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90화 (190/200)

22장 결착 : 찾아낸 망나니

헤논의 몸에 빙의한 이후, 내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망나니로 낙인 찍힌 채 시작하는 바람에 평판은 바닥을 기었고 혹시 모를 조력자는 기대하는 게 사치였다.

그 와중에 사생아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끊임없이 견제가 들어왔는데, 그 견제를 도맡아 하던 사람이 바로 로잘린이었다.

지금이야 가장 큰 빌런을 뽑자면 황혼교주나 마왕 바알이겠지만, 이세계에 떨어진 초반에는 로잘린만한 악당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헤논을 고립시키고 능력적으로 두각을 보이자 용병에게 살인을 청부하고 그것조차 안 되자 강제로 북부로 보내버린 비정한 계모.

마지막에는 탐욕의 꾐에 넘어가 악마를 소환하면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던 여인이 어째서 내 눈앞에 있는 걸까.

“이젠 대답조차 안 하느냐? 아주 갈 데까지 갔구나.”

무언가 이상하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나.

혹은 탐욕의 환상안과 비슷한 스킬에 걸렸나.

꿈이나 환상이라기엔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나도 리얼한데.

“시온을 찾아야겠군.”

로잘린을 무시하고 지나치자 뒤에서 악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시온!!!”

겨우 찾았다.

시온은 목욕탕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훈련이 힘들어서 잠시 나왔나?

그럴 만도 했다.

두 달 내내 훈련장 바깥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 있었구나. 이게 다 어찌된 일이냐?”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낯선 시선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목소리가 품은 차가운 냉기에 뼈가 시렸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처음 만났을 때 같다.

“갑자기 로잘린이 살아 돌아왔지 않나?”

“이젠 마님의 이름까지 막 부르시는 겁니까? 못 들은 셈 치겠습니다.”

시온이 쌩하니 사라졌다.

슬슬 가슴 속에서 불길함이 피어오른다.

성을 활보하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봤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망나니 헤논 시절로 돌아왔음을.

“설마 다 꿈이었다는 거야?”

드루이드로 각성하고, 후작가의 후계자가 되고, 황혼교를 물리치며, 나라를 구원하고, 대륙의 영웅이자 용사가 되었던 기나긴 대장정이 전부 허구 속 공상이었다는 사실은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걸 꿈이라고 생각하느니 망나니 시절로 돌아온 이 순간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편했다.

‘자고 일어나면 되겠지.’

침대에 누워서 취침 후 기상해도 그대로. 술을 한계까지 마시다 일어나도 그대로. 벽에 몸을 부딪쳐 기절하고 정신을 차렸는데도 그대로. 무슨 짓거리를 해도 이곳을 탈출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무서운 건 계속해서 느껴지는 생생한 현실감 때문에 내가 있는 이곳이 진짜 현실이 아닌가 싶었다.

칼을 구해서 심장을 찌르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가슴살을 반쯤 찢고 들어가자마자 극렬한 통증이 나를 휩쓴 탓이다.

“이건···아니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다고.

결국 칼을 떨어트렸다.

이후로는 물리적으로 이곳을 나갈 생각을 버렸다.

조금 더 머리를 굴려봤다.

만약 이곳이 진짜 현실이라면 무엇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상수리나무를 찾아야 한다.’

헤논의 어머니가 남긴 상수리나무는 내가 드루이드로 각성하게 된 계기였다.

이때부터 드루이드의 힘을 이용해서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냈고 대륙의 용사가 되었다.

설령 이곳이 진짜 현실이라 해도 드루이드의 힘을 얻으면 상관없다.

미래에 벌어진 일은 머릿속에 있으니 이를 토대로 똑같이 성장해서 아르니아 대륙을 구원하면 된다.

아니지, 오히려 이전 회차보다 빠르게 성장해서 마왕 바알을 수월하게 해치우면 된다.

‘이건 기회야.’

서둘러 정원을 향해 달렸다.

세바스찬을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바쁜 일이 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단숨에 입구를 넘었다.

이곳에 모든 일의 시작점인 상수리나무가······

“없어?”

상수리나무가 없었다.

원래 나무가 있어야 할 곳은 평범한 꽃밭이 대신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러고 보니 정령의 속삭임마저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설상가상으로 뒤에서 들려오는 굵은 남성의 목소리까지.

어느새 정원을 방문한 로이드 후작이 무감정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정원을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우스운 소리.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로이드 후작의 눈빛에는 실망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상수리나무가 없는 시점에서, 내 계획은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렸다.

