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34화 (34/235)

〈 34화 〉 여섯, 그리고 일곱 번째 합궁­리사 오페아, 니사 리페이아

* * *

"...폐하께서 친정하시고, 관서 지방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재상의 말에 황제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서두를 깔아두는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다.

"과인의 부덕함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

"허나 합궁이 미뤄진 것은 크나큰 문제입니다. 조만간 있을 사직을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방책을 마련해야 하는 바... 다행히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마련되었습니다."

"..."

뭐지?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황제는 그런 생각하면서도 재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페아 가문과 리페이아 가문의 일은 알고 계십니까?"

"들은 적이 있지. 카이아족의 오페아와 발카족의 리페이아 가문의 결합은 꽤 유명하지 않았나."

두 민족의 대표 가문의 결합은 화제를 모으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렇게 결합하여 낳은 자식이 쌍둥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렇게 낳은 쌍둥이가... 각자의 가문으로 갔던가? 한 명은 오페아 가문에 다른 한 명은 리페이아 가문에서 맡기로 했던 건 태자 시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쌍둥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황제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재상의 입이 열렸다.

"맞습니다. 이번 합궁에는 두 가문이 합심하여 대표로 쌍둥이를 보내 왔습니다. 한 번에 두 번의 합궁을 할 수 있으니... 일정을 단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황제는 갑자기 피곤해지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씻고 싶지가 않았다.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짐은 늘 생각한단다."

황제는 읽고 있던 상소를 내려놓으면서 작게 푸념했다.

"저들은 어쩌면 짐을 복상사로 죽게 만들려는 게 아닌지 말이야."

"폐하. 신이 그것을 우려하여 좋은 보양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

재상의 대답에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칭찬을 입에 담았다.

"하하. 정말 재상은 이 나라의 보배로다. 감사히 먹도록 하지."

말과 다르게 황제의 속은 타 들어갔으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재상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합궁을 위해 오늘 밤 침소에 준비해 놓겠습니다."

"..."

이건 의무다. 이건 의무다. 이건 의무다.

황제는 속으로 몇 번을 되뇌이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막내야. 너 그래서 여자는 만나겠냐?]

"...질리도록 만나는 구나. 이 망할 놈아."

그 친구의 장난스러운 말을 떠올리면서 황제는 중얼거렸다.

이젠 죽어서 듣지도 못할 놈이지만 할 말은 해야 했으니까.

­­

"어, 언니 괘, 괜찮을까?"

푸른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어둔 여인은 그 순박한 눈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똑같은 얼굴의 여인은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 보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떨지 마! 우린 가문의 대표로 이곳으로 온 거라고, 언제까지 우는 소리를 할 건데? 니사."

"어, 언니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먼저 할 테니까. 내가 하는 걸 보고 잘 따라 하는 거야."

여전히 겁먹은 니사를 위로해주면서 그녀는 궁녀들을 따라가서 치장을 받고 나왔다.

'실패해선 안 돼.'

리사는 각오를 다졌다.

노릴 거면 당연히 황후의 자리다.

자신이 아니면 동생이어도 된다. 어느 쪽이든 황후가 될 수 있다면...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지금의 황제가 태자이던 시절부터 옆에 서면서 카이아족의 실권을 잡은 아버지도 기뻐해 줄 테니까.

리사는 반드시 황제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황후가 되어 권력을 쥐겠다던가, 꿈을 이루겠다는 거창한 생각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칭찬을 받고 싶다는 조금 유치한 마음에 나온 생각이었다.

­­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보양식을 먹고 있던 황제는 눈앞에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을 보면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조금 눈가에 주름이 있긴 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특히 검은색 수수한 한복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굴곡마저 야하게 느껴지는 묘한 매력의 여인이기도 했다.

그 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는 체할 거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말했다.

"아니면 누님이라고 불러드릴까?"

황제가 그런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질문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가문의 아이를 데려오는 김에 잠시 들린 것인데... 실례가 될지요."

