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야화(?花)
* * *
"...폐하의 선택에 소첩이 이 이상 질투해선 아니되겠지요."
모든 거사가 끝나고 황제의 품에 다소곳하게 안겨 있던 세헤라자드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언젠가... 폐하의 선택이 소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사옵니다."
"짐은..."
황제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어렵구나."
어찌해야 하는 걸까?
이런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자기 선택이 잘못되었던 걸까?
황제는 지금까지 자기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지금은... 폐하께서 그리 생각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안겨 오는 세헤라자드를 보면서 황제는 잠시 고민했으나 곧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체온은 신기할 정도로 따스했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며 서서히 잠에 들었다.
"대장. 술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기 있기?"
모용진은 느긋한 말로 자신을 깨우는 여인을 보고는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세르나 백부장."
7척 정도의 조그마한 키,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더 열 받게 만드는 여자.
그래도 어른스러운 몸매가 그나마 녀석이 성인 여성이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는 귀여운 얼굴의 여인이 모용진을 내려다 보면서 실실 웃고 있었다.
"술 마시고 자다니 뭔 개소리야."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 망할 부하를 향해 모용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왜 도시 밖으로 나와서 길거리에서 자고 있어? 아! 머리 풀어졌다."
파슬리가 떠오르는 초록 머리를 뒤로 묶으면서 여인이 웃는 얼굴로 묻자 모용진은 그제야 자신이 길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게?"
왜 여기서 자고 있었지?
모용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하고 있을 때 세르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모용진의 소매를 잡았다.
"대장. 그거 알아? 너무 취하면 기억에 혼선이 오기도 한데."
킥킥 웃으면서 세르나가 말하자 모용진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했다.
"...세르나 백부장. 그건 감봉을 각오하고 하는 발언이겠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모용진이 싸늘하게 말하자 세르나는 그제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잘못했어요. 감봉은 말아 주세요. 저 요번에 새로운 검 하나 구하기로 했단 말이예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비는 세르나를 보면서 모용진은 혀를 찼다.
"쯧! 그러면 성과나 이야기해. 뭔가 발견한 건 없나?"
'꽃?'
주변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모용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치 머릿속이 지워진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으음! 어젯밤에 취해서 칼부림을 벌인 거구의 남자 이야기는 어때요?"
이 새끼가?
모용진은 그 거구의 남자가 자신을 말하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 거구의 남자한테 한 번 두들겨 맞아볼래?"
"으음! 그, 그럼 제천에서 알아주는 맛집..."
따악!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
혹이 날 정도로 녀석에게 딱밤을 때려 준 모용진은 이곳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면서 말했다.
"여긴 다른 녀석들한테 맡기고 우린 다음 지역으로 가자."
대충 녀석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기고는 모용진이 말하자 세르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대장 저 좋아해요? 미안해요. 대장. 대장은 잘생겼지만 전 아직은 혼자가 편하거든요. 하, 하지만 정 저를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따악!
헛소리를 지껄이는 세르나에게 다시 한번 딱밤을 먹여 준 모용진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널 수도에 두고 할바르와 나올 걸 그랬어."
"아니! 그 털북숭이보단 그래도 화사한 저 아닌가요? 대장! 대장!"
시끄럽게 쫑알대는 이 년의 입에 칼을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모용진은 그대로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이동했다.
이 철없는 망아지 놈은 꼴에 백부장이라고 자신과 폐하 말고는 제어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탐지기는 또 언제 없어진 거야?'
진짜 취해서 그런 건가?
모용진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여전히 사방에 피어 있는 꽃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주었다.
묘하게 낯이 익은 꽃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저희 이젠 어디로 가요?"
아예 힘까지 빼고 자신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던 세르나의 질문에 모용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대답했다.
"관북으로 가 볼까?"
"에엑! 거기 좀 추워서 싫... 아하하! 가야죠. 당연히."
모용진의 싸늘한 시선에 급하게 말을 바꾼 세르나는 얌전히 그에게 끌려가며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흑, 관도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모용진은 그 말에 공감해주었다.
확실히... 그 역시 제국의 수도인 관도가 그립긴 했으니까.
"그러니까 임무 끝나면 술 사줘요."
"..."
아니 앤 진짜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게 구는 거지?
모용진은 녀석의 배짱에 기가 막혔으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시끄러운 녀석이 그걸로 닥쳐준다면 이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주마. 사줘."
"진짜죠? 약속했어요?"
신난 얼굴로 말하는 녀석을 보면서 피식 웃은 모용진은 그대로 녀석을 질질 끌고 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이다. 그러니까 정보나 제대로 구해 봐."
"네! 저 열심히 할게요."
완전 의욕을 되찾은 녀석을 보면서 모용진은 일단 안심했다.
