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열한 번째 합궁달리아 키무르다인
* * *
철곡(??).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마를 날이 없던 지역이라 쇠가 우는 곳이라고 불리던 이곳엔 이제 쇠를 두드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찬바람 소리와 짐승의 울음 소리 뿐.
모용진은 그곳에서도 가장 커다란 집의 지붕 위에서 멍하니 설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모용진은 새하얀 눈밭을 보던 눈길을 돌려 자신의 손에 들린 망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목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대장! 농땡이 부리면 오늘 새참 없어요."
그런 모용진의 상념을 깨는 밝은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세르나였다.
그녀는 이곳의 부인들을 도와서 새참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검은 내려놓고는 앞치마를 두른 채 얼굴엔 숯덩이를 묻히고 있었다.
'부하라고 있는 놈이...'
모용진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무사란 놈이 글투족 부인들과 태연하게 고기를 구우면서 자신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저 어이가 없었다.
'뭐... 남말할 처지는 아니네.'
모용진은 망치를 들고 지붕을 보수 중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목수 일을 하는 금위대장이나, 집안일을 하는 백부장이나 상황이 우스운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꽤 오래 있었네. 이곳도.'
모용진은 망치를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여, 철이 우는 곳이라 불리던 이곳 철곡은 생각 이상으로 황폐했다.
다행히 관도에서의 지원이 있어서 지금은 많이 재건된 상태긴 하지만...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고,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용진은 그들이 제대로 정착할 때까지 도와주기로 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은 들었지만...'
이곳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관도에서 있었던 일도 들었다.
한족과 황제의 다툼도, 아버지가 그 주동자로 죽었다는 것도.
모용진은 전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자식된 도리로 장례를 치르는 게 맞겠지만.
딱히 명예롭게 간 것도 아니라서 장례를 치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황제에게 죄를 지어 처형당한 자의 장례를 치르는 건 역모다.
그래서 모용진은 딱히 관도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생각보다 놀랍진 않네.'
모용진은 아버지의 죽음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고, 결국 사고를 쳤다는 감상이려나... 그래서 그런지 모용진은 그의 죽음에도 덤덤할 수 있었다.
툭!
모용진은 가볍게 망치질해서 마지막 못을 박고는 마무리를 지었다.
"이 집은 보수 끝났다."
지붕 수리가 끝난 집을 보면서 모용진이 말하자 세르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런 모용진을 불렀다.
"그럼 와서 식사해요."
세르나의 말에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모용진은 그녀가 건네는 늑대 뒷다리 구이를 먹으면서 물었다.
"추가 지원은?"
"내일 도착한다던데요? 이번엔 목수도 보낸다나 봐요."
세르나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말하자 모용진은 귀찮다는 듯이 세르나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고는 자신이 직접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그리고는 고기를 씹으면서 생각했다.
'그럼 내일이 마지막이겠네.'
모용진은 이제 이곳 생활도 슬슬 마무리 지어야 할 떄라고 생각했다.
목수가 오면 더 이상 자신이 이곳에서 목수 일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이곳에서 이미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모용진은 이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쓸 여유도 없었다.
"이거 누가 했어."
고기를 씹던 모용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니 무슨 소금을 들이부었나?
간이 상상 이상으로 짰기에 모용진이 투덜거리자 세르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요! 맛있죠?"
눈치도 없이 손을 번쩍 드는 세르나의 저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에휴, 넌 결혼 하지 마라."
그래, 이 녀석이 무슨 요리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모용진은 고기를 전부 씹어 삼키고는 황제에게 새로 받은 탐지기를 만지작거렸다.
결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황제의 협박이 떠올랐으니까.
[이번에도 잃어버리면 세르나랑 강제로 결혼시켜주마.]
그는 탐지기를 잃어 버렸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라서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황제께서 직접 하사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도 수치스러운 일인데 황제가 건 조건은 정말이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모용진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엔 절대 탐지기를 잃어버릴 생각이 없었다.
"내일 떠나겠습니다."
"좀 더 머물다 가시지... 아직 보답도 못했는데요."
