 구석에 있는 것들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이라 엄포를 놓은 황제는 차분하게 명단을 살펴보며 후보를 추렸다.
"한족 장가의 여식이 그리 현명하고 참하다더구나. 초상화를 보니 확실히 미색도 곱고 라오허한테 딱일 듯 한데."
"아, 원래라면 폐하의 비 후보로 유력하던 여인이군요."
한족과의 마찰이 없었다면 높은 확률로 폐하의 비가 되었을 사람이던가? 모용진이 그런 생각하며 말하자 황제는 바로 그녀를 후보에서 지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비 후보가 될 뻔했던 여인을 동생한테 보낸다고?
동생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럼 동생에게 보내긴 좀 그렇구나."
그렇기에 그녀를 일단 보류한 황제는 다음으로 괜찮은 거 같은 여인을 골랐다.
"진륜족의 대륜 가문의 차녀가 제법 괜찮아 보이는구나. 주술 재능도 적당하고, 용모도 빼어나니."
"성격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휙.
모용진의 평가에 황제는 그녀도 제외해 버렸다. 라오허의 더러운 성격을 받아줄 수 있는 상냥한 성격의 여인이 아니면 곤란했다.
당장 미친왕도 그 성질을 받아주는 여인과 결혼하고 나서 철이 들었으니까.
"흠... 그런 점에서 미친왕이 라오허보다 낫구나."
궁녀 출신이긴 하나 그 가문도 동아족의 명문가로 나쁘지 않았고, 성격도 그 미친왕의 개짓거리를 받아줄 정도로 유했으며, 처세도 능했다.
친왕이 친왕비 하나는 잘 구했다는 생각하면서 황제는 슬슬 머리가 아파져 오는 걸 느꼈다.
만약 자신이 라오허에게 그녀보다 못한 여인을 붙여준다면 미친왕의 안목보다 자신의 안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어렵구나. 어려워."
황제는 이마를 감싸면서 그대로 의자에 기대고는 중얼거렸다.
궁녀 중에서 고를까?
사실 궁녀들 중에서도 집안도 괜찮고 외모도 빼어난 이들은 많다.
애초에 여러 가문에서 황제의 눈에 들기를 바라며 찔러 넣는 경우가 많아서.
특히 황권이 강할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기에 당장 황제의 궁녀들은 대부분이 명문가 출신이다.
황권이 강해지면 당장 합궁 상대 역시 그들이 고르고 고른 빼어난 이들인 경우가 많고, 아닌 경우엔 그저 구색만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황제는 누가 봐도 전자였고, 무문제는 애석하지만 후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지 황제가 여인을 고르는 기준은 매우 까다로웠다.
아무래도 황제가 본 여인들이 대부분 그렇게 고르고 고른 여인들이었으니까.
"이 여인은 아무런 재능이 없구나. 이 여인은 모나진 않았는데 미인이라 보기도 그렇구나. 이 여인은... 몸매가 라오허의 취향이 아닐 듯 한데."
'저 정도면 미인이라 불릴 만한데...'
모용진은 초상화를 힐끔 보고는 중얼거렸다.
초상화만 봐도 보기 좋은 미인이거늘, 비들 때문에 눈이 높아져도 한참 높아진 황제의 기준에 어지간한 외모는 미인으로 차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짐이 미색이 고운 이로 찾아준다고 약조했거늘. 타협을 해 버리면 짐의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그 말에 모용진은 침묵했다.
하긴 그 황제가 고르고 고른 여인인데 어디 하나가 괜찮은 정도여도 곤란하긴 했다.
"...딱 있구나."
그렇게 명단을 뒤적거리던 황제가 마침내 찾아냈다.
외모도, 인성도, 그리고 그 신분마저도 괜찮은 여인을.
"이 아이를 불러오거라."
"이 여자는..."
황제의 말에 모용진은 명단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만큼 황제가 고른 여인은 충격적이었으니까.
"...진심이십니까?"
"짐의 명령이라고 전해라. 꼭 연결되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만나라도 보라고."
황제의 단호한 말에 모용진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뭐,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네, 그럼..."
"바로 출발하거라."
황제의 독촉에 모용진은 한숨을 쉬더니 그대로 구름에 올라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동 거리가 너무 멀긴 했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어째 요괴가 되고 나서 더 험하게 부리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모용진은 서글픈 기분이 들어서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그대로 떠났다.
"다음 후보는..."
그 아이와는 안 될 수도 있으니까.
황제는 다시 부지런히 명단을 탐색하며 구석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그것. 아니 할바르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할바르. 자세가 내려간다?"
"네, 넵!"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자세를 잡는 할바르를 보면서 혀를 찬 황제는 서류를 넘기면서 물었다.
"업무 중에 술 마시니까 좋았나? 그걸 공식 연락망으로 국경 방위 사령관한테 자랑까지 하다니... 실망이 크구나."
"아, 그, 그게 무아 놈이 그러니까..."
'망할 리처드.'
친구라고 있는 놈이 그걸 다 꼰질러?
