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황제의 검
* * *
"오늘 네가 만날 사람은 아주 귀한 사람이다."
처음으로 들어온 황궁.
그곳을 걸으면서 소년은 아버지의 말을 흘러들었다.
그렇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궁에 있는 사람이니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지루하네.'
소년은 지루했다.
이미 검에 있어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재능이라 평가 받는 소년은 그 검희에게 재능을 인정 받은 진짜 천재였다.
7살의 나이에 벌써 기를 다루는 것에 눈을 떴으니, 조만간 검기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소년은 자기 재능을 잘 알았고, 앞으로도 자신의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거라는 것도 인정했다.
"자, 인사하거라.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태자시다."
그 지루하던 인생에서... 그 만남은 그야말로 처음에 작은 파문이었다.
'저 아이가 태자?'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소개한 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거 같은 어린아이.
앙증맞은 두 다리로 아장아장 걸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그 아이는 정말이지...
'귀엽네.'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통통한 볼살, 생기 넘치는 검은 머리카락, 황실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인 금안까지.
정말이지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을 수 있구나 싶은, 이 귀여운 아이가 바로 자기 사촌 동생이자... 장차 자라나서 이 나라의 황제가 될 태자였다.
"누구?"
예상외로 또렷한 목소리로 물어 오는 아이를 보면서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 부족한 아들입니다. 자! 어서 인사하거라."
"모용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재촉에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모용진?"
"네, 편하게 진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진!"
모용진의 말에 아이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말했다.
"난 위!"
위? 위를 보라는 건가?
모용진은 순간 그런 생각했지만, 곧 위가 태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태자가 내밀고 있는 손을 잡았다.
"진! 진!"
"...네, 진입니다."
아직 어린 애긴 하구나.
기쁜 듯이 자기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는 아이를 보면서 모용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제 2살이니 말도 서툴겠지.
태자와의 첫 만남은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귀여운 동생이 생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모용진은 처음으로 이 망할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기억했어."
아이는 그런 모용진을 보면서 해맑게 말했다.
그 말을 모용진은 대충 흘러들었다.
고작 2살짜리 어린 애가 말한 기억했다는 말을... 모용진은 신용하지 않았으니까.
"뭐 해?"
그러나 모용진은 그 생각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날 만남 이후로 태자는 정말 매일 모용진을 찾아왔으니까.
적어도 한 말은 귀신 같이 지키는 태자였다.
"단련하고 있습니다."
가문의 연무장에서 단련하고 있던 모용진은 오늘도 찾아온 태자를 보면서 말했다.
"검을 말입니다."
"단련?"
태자의 질문에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관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태자는 반짝이는 눈으로 모용진이 검을 휘두르는 걸 보더니 말했다.
"정했어. 나도 검을 배울래."
"...네?"
모용진은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태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검을 배울 거야."
'이런.'
어릴 때의 변덕인가?
모용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거란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태자가 금방 검에 질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마저 오산이 되었다.
"또 졌지? 내가 이겼어!"
그 후로 세월이 꽤 흘렀다.
모용진은 여전히 태자의 곁을 지키는 보모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런 태자에겐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밝은 금발. 아름다운 황금색 뿔.
그리고 장난기가 가득한 샛노란 눈동자를 지닌 단발머리의 소녀.
조금은 중성적으로 보이는 그 소녀는 이번에도 태자를 발아래에 둔 채 으스대고 있었다.
'이걸로 100전 째인가?'
그야말로 백전백패.
이 소녀에게 태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검은 놓는 게 어때? 이 오르테가 님한테 이기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으스대는 저 소녀의 말에 태자는 입술을 꽈악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작고 여린 태자는 용인답게 성장이 빠른 저 소녀를 이기지 못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모용진이 볼 때 태자에게 부족한 것은 단지 체급 뿐.
'그보다 아직 검을 포기하지 않으실 줄은...'
모용진은 솔직히 태자의 저 승부욕이 의외였다.
금방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2살짜리 어린 애가 그냥 멋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태자는 벌써 9살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검에 땀을 흘리면서, 어쩔 수 없는 패배에도 분해하고 있었다.