그가 바로 황제의 이복 누이이자, 황제의 손에 친동생을 잃고, 오페아 가문으로 팔리듯이 보내진 장녀.

리아 오페아였다.

황제는 그녀의 친모가 카이아족 출신이라 그쪽으로 보내주었거늘... 배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가 황제를 보는 눈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대한테 존대를 들으니 참으로 거북하군. 예전처럼 말해라."

"그래? 그렇다면 사양하진 않으마."

그녀는 그 말에 바로 태도를 바꾸더니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민이 녀석한테 한 짓을 들었다. 내 동생은 잘도 찢어 죽이더니 그 아이는 그래도 살려 두더구나. 친동생이라 이거냐?"

"흠, 말은 바로 해야지."

날이 선 그녀의 말에 황제는 덤덤하게 입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 이유는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우가 죽어야 한 이유는 그 아우의 지지 세력이 그대였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의 동생은 사실 남자라는 걸 제외하면 죽일 이유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미친왕과 동급. 그저 주색잡기나 할 줄 아는 놈이었지.

그런데도 황제가 그를 가장 먼저 처리한 건, 그런 그를 지지하는 존재가 바로 그의 친누나인 리아였으며, 그녀와 짜고 감히 군사를 통한 암살까지 획책했기 때문이었다.

오페아 가문의 협조가 없었다면 그 암살은 실제로 성공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오페아 가문으로 팔려 나가고, 그녀의 동생은 목이 잘려야 할 이유기도 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야. 내가... 내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참극은 없었을 터인데."

그리 말하며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그런 원망은 이미 익숙했다.

자신을 노린 자들이 자신이 죽지 않은 것에 헛된 원망을 하는 것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였으니까.

"너만 죽었더라면!"

"다른 이들이 황위에 올라 짐이 했던 짓을 하였겠지. 차이라면 그 세계에선 짐을 따르던 대신들의 목이 걸리는 것 정도이려나?"

황제는 싸늘하게 대꾸했고, 그녀는 발악하듯 외쳤다.

"우린 너 같은 괴물이 아니야!"

발악하듯 외치는 그녀를 보면서도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러워서. 황제는 속에서 뭔가가 꿈틀대는 걸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괴물이다. 다른 형제라면 다를 수 있어도, 짐은 알아. 그대는 짐과 같은 괴물이다. 장담하지. 그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달랐을 거라고?"

황제는 싸늘한 눈으로 누이를 보며 말했다.

"달라지는 건 없다네. 죽는 사람이 달라지는 것일 뿐, 그대가 황제가 되던, 짐이 황제가 되던. 누군가는 죽어야 했고, 짐이 황제인 세상에선 누군가가 아우였을 뿐이지."

"..."

그녀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남자로 태어나 태자 자리에 있었다면, 그래서 황위에 올랐다면... 저 자식을 안 죽일 수 있을까?

저렇게 위협적이고, 무서운 아우를? 심지어 그의 뒤엔 한족이 있지 않은가!

아마 반드시 숙청을 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하니 그녀는 자신은 그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황제가 되고 싶으면 짐이 태자일 때 빼앗으라고."

황제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아주, 아주 예전부터 이미 경고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황위는 포기하라고. 짐이 황제가 되었을 땐 황위를 거부하던 테자가 아닌, 황제로서 판단하고 행동할 거라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력을 키우고, 반란의 의지를 불태웠으며."

황제는 그녀의 떨리는 눈을 전혀 피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의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짐을 암살하려고 한 건 그대들이지 않나?"

"..."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늘 이랬다.

이 녀석의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자기 말은 그저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어서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벌이고도 그대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그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전리품이면 전리품답게 살다 죽어라. 짐은 비루한 패배자에게 그것 이상의 배려는 줄 수 없으니까."

그 말에 그녀는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건... 그에게 충성을 바친 가문에게 전리품으로 하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황실의 피만큼 충신들에게 좋은 선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황실의 피를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그 사실을 거부했다.

