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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87화 (87/235)

'그러니까 합궁 후에 다시 부탁하면 지지해주겠다는 이야기잖아! 이 바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로라는 스스로의 멍청함에 치를 떨었다.

아직은 비 후보니까 들어줄 수 없다.

그 말은... 정식 비가 되면 얼마든지 그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라는 걸 그녀는 이제야 알았으니까.

'아무튼 그럼 지지해주시는 건가? 정말?'

그녀는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황제의 말은 그런 의미가 분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심장은 묘한 기대로 마구 뛰기 시작했다.

'성공... 한 건가?'

확신은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황제의 입에서 확답을 듣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다시 면담을 요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물론... 지금은 궁녀들의 손에 이끌려 치장을 받는 중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궁녀들의 손에 이끌려 욕탕으로 향했다.

"손 볼 곳이 참 많구나. 특별히 신경 쓰거라."

그 과정을 모처럼 담당하게 된 황태후는 전혀 관리가 안 된 그녀의 머리를 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인데 이리도 관리하지 않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으니까. 황태후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가꿔볼 생각이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정말 사양하고 싶은 호의였으나 로라는 결국 거절하지 못한 채 그대로 궁녀들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

"...쿠류는 생각했던 것보단 발전한 곳인데?"

항구에 도착한 미친왕은 대모가 사는 성으로 향하면서 쿠류의 시장을 보면서 감탄했다.

생각보다 낙후된 곳이라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상인들은 열심히 고성을 내지르며 호객에 열중이었고, 시장에 진열된 생선은 신선했다.

제국과 다른 점이라면... 우선...

"거의 여자구나."

거리에서 상업 활동하는 이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 달랐다.

역시 모계 사회인 곳이라서 그런가?

미친왕은 그리 생각하면서 세이나에게 물었다.

"원래 이런 곳입니까?"

원래도 이렇게 남자를 보기 힘든 곳인가? 미친왕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흐음, 전 잘 모르겠네요. 사실 저도 이곳 거리에 나와보는 건 두 번째라서요."

세이나는 그 의문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사실 그녀도 거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니까.

"아..."

괜한 걸 물어 봤네.

미친왕은 그런 생각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첫 번째는 그럼 형님의 합궁 상대로 정해져서 항구로 향할 때였을까?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친왕은 그녀를 따라서 걸었다.

일단 세이나가 이 일행의 책임자니까 그녀가 앞에서 일행을 이끄는 게 옳았다.

처억!

"방문 목적을 말씀해주십쇼."

그때였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여성 무사가 그대로 일행을 제지했다.

미친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세이나를 살폈다.

과연... 세이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궁금했으니까.

대흘과 아비는 그런 세이나의 뒤에 서서는 상황에 따라선 무기를 뽑을 것도 불사할 기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가...'

세이나는 자신이 살았던 성을 보았다.

물론 그녀의 공허한 두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녀에겐 심안이 있었으니까.

여전히 어둡고, 기분이 나쁜 성이었다.

아무리 귀한 목재로 아름다운 성을 쌓아도, 그녀에게 이곳은 그저 끔찍했던 감옥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낮추기 보단 높이십쇼. 그편이 낫습니다.]

'그 말이... 맞아.'

세이나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면서 미친왕이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그대가 어떤 선택을 하던, 짐은 그대를 지지해 주마.]

폐하께서 해주신 말을... 가슴에 새겼다.

자신이 이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무시 당하는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그녀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폐하의 명을 받고 왔으니 어서 문을 열거라!"

세이나가 황제의 직인이 찍힌 친서를 보여주며 당당하게 말하자 무사는 당황한 얼굴로 친서를 확인했다.

"이게 정말 황제의 친서인지 의심..."

무사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서 친서를 돌려주려고 할 때 세이나가 그녀를 그 공허한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빛을 잃은 두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세이나는 원래라면 피했을 무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의심이 된다면 당신의 목을 걸도록 해. 황제의 친서를 의심한다는 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로 알 테니까."

세이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말했고, 미친왕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감탄했다.

덜덜 떨면서 소심하게 굴던 평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대처였다.

처억!

그 순간 어느새 뽑힌 아비의 도가 무사의 목을 겨눴고, 무사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화, 확인했습니다. 어서 문을 열어라!"

무사가 다급하게 외치자 병사들이 문을 열었고, 아비는 바로 무사의 목에 닿아 있던 도를 거뒀다.

"바로 대모님께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그 모습에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려서 비틀거리던 무사가 다급한 걸음으로 사라지자 세이나는 잠시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를 아비가 바로 부축하자 세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잘한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잘했나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아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곳에 모두가 그녀가 그렇게 당당하게 대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그녀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럴... 까요?"

그래 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세이나는 아비의 대답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떨리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드디어... 대모를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그래, 치장이 끝났다고."

황제는 상선이 합궁 준비가 끝났다는 말을 전해 오자 재상과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그리 진행할 예정이니 그대가 많이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소신이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재상이 그렇게 답하고는 물러나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합궁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미령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도 방금 상선에게 전해 들었느니라."

"죄송합니다. 최근 다른 업무로 바쁜 터라..."

자신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령이 곧바로 사과하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전혀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최근 바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그러니 이만 쉬러 돌아가거라 피곤할 터인데."

