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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22화 (22/235)

〈 22화 〉 사랑이란 무엇인가?

* * *

"...기분 탓인가?"

황제는 정무를 보기 위해서 읽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고는 앞쪽에 시선을 주었다.

하나, 둘, 셋, 넷... 어느새 이 방안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들을 보니 이 넓은 집무실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방이 좁아 보이는군."

그렇기에 황제는 작게 푸념했다.

"어머, 그러면 증축을 할까요?"

나르타의 느긋한 대답에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래, 증축을 생각해 봐야겠군."

그러나 황제는 뭐라고 하는 대신 그 말을 받아주는 걸 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는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녀들에게 함부로 말하기가 꺼려졌다.

"빈은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자리 중 하나를 당당하게 차지한 채 차를 마시던 주설화는 황제의 질문에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의 배려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황제는 황실에서 잘 먹고, 잘 잤는지 피부에서 윤기가 흐르고, 혈색도 고와진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여기가 이 녀석들의 놀이터가 된 것이지?

황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즐거워 보이니 좋은 게 좋은 것일 테지.

그런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자, 아앙!"

꾸욱.

"..."

황제는 잘 깎인 사과로 자기 볼을 꾹꾹 누르는 오르테가를 보면서 잠시 고민하더니 그대로 사과를 입에 물었다.

"잘 먹네. 헤헤."

사과를 먹는 황제를 보면서 오르테가가 만족한 얼굴로 미소를 짓자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이상한 일이다.

원래라면 자꾸 그러면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이거늘.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으니...

황제는 스스로가 죽을 때가 된 건가 싶었다.

"이상하네? 원래라면 그렇게 자꾸 건드리면 손가락을 잘라버린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르테가가 그 말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아한 얼굴로 묻자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걸 알면서도 왜 한 거지? 그럼?"

아니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황제는 머리가 아파왔으나 곧 이 녀석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체념했다.

"그래... 짐의 착각이겠지."

저 녀석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웃기는 소리.

황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오르테가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부드러운 볼이 잡는 맛이 있었다.

"아야!"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녀석을 보면서 황제는 생각했다.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자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대는..."

황제는 엄살을 부리는 오르테가를 보면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 의문에 종지부를 찍을 질문을 말이다.

"짐을 사랑하나?"

"...하?"

오르테가가 뜬끔없는 황제의 질문에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곧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버린 얼굴로 오르테가가 부정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역시 그랬어."

그 말에 황제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는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이 녀석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면 더욱 말이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황제는 그냥 이 녀석에 대한 건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괜한 말해서 미안하군. 찬장에 과자를 사두었으니 먹도록."

'어, 어라?'

오르테가는 그런 황제의 반응에 뭔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그런 오르테가를 보면서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르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세헤라자드 비께서 준비한 게 있다면서요?"

"네, 저희 지방에서 유명한 낙타젖으로 만든 술이랍니다. 폐하께서도 관심이 있으신지요?"

세헤라자드가 술이 담긴 물병을 보여주며 묻자 황제는 사양했다.

"미안하군. 짐은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터라."

단련할 때 술은 방해가 되기에 황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황제가 사양하자 세헤라자드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면서도 더 권유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대는 시간이 있는가? 세헤라자드."

"네? 시간이야 충분하옵니다만..."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세헤라자드는 황제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르테가는 아니었다. 나르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짐과 잠시 외출하지. 나머지는 편히 쉬고 있도록."

확실한 세헤라자드를 보면서 사랑이란 감정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그녀에게 외출을 제안했다.

"!"

그 말에 나르타와 오르테가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세헤라자드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짐을 연모한다고 하지 않았나."

황제는 궁금했으니까.

"짐은 그걸 확인해 보고 싶어졌거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말이다.

­­

"저기, 오르테가. 폐하께선 별생각이..."

나르타는 침울해진 오르테가를 위로해주려고 했다.

솔직하지 못한 게 그녀의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도 있으나... 나르타는 그 심정을 이해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정작 솔직해질 수 없는 그 마음을 말이다.

"괜찮아. 원래 그런 녀석이고, 그 말이 맞잖아?"

뜻밖에 덤덤하게 반응한 오르테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으면 녀석은 날 데리고 갔을까?"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직 폐하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별 감정이 없으시니까요."

그 말에 나르타는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르타가 생각할 때 황제는 아직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확인해 보고 싶다.' 같은 말을 하신 걸테지. 그런 그 말에 오르테가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것이 나르타는 조금 안타까웠다.

"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주설화는 그런 둘의 대화도 듣지 못한 채 황제가 사두었다는 과자의 맛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걸 본 나르타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야기를 나눠본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참 밝은 사람이라서 나르타는 그녀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맛있어? 그럼 나도 먹어볼까?"

그런 주설화의 느긋하고 태평한 모습에 완전 기분이 풀린 오르테가가 웃는 얼굴로 과자를 먹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확실히 풀어진 분위기에 안도한 나르타 역시 그런 그녀들을 챙기면서 다과 시간을 마쳤다.

