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짐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 * *
"그렇다면 한족에서 합궁 상대로 누구를 보낸다 하더냐?"
이번엔 한족의 차례였으니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통해서 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을 터.
황제는 사직 상소를 천천히 읽어보면서 질문했고 재상은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박가의 여식입니다. 박미령이라 하는 여인으로..."
확실히 이름을 들으니 한족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 그 박가의 수장을 데려오거라."
박가는 그리 힘이 있는 가문이 아니다.
즉 한족에선 노골적으로 유력 혈족을 주기 싫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고, 황제는 그렇다면 박가의 뜻을 확인하고 싶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보낼 사람조차 없으니 결국 직접 움직이기로 한 재상을 보면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녀를 보내자니 그 격이 떨어졌고, 그렇다고 무사를 보내자니 부정적인 의도로 보일까 우려되었기 때문일까?
황제는 재상의 행동을 이해해주면서 뒤에서 얌전히 따르고 있는 상선에게 말을 걸었다.
"상선."
"내시부에선 사직 상소를 제출한 자가 없어서 여유가 있습니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의도를 바로 파악한 상선의 명쾌한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명부에서도 별다른 인원 공백은 없으리라. 그리고 군부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대장군이 멀쩡히 출근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일 테니까.
"대장군."
"넵!"
황실 상황을 파악하고 굳어 있던 대장군을 보면서 황제는 덤덤하게 명령했다.
"사직 상소를 제출하면서 장부는 어찌 되었나?"
장부만 남아있으면 사실 인원을 새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니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가져갔습니다."
역시.
이럴 줄 예상했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말했다.
"장부를 가져와라. 저항하면 그냥 끌고 오도록. 금위대와 함께."
황제는 덤덤하게 명령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폭거.
사직 상소까지 쓰면서 칩거한 대관들에게 이런 짓을 벌인다면 선비들의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장군은 순순히 그 뜻을 따랐다.
황제가 그것을 원한다면, 따라야 하는 것이 바로 무관의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일하는 동안 할 일이 없어진 황제는 길을 걸었다.
"웃겨. 빈이 되었다고 으스대던 모습도 이젠 끝이네?"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에 황제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황을 보니 설화 빈이 성질 한 번 사나울 거 같은 여성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있었다.
황제가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주가의 차녀인 주진화였으니까.
그렇기에 황제는 이 상황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녀가 왜 차녀에게 맞고 있단 말인가?
"사생아 따위가..."
그때 주진화가 짜증이 난 얼굴로 설화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 주가의 장녀치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더니...'
황제는 그제야 조금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빈은 명문가의 장녀라고 보기엔 평상시에 행실이 너무나도 가벼웠고, 먹는 것에 유독 집착하던 모습도 명문가의 여식답지 않았다.
게다가 나름 가문에서 빈이 나왔으면 그녀를 챙기던 시녀 정도는 궁녀로 보내거늘 그런 것도 없었고...
그제야 황제는 왜 그녀가 왜 장녀이면서 동생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너 같은 건 이제 끝장이야! 당장..."
터억.
황제는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녀를 때리려던 손을 잡았다.
"누구야! 대체..."
뒤에서 자신의 손이 잡히자 진화는 화를 내려던 것을 멈추고는 황제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귀찮다는 듯이 쳐 내고는 설화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엉망이구나."
"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설화가 덜덜 떨면서 감사를 표하자 황제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의 얼굴에 묻은 침과 피를 닦아주었다.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던 진화는 당당하게 외쳤다.
"여인들의 일입니다!"
"황궁의 일이고. 짐의 일이다."
싸아악!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주진화가 몸을 떨었으나 곧 자신감 넘치게 외쳤다.
"아버님께 다 들었사옵니다! 황제는 이제 끝이라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황제는 지금 한족과 척을 진 상황이며, 몹시 위태롭다고, 그러니까 자신에게 아무런 짓도 못할 거라고! 그녀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애초에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니까.
"...그래, 그렇다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순진하고,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다니.
그녀 스스로 명분을 주었으니 황제는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한 번 네 아비를 보고 싶구나."
황제는 웃었고, 주설화는 그 웃음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주진화만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예상하지 못한 채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물러..."
"주 가문. 전원을 끌고 와서 짐 앞에 묶어둬라. 반항하면 죽여도 된다."
"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자 주진화는 당황했다.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인지 알아요? 지금 당신 한족으로 완전히 적으로..."
꽈악!
황제는 그녀의 목을 가볍게 쥐며 웃었다.
그녀는 황제의 그 가볍게 쥔 행동에도 자신의 목이 꽉 졸린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니지. 그대의 지금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딱 몸을 데우기 좋은 재료가 아닌가.