최근 미령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황제는 그녀에게 휴식을 명령했고, 미령은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생각해도 최근 너무 무리하긴 했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돌아가자 황제는 집무실을 나와서 일단 걸었다.

'모두가 마법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가.'

참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과연 리처드의 딸인가?

재상과 이야기해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현재 마법 공학을 선도하는 우수한 마법 공학자라는 사실이었다.

당장 오늘 선보인 냉장고란 물건도 그녀가 없었다면 그 정도까지 완성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평가 받을 정도라고 하니...

그 실력은 과연 증명되었다고 봐도 되리라.

그래서인가?

그녀에 대한 예산 편성에 재상은 뜻밖에 긍정적이었다.

'괜히 놀린 셈이 되었군.'

이 정도면 굳이 자기 지지가 없어도 재상이 알아서 예산을 배정해줬을 정도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가마."

"네? 아, 예... 드, 들어오세요."

어느새 침소 앞에 도착한 황제는 그녀에게 말했고, 곧 안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허락이 떨어졌다.

황제는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대는 누구지?"

안에는 처음 보는 여인이 있었으니까.

황제는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여인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금색 긴생머리는 마치 비단 같이 매끄러웠고, 호수처럼 맑은 벽안은 조금은 물기를 담아서 반짝였다.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고왔고, 그녀가 입은 하얀 프릴이 달린 검은색 원피스는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렸다.

"이, 이런 팔랑거리는 옷은 처음이라서... 그보다 오늘 봤으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세요."

"...?"

봤다고?

이런 여인을 본 기억은 없는데... 황제는 자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금발, 그리고 벽안...

작은 체구. 그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봉긋 솟은 가슴...

"...로라?"

황제는 그제야 자기 앞에 있는 이 인형처럼 귀여운 여인이 로라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놀랐다.

"뭐예요. 정말. 모르는 척하고. 놀랐잖아요!"

그 반응에 안도한 얼굴로 바로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잠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조금 꾸미는 것만으로 여자는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기름 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에...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한 채 한참 그렇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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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미가 쏠 테니까 오늘은 실컷 마시자!"

국경으로 돌아온 리처드는 우승 상금으로 국경의 병사 전체에게 술을 샀다.

"사령관 님. 우승하실 줄 믿었습니다!"

"최고다 사령관님!"

병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술을 마시던 리처드는 자기 앞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백부장에게 말했다.

"유는 쿠류 출신이었지?"

지금 눈앞에 있는 백부장은 최근 이 자리에 앉은 자로... 이곳에선 보기 드문 쿠류 출신이었다.

"그렇습니다. 받아주신 폐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미한테는 안 고마워? 너무하네. 하즈미 백부장."

"이름은 소야입니다."

"아, 그래. 소야."

헷갈렸네.

리처드는 가볍게 사과하고는 그를 보았다.

이 남자가 바로 가장 최근에 백부장이 된 남자인 하즈미 소야로 천왕제에 참가했던 자라고 하는데...

왜 황제가 이 자를 군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리처드에게도 처음엔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폐하께서 그를 받아들인 것에 리처드는 감사하고 있었다.

이 국경에서 그는 리처드가 유일하게 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남자였으니까.

"당연히 사령관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굿. 이쪽에 와서 같이 먹자고. 우리 같은 딸 있는 아버지 끼리 말이야."

리처드는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고, 소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와서는 합석했다.

"미의 큐트한 딸이 이번에 황제의 비가 될 예정. 신기하지?"

"그거 대단한 일이군요."

소야가 감탄하자 리처드는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미는... 딸이 스트롱한 남자와 결혼하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비가 되는 건 조금... 복잡한 기분?"

리처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술을 들이켰다.

비라는 건 필연적으로 한 명의 여인으로 사랑 받긴 힘들다.

황제는 그만큼 많은 여인을 안아야 하는 위치였고, 그만큼 다른 여인과 경쟁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리처드는 그런 상황에서 딸이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아비 입장에서 비라는 위치는 조금..."

소야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며 잔에 술을 따르자 리처드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유는 이해하는군. 다른 놈들은 황제의 비라면 그저 좋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유는 딸을 못 본지 오래되었다고 하던가?"

"...어쩔 수 없지요. 쿠류에서 추방되었으니."

소야는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술을 털어 마셨다.

"쿠류도 차암 이상한 곳이야. 그러고 보니 최근에 폐하께서 받은 비가 쿠류 출신이라고... 그래서 유를 불렀지. 쿠류에 대해서 조금 관심? 생겼거든."

"네?"

그 말에 소야가 바로 반응했다.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소야는 쿠류 출신이라면 혹시... 자기 딸에 대해서 알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보았고, 리처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프렌드에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미는 폐하와 아주 프렌들리한 관계거든."

크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면서 리처드는 바로 취해서 흔들리는 손으로 삐뚤빼뚤하게 추천장을 써 주었다.

"어차피 전쟁도 없을 예정이니... 잘 다녀오길. 마이 프렌드."

"...감사합니다."

소야는 그 추천장을 받아들고는 속으로 기대했다.

'내 딸... 무사할까?'

소야는 10년 전에 헤어진 자신의 딸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 아이는 밥은 제대로 먹고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그런 생각하면서 소야는 추천장을 꼬옥 쥐었다.

어쩌면 딸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그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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