그 진심이... 모용진의 마음을 괜히 뜨겁게 만들었다.
"분하십니까?"
터덜터덜 자신 쪽으로 걸어와서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는 태자를 보며 모용진이 묻자 태자는 목검을 꽉 쥐면서 대답했다.
"분해..."
"때가 되면 반드시 이기실 수 있을 겁니다."
모용진은 그런 사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진짜...?"
그런 모용진의 말에 태자가 눈을 반짝이면서 묻자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전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태자가 가진 검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라는 것을.
그가 흘린 땀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많았다는 것을. 그렇기에... 모용진은 믿고 있었다.
"무인이 흘린 땀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모용진은 알고 있었다.
진짜 천재라는 것은 그저 재능이 뛰어난 자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곳에도 이렇게 노력하고 땀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태자 전하는 확실히 천재였다.
재능 있다고 평가 받는 오르테가나, 자신보다 훨씬.
그렇기에 모용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은 힘들고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전하께서 쌓아오신 것들이 전하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흔들리지도 마세요. 전하는 이미 강하십니다."
이 소년이... 머지 않은 미래에 자신마저도 뛰어넘을 뛰어난 검사가 될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믿겠다. 그대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으니까."
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 생각하면서 모용진은 마주 웃어 주었다.
지금의 태자에게 믿을 수 있는 가족이라고 해 봐야 자신과 황제 폐하, 그리고 황태후 폐하 뿐이다.
저번의 독살 사건은 모용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설마 친동생이 태자를 암살하려 할 줄이야.
모용진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때 모용진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태자는 자기 친동생도 믿을 수 없는 이곳에서...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삶을 사는 것이구나.
그것은 정말이지... 참으로 괴로운 삶이었다.
그런데도... 폐하는 자신을 믿는다 말해주었다.
그 말에 무게를 알기에... 모용진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전하는 저를 믿으십니까?"
"응? 당연히 믿지. 그대는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태자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모용진은 감동했다.
"그대는... 형은 날 살려 줬잖아. 형이 구해 준 목숨이야. 그러니까 난 내가 죽더라도 형을 의심하진 않을 거야."
단호한 그 말이... 모용진의 마음에 확실하게 와 닿았다.
그 순간 모용진은 확신했다.
"그렇다면 저 역시 하나... 여기서 약속해도 되겠습니까?"
"?"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 조금 요령이 없는 귀여운 동생에게 모용진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검을 바치면서 맹세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전하의 검이 되겠습니다."
나의 주군은... 이 녀석 뿐이라고.
모용진은 이미 정했으니까.
"당신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저의 충성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죽는다면 너를 위해서 죽고 싶다.
모용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태자를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의 황제가 아닌, 자랑스러운 가문이 아닌,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모용진은 자신의 모든 걸 바칠 각오를 다졌다.
"그래. 이제부터 넌 내 것이다."
그 대답에 모용진은 웃었다.
그때부터 모용진은 태자의 검이었고, 도구였으며, 절대 변하지 않을 신하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태자가 황제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검.
그게 바로 모용진이었으니까.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검이라... 멋지네요."
여화는 모용진에 대한 황제의 평가를 들으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그만큼 신뢰하는 부하인 거죠?"
"그래."
황제는 덤덤하게 화면 속 병사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어느새 황제의 병사가 협곡 안에 여화의 병사를 몰아세운 형국이 되었다.
"그보다 이제 어쩔 거지?"
황제의 말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대로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협곡 위에서 궁병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화살로 협곡 아래를 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매복해 둔 궁병으로 기습할게요."
"...그러면 아군도 피해를 입을 터인데."
난전 양상이 된 협곡 아래 전장을 보면서 황제가 말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런 지형이면 궁병을 통한 매복이 효과적인 걸요. 다소 피해는 있어도 전투는..."
