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왜 사람은 잃고 난 다음에야 후회하는 걸까?
모용진은 어제 만든 해먹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장. 대장!"
모용진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타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을 보며 모용진은 무심결에 말했고, 그 순간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모용진은 그 주먹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확실히... 이런 묵직한 주먹은 타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여자랑 착각하는 건 못 참아요!"
세르나가 화난 얼굴로 모용진을 노려보며 말하자 모용진은 그제야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세르나였구나. 그보다 다른 여자라니. 너도 여자란 분류 안에 들어가던가?"
그 말에 다시 세르나가 날뛰기 시작했으나 모용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녀의 주먹으로 백날 때려봐야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까.
"이 숲도 이젠 익숙해진 게 무섭다."
모용진은 자신이 지은 오두막에서 나와서는 몸을 풀었다.
생각보다 체류가 길어져서 만든 임시 거점인데... 요새는 진법의 근원을 찾는 일보단 이 거점을 보수하는데 재미가 들려 있는 상황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군. 상상 이상으로 강한 진법이다.'
그리고 모용진은 자신이 그런 활동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오싹해졌다.
이러다가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모용진은 그런 생각에 몸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과 평생은 사양이었다.
"오늘 저녁은 버섯으로 해요."
"...버섯. 그래, 버섯으로 하자."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일단은 뭐라도 먹어야 살기에 모용진은 버섯을 따고 있는 세르나에게 대답해주었다.
이젠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쌓였다.
그 경험과 친숙함이... 모용진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 타라는 언년이예요?"
한참 버섯을 손질하던 세르나가 여전히 조금 삐진 얼굴로 묻자 모용진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언년이긴."
모용진은 자기 첫사랑이라고 덤덤하게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비밀."
그리고는 대답을 바꾸었다.
"뭔데요!"
세르나가 투덜거렸으나 모용진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조금 전에...
그녀와 이 녀석을 겹쳐 보았다는 것을 말이다.
--
"달... 구경이요?"
타라는 이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앞에 있는 이 주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신기한 사람.'
타라는 자신을 보며 웃는 그가 신기했다.
모두가 야만의 피가 흐른다며 그녀를 경멸했는데...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르신한테 혼날 텐데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모용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혼내라지. 뭐. 혼나봐야 머리 좀 깨지고 말겠지."
"후후, 그럼 저도 며칠 굶는 걸로 끝나겠죠. 어디로 갈까요?"
타라는 손을 내밀었고, 모용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웃었다.
"좋은 곳이 있어."
"어머?"
모용진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그대로 방을 나왔다. 타라는 그런 모용진의 목을 꼭 껴안으며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모용진이 나가고자 하면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까.
괜한 곳에 인력을 낭비할 이유는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중을..."
자신을 안은 채 지붕을 날듯이 뛰어다니는 모용진을 보며 타라가 여전히 놀란 눈으로 중얼거리자 모용진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기분이지?"
"네, 대단하네요. 주인님은."
모용진은 휙휙 바뀌는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타라를 꼭 안고는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순식간에 저택과 거리가 멀어지고, 어느새 둘은 산에 있는 전망대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했어."
"여긴..."
그녀는 모용진의 품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끔하게 잘 괸리된 전망대에... 주변엔 산장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와 오르테가 공주님이 자주 놀러오던 곳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관리도 잘되어 있지?"
그 말에 타라는 솔직하게 놀랐다.
그 용왕국의 공주님도 이곳을... 확실히 그런 높은 분들이 올만할 정도로 이곳은 관리도 잘 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본 달은...
"확실히 아름답네요."
달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고향인 황야에서 올려다보던 달도 아름다웠지만... 타라는 오늘의 달만큼 아름답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고향은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부는 바람은 참 시원했어요."
"어쩌다가 잡혀 온 거야?"
모용진은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서 질문했고, 타라는 쓰게 웃었다.
"제 아버지는 전사였어요. 꽤 많은 전사들을 부리는 전사요."
그 실력이 출중했기에 칸의 밑에서 중책을 맡고는 했다며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이... 모용진은 슬퍼 보였다.
"한 명의 남자였어요. 아마도 제국 출신이겠죠."
그녀가 아직 어리던 시절.