이곳에서 가장 인망이 좋기로 유명한 마라카프 부인의 말에 모용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시간을 쓰기는 어렵겠습니다."
그 대답에 마라카프 부인은 아쉬워하면서도 더 잡지 않았다.
그녀도 모용진이 자신들을 위해서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광산은 어찌할까요?"
그때 사냥꾼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치된 철광산을 보며 물었다.
모용진은 철곡의 상징이던 낡은 갱도를 보면서 고민했다.
뭔가 수를 써두긴 해야 하는데... 일단 모용진은 이렇다 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내버려 두죠. 나중에 관도에서 사람을 보내서 처리할 겁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한 모용진은 그들에겐 그렇게 일러두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언제 저 광산이 제대로 기능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관도는 관료들을 전부 새로 뽑느라 분주하다.
당장 이곳에 대한 지원이 늦어진 것도 그런 이유도 있었으니까. 아마 저 광산 문제도 빠르게 해결되긴 힘들 것이다.
'사냥은 확실히 잘하고.'
그나마 긍정적인 건 글투족이 정말 뛰어난 사냥꾼들이었다는 것.
광산에 의존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히 이곳에 자리 잡을 경쟁력이 있었다.
그 거대화 된 짐승들이 비정상적이었던 거지 이곳에 온 글투족의 사냥꾼들은 곰마저도 사냥하며 자신감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이곳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모용진은 이곳에 정착하기로 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확실히 그들의 얼굴엔 희망이 보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오늘 자고 내일 일찍 출발할 거다."
자신들에게 배정된 숙소로 걸음을 옮기며 모용진이 당부하자 그런 모용진의 뒤를 얌전히 따라오던 세르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네."
세르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모용진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어쩌다가 이 녀석이랑 같이 다닐 생각한 걸까? 괜한 책임감이었다.
그냥 폐하에게 떠넘기고 할바르랑 다닐 걸.
아니면 크라이스나.
모용진은 확실히 자신의 인선 실수라고 생각하면서 괜히 세르나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주었다.
이러지 않으면 자신에게 정말 화가 날 거 같았으니까.
"돌아오라고? 나 이제 진짜 다 왔는데?"
거리에서 느긋하게 술을 마시면서 관도의 시작을 알리는 대관문을 보며 남자가 말하자 작은 까마귀가 짜증을 냈다.
[돌아오라면 돌아와!]
"아쉽구만... 그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남자는 그 잔소리를 들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잘 즐겼으니까.
인간 세계의 술은 맛있었고, 음식도 최고였다.
그는 불타오르는 듯한 금안으로 대관문을 보았다. 저기만 지나면 관도인가?
확실히...
'확실히... 여기서부터 느껴지네.'
황제가 그의 눈엔 확실하게 느껴졌다.
저기 관도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강렬한 기백.
이것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바보가 아니고서야 알 수 있었으니까.
과연... 형들이 급하게 자신을 호출할 만 했다. 이렇게 멀리서도 그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딱히 자신의 기운을 숨기지도 않았고,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이 이 대륙의 황제임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 기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의 강함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지 한참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기운을 느끼면서 남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패배하면서 신성을 잃은 그는 황제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돌아가야겠다.'
저렇게 강렬한 기백이라면... 자신이 관도에 들어서는 순간 눈치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생각에 미련도 없이 남자가 떠나려던 그때였다.
콰직!
"정답이네. 봐봐! 내가 저놈이 수상하다고 했잖아."
자신감 넘치게 도끼를 휘두른 박철준이 그 도끼를 가볍게 피한 남자를 보면서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거 가지고. 어이, 너. 뭐 하는 놈이냐."
그 모습을 보면서 황보철궁은 남자에게 창을 겨누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뭐지? 이 위화감은?'
황보철궁은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보면서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느낌이... 정말 좋지 않았다.
"흠... 인간들 수준도 많이 올랐나? 확실히 강한 놈들이 많네."
그런 둘을 보면서 중얼거린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많다.
여기서 본 모습을 보이면 끝장.
관도와 가까우니 금방 황제의 귀에 들어갈 거다.
그렇다면...
'튀자.'