하지만... 황제의 말은 그녀를 그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로 끄집어내렸다.

"아직도 꿈을 꾸었나? 그대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면 태자 시절에 짐이 그러했듯 황위라도 덜컥 양보해주리라 믿었나?"

"아, 아니... 난..."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떠넘겼고, 그대들이 짐을 속박했어! 이 좁아터진 새장에 짐을 가둔 것이 누구지?"

결국 참아왔던 무언가가 황제의 안에서 터져버렸다.

분노.

그녀는 황제의 눈에서 격렬한 분노를 읽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첫 암살 시도가 들켰을 때도, 미친왕의 첫 배신에도, 형제들이 작당 모의하여 음식에 독을 넣었을 때도, 이 정도로 화를 내지 않았던 황제가 처음으로 격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짐은 원하지 않았어! 이딴 자리. 피로 피를 씻어야 지킬 수 있는 이 좁고 지저분한 새장 따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것은 처음으로 황제가 내비친 진심.

그리고 황제에 오르면서 지금까지 꾸욱 누르고 참아왔던 감정들이었다.

"그대들이 짐을 잡아 넣었어. 그러고는 그 새장에 억지로 적응하려던 새에게 독을 집어넣었지. 그 새장을 내놓으라고. 그 새장이 탐나면 새를 풀어 주진 못할망정 죽이고 빼앗으려 들었지. 무도한 놈들."

그런 게 형제란 말인가?

아무리 반만 피가 섞였다고 해도 형제였는데... 모두가 당연하게 황제를 죽이려고 했고, 아무도 괴물 같은 황제가 그것에 상처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상처를 받았다.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내색하지 않았을 뿐, 덤덤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뿐.

황제도 인간이었기에 이미 마음은 만신창이였다.

그에게도 당연히 감정이 있었고, 형제들이 자신을 괴물처럼 보고 죽이려 드는 사실에 화도 났으며, 슬프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대들은 짐을 원망하지. 왜 죽지 않았냐고. 짐은 그저... 검을 휘두르면서 전장에서 죽고 싶었는데... 왜 그대들은 짐을 고작 독 따위로 죽이려 드는 게냐. 이젠 짐에게 드는 독이 없을 지경이 될 정도로... 그대들에게 짐이 그리도 잘못을 했단 말인가."

"..."

"하하... 하하... 대답을 않겠지. 그대들에겐 짐의 존재 자체가 잘못일 테니까."

황제는 웃었다.

웃지 않으면 더 미칠 거 같았으니까.

"그대들이 보낸 독과 살수를 보면서 짐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

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짐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미워한다면, 그 미워할 이유를 만들어 주자고,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죽였지. 형제들을 내 손으로. 솔직히 말할까?"

황제는 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꺽."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그녀의 목을 잡은 채 그대로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부질 없었다.

"짐은 사실 그대도 죽이고 싶어. 마음 같아선 살려 둔 형제들도 죽이고 싶다네. 그게 본심이야. 알고 있나? 짐은 이곳보다 전장이 좋았어. 적에게 언제 죽을지 모를 전장이, 가족들에게 언제 살해당할지 모를 황실보다 더 편안하고 자유로웠거든."

그래서 자신은 아직도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마음은 그곳에서 맴도는 건지도 모른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땅에 쓰러진 채 간신히 얻은 호흡할 권리를 맘껏 누리고 있었다.

"켁! 켁!"

"그러니 살고 싶으면 짐의 눈에 띄지 말게. 이건 진심이야."

황제는 도망치듯이 떠나는 그녀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그리운 전장의 풍경이 떠올랐다.

[막내야! 이 형님 멋지지?]

"...여기선 장남인데 거기선 막내였구나."

황제가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막내라...

차라리 그랬으면 이곳에서도 좀 더 편했을까?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왜 웃는지 그 이유는 자신도 몰랐지만 그냥 웃었다.

정말이지 최악의 날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