보기엔 이래도 백부장 중에서는 검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놈이니... 열심히 일하겠다 마음먹은 순간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것이다.
모용진은 그리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아침부터 사주세요! 저 배고픈데 대장 찾느라 아침도 못 먹었단 말이예요!"
"..."
아닌가? 도움이 전혀 안 될지도 모르겠다.
모용진은 왜 자신이 할바르를 황궁에 놔두고 이 녀석을 데리고 온 거지?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고는 일단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녀석을 반드시 황궁에 두고 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밤에 피는 꽃을 조심해라.
달빛을 받아 더욱 화려하게 피어나는 야화는 요괴들의 꽃.
인간을 잡아먹는 한밤의 꿈이니...
"요괴의 꽃이라..."
사직을 준비하면서 틈틈히 요괴에 관련된 사료를 살펴 보던 황제는 신기한 구절을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야화가 이런 뜻이었나?
정보가 하나 늘었다.
'다른 쓸만한 정보는 없나?'
황제는 사료를 뒤적거려보았으나 딱히 그럴듯한 정보는 없었다.
최근 들어 황제는 요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사실 황해 사건의 배후로 이미 과거에 사라졌다는 요괴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요괴.
혹은 마물이라고도 불리는 영험하고, 사특한 존재들.
황제는 이 기이한 사건에 그들이 개입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증.
사라졌던 존재들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만큼 뜬금없는 것은 없기에... 황제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만 있을 뿐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정보를 구해 오면 좋겠군.'
그래서 금위대를 풀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모용진에게 요괴를 탐지할 수 있는 탐지기까지 하사한 것이었는데...
아직까진 별다른 성과는 없는 모양인지 보고가 없었다.
'요괴가 아니면 가장 좋겠지.'
이것이 그저 기우라면 좋을 터인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일단 읽던 책을 덮었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계십니까?"
한참 옆에서 서류를 파악하고 있던 나르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오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다. 그보다 황태후께서 부르시던 거 같은데..."
분명 황태후의 교육이 있지 않았나?
황제가 그런 생각에 질문하자 나르타가 더욱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 이미 다녀왔답니다. 모르셨는지요?"
아...
황제는 그제야 벌써 시간이 3시간이나 지났다는 걸 깨닫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료를 조사하는 데 심취해서 시간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안하군. 짐이 조사에 너무 심취해 있던 모양이구나."
"아뇨... 그보다 요괴에 대한 자료를 그리 찾아보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여전히 걱정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나르타의 질문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단지 걸리는 게 있어서 조사하고 있었느니라. "
아무튼 이 이상 조사해 봐야 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어 보였기에 황제는 읽던 사료들을 정리하고는 다시 상소를 읽기 시작했다.
"사직을 치르는데 아직도 황후가 없는 것은 황제의 부덕함 탓이라... 틀린 말은 아니구나."
말이 상소지 사실상 황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무거나 지껄이는 의견 배출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저질 상소도 흔히 있었다.
비난만 하고 딱히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 쓰레기 상소.
하지만 저런 상소를 올린 선비를 함부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 상소문을 처벌하는 순간 과거 주문제와 같은 폭군이 될 거냐면서 사방에서 상소문이 빗발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덤덤하게 그냥 넘겼다.
"최근 관도에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짐의 잘못인가? 그럴 수 있지. 관북에서 눈이 심하게 내려 사람이 죽었다? 안타까운 일이군. 현에서 벌어진 끔찍한 수탈을 고발한다... 흠, 이게 사실이라면 감찰관을 보내야겠구나."
황제는 그 상소들을 읽으면서 몇 개는 대충 흘러 보고, 몇 개는 친히 답장을 써 주었다.
예를 들면 황제의 눈이 잘 들지 않는 지방에서 일어난 수탈이라던가, 채용 시험에 있었던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 같은 것은 황제 입장에서도 조사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상소였다.
"서류 숙지는 잘되어가고 있는가?"
"네? 아, 에..."
대답에 자신이 없는 걸 보니 꽤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기에 황제는 그런 나르타를 위로해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대가 여기서 밤을 세우더라도 짐도 같이 있어 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황제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상소문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나르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재상은 최근 사직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집무실엔 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 방에 있는 것은 황제와 나르타. 그리고 상선 뿐이었다.
"잠시 쉬도록 할까?"
시계를 본 황제가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묻자 나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네요. 식사를 같이 해도 되련지요."
나르타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나가서 숨을 돌리고 싶었다.
"같이 해야겠지. 이동할 시간도 아까우니 오늘은 여기서 준비하라 지시해 두겠다."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탈출 시도는 눈치 없는 황제의 배려에 좌절되었다.
나르타는 그게 불만스러우면서도 이를 악물고는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
황제는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그녀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르타는 그 뒤로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황제는... 왜 갑자기 나르타한테 불만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