아버지가 이끄는 부족은 어느 날 한 미친 광인을 만났다.
"광인... 이었죠. 커다란 대검을 들고. 황야를 누비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광인이 나타났어요."
그 남자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그녀의 부족민들을 학살했다.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그 남자의 검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아직 어린아이던 그녀는 두려움에 몸이 굳었고,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그 남자를 상대로 시간을 끌었다.
그래... 그녀의 아버지와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도 고작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이었다.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 제국군이 나타나서 그 광인을 포위했어요. 그러고는 그 남자를 데리고 사라졌죠. 전..."
그때가 바로 그녀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제국군은 그 남자만 데리고 간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군인이었던 모양이더라고요. 우린 전쟁 포로로 분류되어 그대로 제국군에게 잡혀갔어요. 그러곤... 전 국경 방위 사령관이란 사람의 눈에 들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죠."
"...삼촌이 널."
모용진은 뭐라 말하려고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보다 그 광인이라면... 그 전장의 사자인가."
모용진은 대충 그녀가 말한 광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장의 사자.
그 강함은 저기 먼 프리아의 브레드와 비교될 정도의 강자다.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 남자를 적으로 만나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오히려 기적일 것이다.
"이젠 대답이 되었나요?"
"그래, 대답이 되었어."
모용진은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그녀를 보면서... 홀린 듯 서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도, 피로에 찌든 두 눈도, 비쩍 마른 몸도, 모든 것이 모용진의 눈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길에서 물으면 열의 아홉은 아마 평범하다고 말할 여인이지만... 모용진의 눈엔 그 어떤 미인보다도 아름다운 미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모용진은 자신의 이 감정을 이름 붙이자면 이것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해."
"...네?"
타라는 당황한 얼굴로 모용진은 쳐다보았고, 모용진은 그런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사랑해. 타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감정을 설명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갑작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용진에겐 전혀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배려도, 가끔 자신을 보면서 짓는 그 미소도, 피로에 찌들어 있어도 그 빛은 잃지 않는 검은 눈동자도.
전부 사랑스러웠으니까.
모용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그러니까... 솔직히 제가 거절해야 하는 건 알고 있죠?"
그녀는 슬픈 얼굴로 말했고,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알고 있었다.
둘의 신분 차이는 너무나도 커서, 결코 이 사랑이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데도 말하고 싶었어."
모용진은 말하고 싶었다.
이 감정을 말이다.
더 이상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그런 모용진의 마음이 느껴진 것일까? 그녀는 그런 모용진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선택이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결말을 불러일으킬 건지. 분명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제 인생... 책임져주실 거죠?"
그녀는 설령 자신이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남자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이런 곳에서 대체 무얼하려는 건지..."
콰득!
황제는 자신에게 달려든 뱀의 목을 쥐어서 짜버리고는 대충 던졌다.
보통 성인 남자는 목숨이 위험할 왕뱀이었는데 황제에겐 그저 귀찮은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봐도 신기하네요."
달리아는 그런 황제의 품에 안긴 채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황제는 늪 위를 걷고 있었으니까.
"늪에 이런 식으로 빠지지 않는 사람은 저 처음 봤어요."
달리아가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자 황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하늘을 걷는 것보단 쉬운 데."
"아니 애초에 하늘은 어떻게 걷는 건데요."
그 대답에 달리아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달리아는 애초에 하늘을 멀쩡히 걸어 다니는 황제의 기술은 정말 마법 같다고 생각했다.
"극도로 발달한 신체는 마법과도 같지."
"그건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배운 마법 지식이 휴지가 되는 기분이군요."
이동을 도왔던 마법사.
라파이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런 마법도 없이 물 위를 걷고 있는 폐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 정도였다.
"콰오콴이라는 자도 참 힘든 곳에 사는군."
황제는 달리아의 안내를 받으면서 콰오콴이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독충을 모으고 있다고."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황제는 습한 밀림의 환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리 습하면 옷은 불편할 거 같았다.
"왜 옷을 그리 불편하다고 했는지 알겠구나."
"그렇죠? 이게 이런 데서 살다 보면 옷이 좀 불편하다니까요."
"크흠!"