"전투는 이겨도 전쟁은 지겠지."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전투를 이겼는데 왜 전쟁을 진단 말인가?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쟁은 단순한 숫자 노름이 아니다. 지휘관은 병사를 숫자로 계산하지만 병사들은 숫자가 아니다. 인간이지. 그들에겐... 감정이 있다. 그걸 너무 간과해서도 곤란해."
황제는 덤덤하게 말하면서 판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이렇게 하면 이번 전투는 이겼겠지. 하지만 그다음 전투는? 아군조차 쏘게 만드는 지휘관을, 병사들이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
이 판 위에 병사들에겐 감정이 없다.
그러니 아군이 맞든 쏘라는 가혹한 명령도 묵묵히 따르고, 그에 따른 전투 결과만을 제시한다.
하지만... 실제 전장의 병사들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이고, 감정이 존재하며, 그들의 정신 상태는 전장에 큰 영향을 끼친다.
사기가 내려간 군대는 모래성과 같다.
쉽게 허물어지지. 방금 여화의 판단은 전투를 이기게 할 판단일지 모르나, 군대를 모래성으로 만드는 결정과 다름이 없었다.
모래성이 된 군대로는 전쟁에선 이길 수 없다. 적어도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대는 좋은 참모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좋은 지휘관은 못 되겠구나."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면 어쩌실 겁니까?"
그 평가에 여화가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도 없겠지만... 짐이라면. 그래, 이렇게 배치하지 않을까."
"지휘관이 제일 앞에..."
여화는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지휘관과 후방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의 방진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형의 이점은 전혀 살리지 않은 무모한 진형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휘관이..."
"그래, 짐이 앞에 있지."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제야 여화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짐이 선두에 서서 적들을 베어 버리면, 상대의 진형이 무너지고, 공포에 질려 와해되니까. 사실 짐에겐 작전도, 전술도, 진형도 의미가 없지."
"...."
참으로 오만한 말이다.
하지만 여화는 부정할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금위대 하나로 10만의 야만족을 무찌른 황제의 말이었으니까.
"아무튼 제법 재미있는 놀이였어."
황제는 여화가 가져온 모의 전투판을 돌려주며 말했다.
꽤 흥미로운 놀이였다.
주술을 이용해서 모의 전투할 수 있는 도구라니. 동아족은 참으로 재미있는 걸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흐아암. 끝난 거냐?]
그때 황제의 무릎에 앉아 있던 점박이 고양이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물었다.
"어머, 이제 보니 꽤 귀여운 고양이가 있었네요."
그 모습에 그제야 고양이를 발견한 여화가 고양이를 보며 말하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고양이라..."
[냐! 고양이가 아니다냐!]
"어머 말하는 고양이라니..."
화를 내는 고양이를 보며 여화가 놀란 표정을 짓자 황제는 웃었다.
"묘인이다. 고양이의 모습이지."
놀라는 여화에게 황제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묘인에겐 두 가지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전에 봤던 본 모습.
그게 실제 묘인의 모습이라면... 지금, 이 모습은...
"체력 비축용 모습이라더구나."
묘인은 특이하게도 본래의 모습으로 있으면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그래서 체력을 비축하기 위한 모습이 따로 있는데 그게 바로 이 고양이 모습이었다.
"아, 하긴 이렇게 작아지면..."
여화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 묘인의 체력 비축용 모습인가?
그녀의 눈에는 그냥 귀여운 고양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흥흥! 이게 묘인의 장기다냐.]
금세 기분이 좋아진 케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다시 황제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었다.
"그보다 금위대장은 아직도 복귀하지 않은 거군요."
그런 케르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여화가 묻자 황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이구나."
황제는 왜 이리 조사가 길어지는지 불안 해졌다.
혹시 북부에서 뭔가를 찾아낸 건가?
그렇다면...
'약해지면 안 되겠지.'
황제는 다시금 고개를 드는 불안을 간신히 잠재웠다.
그래, 자신이 믿어 줘야겠지.
모용진은 강하다.
그러니까 분명히 무사히 돌아올 거다.
황제는 그만큼 모용진을 신뢰했기에, 계속해서 밀려오는 불안을 애써 이겨낼 수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