할바르는 속으로 리처드에 대한 욕설을 내뱉으며 급하게 변명했다. 그걸 본 황제는 구석에 있는 다른 문제아를 보았다.
"무아야. 그래서 할 말은?"
"...저자가 그런 귀중한 물건을 자랑용으로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 줄 알았다면 절대 제안 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릎을 꿇고 손들고 있던 회색 머리의 중년이 덤덤하게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대는 손 내리고 할바르 위에 타라."
"네? 폐, 폐하!"
"명을 따릅니다."
억울한 얼굴로 말하는 할바르를 황제는 깔끔하게 무시했고, 무아는 태연하게 할바르의 등에 올라탔다.
"끅!"
순간 자세가 무너질 뻔한 할바르가 필사적으로 버티자 황제가 말했다.
"이제 머리 말고 팔로 버티거라."
"네..."
할바르는 자세를 바꿔서는 팔로 버티고 섰다.
"그대로 1시간만 더 있어라."
"...네."
할바르는 속으로 황제 욕, 리처드 욕, 그리고 자기 위에 있는 무아 욕하면서 부들거리는 팔로 한참을 그렇게 버텼다.
정말이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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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 있었냐?"
진민은 한참 치던 난을 마무리 짓고는 먹을 갈며 물었다.
그가 새로 취미로 삼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최근에 서예에 재미를 붙인 진민은 여기저기서 붓과 벼루를 사들이고 있었으니까.
"뭐, 그렇지. 그보다 서예? 진짜 안 어울리네."
진민의 그런 모습을 보며 라오허는 조소했다.
뭔 서예? 이 자식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아니, 이게 뜻밖에 괜찮더라고. 예쁘지 않아?"
"...너한테 그런 감수성이 있는지는 몰랐네."
순수하게 자신이 친 난을 보며 감탄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라오허는 그리 생각하면서 난을 보았다.
"잘 치긴 했네."
확실히 재능이 있는지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의외의 재능이라니까? 형님도 보고 열심히 하라고 아예 전시관까지 준비해주기로 했거든."
당당하게 전시관을 지을 곳을 보여 주며 진민이 자랑했다.
확실히... 최근 황궁 근처의 건물 몇 개를 허물고, 공사를 시작했다더니.
설마 그게 이 녀석 취미활동을 위한 전시관이었을 줄이야.
라오허는 형님의 배포에 감탄만 나왔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지. 여자 안을 시간도 없어. 요샌 이게 더 재밌거든."
"그, 그래..."
확실히 사람이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절대 정신 못 차릴 거 같던 녀석이 정신을 차린 것에 라오허는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보다 귀접은 어떤 느낌이냐? 죽여 줘?"
"...그래, 네가 그걸 왜 안 물어보나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친왕비가 가져온 차를 마시면서 진민이 능글맞게 물어오자 라오허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아주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라오허는 그리 생각하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죽이던데? 다리가 좀 후달리긴 하더라."
물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라오허가 능글맞게 대답하자 진민이 비웃었다.
"정력 딸리네 병신 새끼."
"응, 너였으면 걷지도 못했어."
"응, 나였으면 귀신이 두 다리로 못 걸었어."
역시 이게 우리 사이겠지.
라오허는 이 유치한 싸움을 즐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유치한 관계가... 지금 생각해보면 라오허는 그리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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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사실 난 그대가 더 끌리는데."
바아간의 대답에 모용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제안을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모용진은 여전히 생각이 없었다.
"전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뭐, 괜찮겠지. 만나 보는 것 정도는. 그 아이도 이젠 어른이니까."
그 대답에 바아간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나이가 올해로 딱 20세.
그에게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운 딸이 오르테가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딸이 바로 그 아이였다.
"그럼 잘 부탁하네."
"네."
모용진은 그리 말하고는 바아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용왕궁의 모습은 언제봐도 좋긴 했다.
대부분을 대리석으로 만든 이 용왕궁은 과연 아름답긴 했으니까. 그렇게 모용진이 용왕궁을 구경하며 걷고 있을 때 바아간이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모용진은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는 걸 깨닫고는 구경을 멈췄다.
똑똑.
"손님이다."
"들어오세요."
바아간이 노크하고 말하자 안에서 곱고 아름다운 음색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 만으로도 미인이라고 짐작하게 만드는 여인.
오르테가한테서 느껴지는 것이 밝음이라면, 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부드러움이었다.
아름다운 청발을 길게 기른 여인이 의자에 앉아서는 느긋하게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
가슴은 한복을 입고 있음에도 그 크기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컸고, 허리는 가늘었다.
그런 점은 언니와 똑같다고 해야 할까?
백옥 같은 피부에 반짝이는 노란색 눈동자를 지닌 얌전하고, 청순한 느낌의 여인이 비파를 멈추고는 모용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할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꾸벅 인사했다.
"어머나. 금위대장님. 오랜만이네요."
"오르페나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모용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가 바로 황제가 선택한 라오허의 신부 후보인...
오르테가의 동생, 오르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