라파이르는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달리아가 가슴만 가리는 정도의 짧은 옷을 팔랑거리자 그녀의 탄력적인 가슴이 살짝 보였으니까.
"아하하, 미안. 미안. 그보다 왜 저렇게 무서워해요? 제 실수인데."
달리아가 덜덜 떠는 라파이르를 보면서 의아한 얼굴로 묻자 황제는 덩굴을 베어내며 대답했다.
"전례가 있어서 그렇겠지. 한 내시가 황제의 여인이 옷 갈아입는 걸 보았다가 눈이 뽑혔다는 사례가 있으니. 실제로 법도대로 처리하면 그리 해도 문제 될 건 없긴 하지."
"뽑을 건가요?"
달리아가 깜짝 놀라며 묻자 라파이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둘을 보고 황제는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법도대로 그냥 뽑았을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되었다. 실수에 그리 잔인할 필요는 없겠지."
황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 콰오콴이나 찾아보아라. 이 밀림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것보단 콰오콴을 찾아야 하거늘.
황제는 라파이르를 독촉했고, 라파이르는 공중에 떠서는 탐색을 계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성과는 없었다.
애초에 콰오콴 정도의 주술사면 스스로의 기를 감추고 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되었다. 짐이 찾아보마."
도저히 성과가 나오지 않자 황제는 다른 방식으로 찾기로 했다.
후웅!
'이건 무슨...'
라파이르는 갑자기 황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기운에 놀랐다. 그야말로 황제의 기운이 이 밀림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황제는 기운을 흩뿌려 이 밀림 전체를 뒤덮고는 말했다.
"...저기구나."
원래 이런 식의 탐색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서 자중하는 편이긴 했다.
실제로 황제의 기운을 버티지 못한 동물과 곤충들이 기절하고 있었으니까.
"저, 저기 이런 식이면..."
그 무지막지한 탐색 방법에 달리아는 밀림에 발생한 피해를 생각하며 걱정을 참지 못했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조절에 실패했다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기절했을 정도로 위험한 행동이었으니까.
"...온다."
그때였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도끼가 허공에서 소환되더니 황제에게 떨어졌다.
"죽었나! 대체 어떤 괴물이 이런 곳에서... 기운으로 생태계 파괴를 노리다니 잔혹한!"
늪에서 튀어나온 무슨 곰처럼 커다란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방금 황제의 탐색을 밀림의 생태계 파괴를 노린 테러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폐하!"
라파이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당황했다. 아무리 폐하라도 불시에 저런 도끼에 맞으면 크게 다칠 거다.
게다가 저 도끼에 실린 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폐하의 옥체가 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라파이르가 그런 걱정을 할 때였다.
쩌적.
황제를 덮쳤던 도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그리고는 완전히 파괴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친 예법이구나."
도끼가 파괴되어 사라지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황제는 놀랍게도 그 자리에 상처 하나 없이 서 있었다.
"허참! 몸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커다란 남자는 그 모습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기가 가득 실린 도끼를 맞고도 멀쩡한 거로 모자라 오히려 도끼가 박살이 나다니?
믿을 수 없는 내구성이었다.
"그보다... 폐하?"
남자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저 곱상한 남자가 황제란 말인가? 저 생태계 파괴범이?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대가 콰오콴인가?"
황제는 커다란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키는 12척이 넘는 거구였다. 인간이 저렇게 클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얼굴은 곰처럼 생겼고, 몸은 전체적으로 근육으로 가득해서, 솔직히 주술사보단 전사로 보였다.
"거짓말하지 마라! 저런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이 황제일 리가! 요괴라고 하면 믿겠군."
"..."
콰오콴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며 전투 준비하자 황제는 달리아를 땅에 내려주고는 말했다.
"짐이 요괴라... 후후."
"...저기 폐하? 우리는 지성인이니까 대화로 풀 수 있으면 푸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달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대충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자신을 다짜고짜 공격한 사람이라도 달리아는 모두 멀쩡하니까 굳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대화해야지."
황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풀었다.
확실히 대화로 푸는 게 좋았다.
"무인의 대화를 말이야."
그리고 무인에게 대화는 역시 몸의 대화였다.
'이건... 끝났네.'
황제의 대답을 들은 달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에겐... 저 콰오콴이라는 주술사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