드루이드로 각성하지 못한다는 소리는 시온 라이크 세계와 이곳이 다르다는 의미.

무엇보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나에게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있었으니.

환각 계열 기술에 빠질 때마다 늘 나를 도와줬던 조력자, 천마 영감님을 만나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천마님을 만나려면 로이드 후작의 비밀창고를 뚫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든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온종일 내성을 어슬렁대다가 세바스찬과 로이드 후작이 동시에 자리를 비울 때를 기다렸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끝에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비밀창고를 여는 방법은 저번에 로이드 후작이 눈앞에서 보여줘서 알고 있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각종 금은보화가 고운 때깔을 발했다.

눈을 매혹하는 금빛을 대충 넘기고 가장 안쪽에 있는 낡은 검을 발견했다.

“좋았어.”

상수리나무와 달리 천마검은 존재했다.

칼자루를 손에 쥐고 말을 걸었다.

“천마님, 저 헤논입니다. 거기 있으세요?”

기왕이면 바로 나를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영감님은 이런 환상 세계는 가볍게 부술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기대감을 머금고 날린 내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무슨 수로 내 정체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놈에게는 관심 없다. 꺼져라.

천마마저도 날 모르는 건가.

눈앞이 아득하다.

무슨 수로 이 영감님을 설득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던 찰나,

“여기에요! 여기에 도련님이 들어가는 걸 봤어요!”

마침 하녀의 눈에 딱 걸려서 고자질 당했고, 내가 후작의 비밀재산을 노리고 도둑질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내성 전체에 퍼졌다.

이후 내게 내려진 벌은 한 달간 방에서 외출 금지였다.

*

이후에도 이 거지 같은 세계에서 탈출할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이 현실이고 내가 있던 곳은 공상 세계가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영웅도 용사도 드루이드도 아니었고 그저 몽상가였던 걸까.

만약 정말로 이곳이 현실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나는 세계에 적응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괜찮아. 비록 드루이드 능력은 없지만 소드마스터에 이른 검술 실력은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있으니까.”

외출금지가 풀리자마자 연무장에 나가서 체력단련과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

소드익스퍼트만 되더라도 이 세계에서는 충분히 먹고 살만하다.

비록 장황했던 대서사시가 전부 꿈이였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꿈 덕분에 검을 휘두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한참 동안 땀을 흘렸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뒤에 기사들을 잔뜩 대동하고 나타났다.

입가에 비웃음을 가득 띄운 사내가 조롱 섞인 어투로 나에게 말했다.

“동생아, 무슨 바람이 그리 불었느냐?”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이랬지.

시온과 내가 연무장에서 검을 겨룰 때 나타나서 훼방을 놨었다.

그때는 남들 몰래 드루이드 스킬을 섞어서 혼꾸멍을 내줬는데 말이야.

“필립, 너에게 대련을 신청한다.”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간다.

일단 필립을 박살내놔야 로이드 후작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겠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냐?”

필립과의 대련은 상당히 치열했다.

나는 소드마스터로서 검술의 묘리는 전부 파악했으나, 허약한 신체가 발목을 잡았다.

반면에 필립은 소드 유저 상위에 해당하는 고수답게 탄탄한 기본기로 나를 압박했지만, 기술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접전 끝에 결과는 한발짝 앞선 진땀승.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인사하고 돌아가는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제법 따가웠다. 곧 내성에 내가 달라졌다는 소문이 쫙 퍼지겠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대련의 여파로 인해 피곤함이 몰려왔다. 씻을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다음 날.

평소보다 유달리 목이 탔다.

욱신거리고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 탁자에 놓인 물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물잔을 잡는데 실패했고, 유리잔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쨍그랑!

“에이씨!”

볼멘소리와 함께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몸의 균형이 기울며 바닥을 굴렀다.

‘도대체 왜?’

원인을 알려고 아래를 내려보다가 나는 참혹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내 오른손과.

내 왼발이.

없다.

절단면이 깔끔하고 실밥으로 꼼꼼하게 꿰매져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공포가 나를 감쌌다.

마침 맞은편에 거울이 있었다.

유리면에는 붉은 피로 글자가 적혀있었다.

[다음에는 눈알이다.]

누구의 짓인지는 분명하다.

로잘린 아니면 필립, 둘 다일 수도.

심각하게 안일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의 지식을 갖고 있어도 아직까지는 철저한 최약체일 뿐인데.