주 가문의 수장은 주진모이던가? 이부의 장관으로 알고 있는데 마침 오늘 가장 먼저 사직 상소를 제출한 자이기도 했다.
"짐이 그들을 적으로 돌린 게 아니라. 그대가 지금 짐을 적으로 돌린 거다."
오싹!
주진화는 황제에게서 느껴지는 은근한 살기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그걸 보면서 황제는 그녀를 놓아주고는 말했다.
"그 의미를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겨두거라. 끌고 와서 저기에 묶어두어라. 빈은 짐과 함께 걷지."
"네, 네."
주설화가 떨면서 대답하자 황제는 주진화가 기둥에 묶이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무사들이 주 가문의 전원을 포박해 오는 것을 기다렸다.
무사들은 반항하는 주진화를 두들겨패서 얌전해지게 만들고는 기둥에 그녀를 묶었다.
'자, 언제 오려나.'
황제는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앉은 채 상선에게 이것저것을 명령하며 무대를 준비했다.
주 가문이라... 본격적인 숙청을 시작하기 딱 좋은 재료였다.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선 얼굴엔 멍까지 든 상태로 당당하게 외치는 주진모를 보면서 황제는 피식 웃었다.
"이럴 수 없다?"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황제가 웃는 얼굴로 되묻자 주진모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는 자신이 명분을 쥐고 있다고 믿는 듯 했다.
"폐하께서는 진정 폭군이 되시려는 겁니까! 그 어떤 황제도..."
"이러지 않은 게 아니라 이럴 수 없었던 거겠지. 그보다 짐은 그저 궁금해서 자네의 가문을 이곳에 부른 것이다. 너무 걱정하진 말도록."
냉정할 정도로 차갑게 말을 자른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선 직접 주진모의 앞으로 갔다.
꽤 큰 체구, 검기를 쓸 수 있는 실력자.
"제압하려면 고생 좀 했겠구나."
무사들이 제법 고생을 헀으리라. 그렇기에 황제가 그 사실을 언급하자 무사가 감격한 얼굴로 대답했다.
"할바르 백부장이 직접 제압했습니다."
무사의 보고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바르는?"
"다른 가문으로 갔습니다."
그 녀석도 바쁘겠구나.
황제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한 주진모의 턱을 잡고는 홱 돌리며 말했다.
"저기 보이나? 그대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지, 진화야!"
주진모는 그제야 진화를 보고는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고작 사직 상소로 이리 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정녕 인간..."
분노한 얼굴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그를 보면서 황제는 그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득!
"!!!"
황제는 그 턱을 쥐어서 으깨버리고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주진모를 내려다보았다.
"그걸로도 잡아 오려고 했다만... 이번엔 다른 이유라네. 그대의 딸이 이러더구나. 짐의 천하가 끝이 났다."
"으! 으으으!"
주진모는 그 과격한 발언 수위에 당황했고, 황제는 덤덤하게 웃었다.
"너무 대놓고 역모 발언을 하기에 한 번 물어보고 싶어서 말이다. 아, 턱이 부러졌으니 말을 못 하겠구나."
황제는 무뚝뚝한 얼굴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에게 명령했다.
"치료해라."
"예, 예..."
덜덜 떨면서 다가온 의원이 완전히 으깨진 턱을 그 귀한 약물로 치료해냈다.
"모함! 모함입니다! 결코 저흰 그런 뜻은..."
주진모는 덜덜 떨면서 무릎을 꿇고는 피가 날 정도로 땅에 머리를 박으면서 말했다.
"제, 제 딸 아이가 아직 어려서 실언을 하였나봅니다. 결코 역모의 뜻은 없었습니다. 부디... 부디..."
"...아, 아빠?"
진화는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당당하게 황제조차 자신들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말하던, 황제의 시대는 곧 끝날 거라 말하던.
당당하고 강인하던 아버지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한 명의 나약한 남자가, 겁에 질린 채 애걸하는 모습만이 있었다.
주진화는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직 상소에, 장부를 들고 칩거하며, 그대의 딸은 역모성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짐의 빈을 폭행하였는데... 이게 전부 오해고 역모의 뜻이 없었다? 흠..."
콰득!
"윽!"
"그대는 짐이 자네의 딸과 같은 바보로 보이나?"
"아, 아닙니다!"
주진모는 황제가 가볍게 그의 무릎을 밟아서 으깨버리자 비명을 필사적으로 눌러 참았다. 지금은 그 어떤 고통도 인내하며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저기 그대의 딸이 있지. 다른 딸이야. 사생아였다지."
"그, 그렇습니다."
주진모는 황제가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 저 아이의 대답에 따라서 그대의 운명이 달라질 거야. 빈. 이 자는 그대의 아버지가 맞는가?"