남자는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는 황보철궁의 창을 잡아서 그대로 빼앗았다.
"어어?"
순식간에 창을 빼앗긴 황보철궁이 당황하는 사이 남자의 무릎이 그대로 황보철궁의 복부에 박혔다.
"커억!"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몸이 새우처럼 꺾인 황보철궁이 쓰러지는 찰나에 박철준의 도끼가 무방비해진 남자의 등을 노리고 내려쳐지고 있었다.
쩌엉!
'무슨 몸이...!'
폐하도 아니고 도끼가 막히다니?
박철준이 당황하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린 남자가 그대로 박철준을 돌려찼다.
우득!
"큭!"
그대로 갈비뼈를 맞은 박철준은 저 멀리 날아갔고, 그 순간 남자는 바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남자는 이 둘과 길게 싸울 생각이 없었다.
본모습을 내지 않으면 그들을 빠르게 죽일 수 없었고, 시간이 끌리면 정체가 탄로날 가능성이 올라갈 테니까.
그렇기에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쿨럭! 야 괜찮냐?"
피를 토해내며 황보철궁이 박철준을 걱정하자 박철준이 짜증을 냈다.
"갈비가 나갔는데 괜찮겠냐! 아구구... 그보다 저 녀석 대체 뭐야?"
그때 주막에서 보고 느낌이 좋지 않아서 계속 뒤를 쫓았는데...
새와 이야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수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덮쳤는데 역으로 당할 줄이야.
완전히 계산 착오였다.
이렇게 강할 줄 알았으면 다른 금위대원들과 같이 왔을 거니까.
"...이건 보고 해야겠지?"
상비해두던 약을 마시면서 황보철궁이 묻자 박철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곳에 있는 금위대의 거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잡는 건 실패했으니까... 적어도 저 남자에 대해서 보고라도 해야 했다.
"금안의 수상한 남자. 이거 짐을 저격한 보고인가?"
황제는 자신에게 날아든 보고를 보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검은 머리에 금안.
황제의 특징이기도 했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보고를 들고 온 미령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묻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건 그저 농이고 사실 보고에 문제는 없었다.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금안의 수상한 남자라... 확실히 뭔가 걸리는 자군."
새와 이야기하다니 주술사인가?
주술 중에는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주술도 있다니까...
"동물과 이야기할 수 있는 마법은?"
마법을 확인해봐야겠지.
이 일로 조언을 듣기 위해 자는 걸 깨워서 데려온 마리아에게 황제가 질문했다.
그 질문에 마리아는 잠시 졸린 눈으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대답했다.
"흐아암... 그런 게 있으면 본녀가 써 보고 싶구나."
마리아의 명쾌한 대답에 황제는 일단 그 남자가 마법사일 가능성을 지웠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도 모르는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있다는 가정보단 그냥 이름 모를 뛰어난 주술사가 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었으니까.
"아무튼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군."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보고서를 정리하고는 겸사겸사 다른 업무도 처리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합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안 가 봐도 되느냐?"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밤에 불려와서 그런지 조금 졸린 듯한 얼굴인 마리아가 질문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갑자기 찾아온 미령이 이 보고서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합궁을 위해 침소로 향했을 것이다.
"그럼 가 봐야겠군. 그들에겐 계속 조사하라고 전서구를 보내도록."
황제는 그 말에 더 미룰 수는 없겠단 생각에 일단 자신의 전언을 적어서는 미령에게 건넸다.
그들은 보고를 위해서 아마 거점에 머물러 있을 테니 그쪽으로 전서구를 보내면 바로 연락할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저 정도면 일 중독이군."
그런 미령을 보면서 황제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며 말하자 마리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는데 쓰는 황제가 할 말인가 그게?
심지어 지금도 틈새로 일하고 있지 않은가?
마리아는 그런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황제는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했다.
"협조 고맙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 언제든 본녀가 필요하면 부르거라!"
예상 못한 감사 인사에 마리아가 부끄러워하자 황제는 그런 그녀에게 궁녀를 붙여주고는 침소로 향했다.
'달리아 키무르다인이라.'
그녀는 과연 어떤 여인일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