자는 사이에 마취제를 먹이고 손발을 절단하고 꿰멜 동안 아무 것도 못하는 수준이면서 섣불리 고개를 내밀었다.

‘끝이다.’

정말로 끝났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의 지식을 갖고 있어도 손발이 잘려나간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다.

심지어 여기서 더 훈련하면 멀쩡하던 눈알까지 잃고 장님이 될 테니, 내 운명은 배드 엔딩으로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핫, 하하, 하하하하핫!!!”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으면서 비참한 운명을 수용하고야 말았다.

“그래, 죽자.”

죽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뭐가 원래 세계인지조차 불명확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힌즈 호수로 갔다.

그 아름다웠던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 싶어서였다.

절뚝이면서 걸어가는 나에게 모두가 경멸과 멸시의 시선을 던졌다.

모두가 영웅으로 떠받들던 이전과는 정반대였다.

힌즈 호수에 도착했다.

모든 게 바뀌었는데, 이곳의 경관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들었다.

나무에 기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마침 소녀 한 명이 다가왔다.

앳된 외모지만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아봤다.

나에게 용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했던 그 해맑은 소녀였다.

“안녕?”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으나,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맞다.

나 오른손이 없었지.

“아리아!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세상에!”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와서 소녀의 손을 이끌고 냉큼 달아났다.

떠나면서도 나를 위아래로 흘겨보는 걸 잊지 않는 꼼꼼한 아낙네였다.

“그래. 가자.”

미리 준비해왔던 비수를 꺼냈다.

가는 마당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굳이 뽑자면 이 세계에 조금의 허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어설펐거나 특이점이 있었다면 진작 알아채고 환상세계를 빠져나가려 별짓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나 완벽했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도, 이에 맞춰 춤을 추는 낙엽도, 잘린 손목과 발목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고통도.

이게 진짜가 아니라면 뭐가 진짜란 말인가.

따라서 나는 이곳이 진짜고 내가 경험했던 세계를 꿈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최후가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수를 높게 들어 심장을 찌르려 했다.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참았다.

마침내 비수를 내리치는 순간, 눈에 이상한 장면이 띄었다.

“응?”

칼을 멈추었다.

이상한 장면이란 이러했다.

가을철 낙엽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문제는 낙엽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특정 문장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무척이나 사소했다.

확률 낮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너고, 너는 나라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이상한 점이라도 찾고 싶었던 나로서는 그조차도 쉬이 넘기지 못했다.

“혹시?”

발로 낙엽을 걷어내고 잠시 기다렸다.

바람이 불며 낙엽이 굴러갔다.

그리고 몇몇 낙엽이 뭉쳐서 재차 문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방망이쳤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우연이 아니다.

칼을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 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자 모든 게 다 이상했다.

매일 가던 주점 유리창에 김이 서렸는데, 유일하게 김이 안 서린 부분만 연결하면 문장이 완성되었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똑같은 메시지가 사방에서 보였다.

성벽에 드리운 이끼, 행상인이 떨어트린 동전들, 마차가 지나간 바퀴자국.

방에 들어오자마자 칼로 살갗을 베었다. 눈을 딱 감고 흘러나오는 피를 마구잡이로 흩뿌렸다.

잠시 후 눈을 뜨자 피로 난장판이 된 방바닥에 선명히 적힌 문장이 보인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마지막 확인 절차가 끝났다.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다.

나는 모종의 이유로 가상세계에 들어왔고, 누군가가 나를 꺼내주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있다.

탈출을 위한 단서는 반복되는 이 문장뿐.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했다.

나에게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라···

무슨 도플갱어 같은 건가?

아니면 분신술을 쓰는 닌자?

드루이드 스킬 중에 나를 복제하는 기술은 없는데.

도대체 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고가 깊어지며 의식이 침전된다.

무언가 내가 놓친 게 없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다시······

처음이라.

내가 아르니아 대륙에 온 처음은 어땠더라.

헤논의 몸에 빙의한 후 망나니로 생활하며 갖은 고초를 다 겪고······잠깐.

“헤논의 몸에 빙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생각해보니 있었다.

이런 문장을 쓸만한 사람이.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내가 빙의한 몸의 원주인 헤논.

그 녀석의 영혼이라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헤논은 나고, 나는 헤논이니까.

그렇다면 헤논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거기구나.”

맨 처음 내가 묻혔던 곳.

차가운 땅속.

그곳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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