황제의 질문에 설화는 당황했다.
설마 자신에게 이런 화살이 날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니까.
"네?"
"그대의 아버지가 맞는가?"
황제는 편하게 말하라는 듯이 자상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 번 물었고, 주설화는 그 질문에 눈을 잠시 감았다.
"그, 그것이..."
주설화는 눈을 감고는 그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길거리에서 생활하던 자신을 여인이라면 쓸 곳이 있을 거라면서 어머니한테서 빼앗아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밥은 하인들과 같은 것을 먹었고, 못 먹을 때도 많았지만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던 모습도 떠올랐다.
성인이 되자 자신에게 상단주와 계약을 위해서 하룻밤을 자 달라 부탁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다.
황태후 폐하의 눈에 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는 상단주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설화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설화야! 내가 네 아비다! 널 먹여주고! 길러 주었거늘! 이 은혜도 모르는 것이냐!"
덜덜.
주진모가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설화를 보자 설화는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황제는 주진모의 눈을 그냥 뽑아버렸다.
푸아악!
"빈이 겁을 먹는구나."
황제의 덤덤한 말에 고통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내던 주진모는 덜덜 떨면서 다시 머리를 박았다.
"폐, 폐하의 하해와 같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빈 전하께 무례가 되지 않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읍하였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주진모는 끝까지 비굴하게 나왔다.
그러나 그 속까지 비굴하진 않았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된다. 넘기면 바로 군사를 모아서...'
이번 건 아무런 준비도 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병사들을 모은다면, 한족이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면 분명 다를 것이다.
주진모는 그리 믿으면서 이번 위기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황제가 말했다.
"최근 짐이 자비를 베풀어 주니까 이리 방자하게 나오는구나 싶더구나. 그래서 그 자비를 받았던 자에게 처벌을 결정하라 시켜볼 생각이다. 어떤가 미친왕. 그대는 이들을 어찌해야 한다고 보나?"
미친왕은 황제의 부름에 유폐를 끝내고 나와서는 눈앞에 광경을 보고는 올 게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문관들은 이래서 문제다.
황제의 무서움을 모른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미친왕은 이젠 자신이 황제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너무 자비로운 것도 문제가 되는 걸 이 미미한 아우도 느꼈사옵니다. 그러니... 지금은 지엄한 법도대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미친왕은 법도대로 할 것을 주장했고, 황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역모의 죄. 군신이 역모를 저질렀을 때 하는 처벌은 무엇인지. 그래도 한 부서의 장관이었던 자니 알고 있겠지? 형부의 장관은 아니라도 말이다."
"그, 그것은..."
황제의 말에 주진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군신이 역모를 범할 경우엔...
법도대로 처리하자면...
"가마솥을 가져와서 기름을 채워라."
팽형이었으니까.
황제의 명을 들은 주진모는 발악하듯 외치려 했으나 황제는 그 턱을 걷어차서 부숴 버렸다.
"농이다. 팽형은 아무래도 준비할 게 많으니... 귀찮구나. 어차피 죽여야 하는 건 똑같지 않느냐."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진모를 보았다.
턱이 부러진 채 죽어 있는 그를 보면서 황제는 혀를 찼다.
"고작 그걸로 죽어 버렸나. 자, 어떤가?"
황제는 덜덜 떨고 있는 주진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짐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의 무게란다."
자신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며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 주진화는 덜덜 떨었다.
그토록 강하게 느껴지던 아버지는... 저 아름다운 황제 앞에선 그저 쉽게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쯧. 흥이 식었구나."
푸아악!
그 모습을 재미없다는 듯이 보며 혀를 차던 황제가 기운을 발산하자 이곳에 묶여 있던 주 가문의 사람들 전원이 몸이 찢어져서 죽었다.
주진화는 그 광경을 보면서 비명을 질렀고, 설화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미친왕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여자는 어찌할까요?"
살아남은 주진화를 보며 무사가 묻자 황제는 웃었다.
"저들의 역심을 알려 준 증인이 아니냐. 그냥 풀어 주거라. 다만 빈을 폭행한 죗값은 치러야겠지. 장형 10대로 끝내고 보내도록 해라. 나머지 병사들은 주 가문의 재산을 환수하고, 그들이 들고 간 장부를 찾아오도록."
"존명!"
그 말에 병사 둘은 주진화를 끌고는 사라졌고, 무사들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주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주 가문의 시체들은 다른 병사들이 빠르게 와서는 치우기 시작했다.
"한족들은 전부 수도에 머물고 있어서 참으로 편하구나."
황제는 그 빠른 일 처리를 보면서 웃었다.
아직 황제는 피가 부족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