폐하가 중간에 없어진 것만 제외하면 참으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고.

그녀들은 생각했다.

­­

"미복잠행 말입니까?"

금위대의 훈련을 진행하고 있던 진은 갑자기 세헤라자드를 데리고 와서는 미복잠행을 나서겠다는 황제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호위도 두지 않고 말입니까?"

"필요치 않다."

진은 황제의 단호한 말에 '그건 그렇지만...' 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호위도 없이 보냈다간 황태후와 단독 면담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몰랐다.

"제가 황태후 폐하에게 혼납니다."

"금위대 전원이 짐과 함께 통합 훈련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호위를 대동하지."

"그냥 황태후 폐하께 잔소리 좀 듣죠 뭐. 다녀오십쇼."

통합 훈련.

말이 훈련이지 그냥 금위대 전체가 황제를 상대로 대련을 해야 하는 끔찍한 훈련이었다. 그 훈련이 언급되자 진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그딴 훈련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황태후의 잔소리를 듣는 게 훨씬 몸도, 마음도 편한 일이었으니까.

"그럼 나가지. 밖으로 나가고 나서는 폐하가 아닌 진위라고 부르도록."

"...신기하네요."

히잡을 두르지 않고, 얇은 면사만 쓴 세헤라자드는 미복을 입은 진위를 보면서 말했다.

그야말로 평범한 옷.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이리도 눈에 띄다니... 진위의 외모는 확실히 이런 일에는 독이었다.

미복잠행이란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세헤라자드는 왜 금위대장이 한사코 미복잠행을 말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뭐, 적당히 기척을 흐리게 하면 되니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러나 진위에겐 자신의 외모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기를 이용해 기척을 흐리게 하면 사람들이 이쪽을 잘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확실히... 시선이 느껴지지 않사옵니다."

길을 걷던 세헤라자드는 자신들을 쳐다도 보지 않는 행인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면사를 쓴 자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진위는 한눈에 봐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생겼는데도... 모두가 그냥 그들을 지나쳐갔으니까.

"먹거라."

세헤라자드가 주변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을 떄, 어느새 노점에서 사탕을 사 온 진위가 그녀에게 사탕을 건네주고는 자신도 남은 하나를 입에 물었다.

사탕을 받아 든 세헤라자드는 조심스럽게 사탕을 핥고는 의외라는 듯이 진위를 쳐다보았다.

"달군요."

"그래 달지. 나는 단 것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와작.

"가끔은 나쁘지 않더구나."

세헤라자드는 멍하니 그런 진위의 옆을 쳐다보았다.

이따금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은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구나.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야. 그렇지 않나?"

"폐하께선... 저들이 좋으십니까?"

진위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내 자리가 자리다 보니까. 책임감은 느끼고 있지.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고, 내가 아껴야 할 자들이며, 내가 지켜야 할 이들이니까."

진위는 사탕을 완전히 씹어먹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보기 좋지 않나? 저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일을 잘했다는 이야기가 될 터이니. 그러니 좋아할 수밖에 없지. 저들이 내가 해온 일의 증거인 셈이니 말이다."

진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가 인파에 부딪칠 뻔하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그 배려 넘치는 행동에 세헤라자드의 심장은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손이나 잡거라. 영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하니."

진위는 걸음을 떼면서 자연스럽게 세헤라자드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행동에 조금 당황한 세헤라자드는 수줍게 그 손을 잡았다.

지금 이미 세헤라자드는 하늘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젠 무얼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어찌하면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세헤라자드의 마음과 달리 별 생각이 없는 진위는 길을 걸으면서 이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막상 길거리로 나오긴 했는데... 진위는 그녀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오지 않았다.

"...소첩은 지금, 이 순간 만으로도 행복하옵니다."

그 대답에 진위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참으로 복잡하구나. 나에겐 너무 어려운 감정이야."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는 건가? 왜?

진위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기쁘다니 다행이구나."

세헤라자드가 마음에 들어하니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이번 외출에서 아무 계획도 없었다.

이 외출은 그로서도 조금 충동적인 결정이라서 아무런 소득도 없는 지금 조금 난처한 참이었는데...

진위는 이런 무의미한 외출에도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기쁜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

세헤라자드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황제는 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어지러웠고, 사랑이란 감정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자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 사람의 생각만 하게 되옵니다.'

황제는 길을 걷던 중 세헤라자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자신이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 사람의 생각만 하게 되는 자를 떠올렸다.

그 결과,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환운 공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단 말인가?"

오늘 외출로 밝혀진 새로운 진실에 황제는 깊은 충격을 먹었다.

그의 일대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일검은 어땠을지를 상상했다.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도 환운 공이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헤라자드가 말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반응이라면... 황제는 환운 공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생각도 못 한 진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기 사랑을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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