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74화 (174/200)

20장 혈통 : 탑승한 망나니

알렉스는 황제를 잘 알았다.

그는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신중파였다. 밑지는 일엔 절대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도전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안전한 길만 고집했다.

그런 황제가 갑자기 레이놀드를 들먹이며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

이 말인 즉슨 황제가 레이놀드 황태자가 사고가 아닌 암살로 죽었음을 알아냈고, 그 범인을 알렉스로 확신한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나갔지?’

처음에는 제임스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렉스가 황제로 즉위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현재 알렉스의 호위기사는 전원 제임스 공작의 수하다. 알렉스가 방해됐다면 호위기사를 시켜서 깔끔하게 죽이지, 이런 위험부담 높은 방법을 쓸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단 하나.

암살 작전에 관여한 정보 길드 흑야.

놈들이 배신자다.

“죄인을 포박하라!”

“나를 지켜라!”

두 개의 명령이 교차했다.

알렉스를 호위하던 중장갑 기사들이 검을 뽑으며 다가오는 황실 기사들을 가로막았다.

황제의 명을 수행하려는 황실 기사들과 제임스 공작이 보내준 검은 기사들 간의 살벌한 대치가 이어졌다.

“감히 어명에 불응하다니, 미쳤구나.”

한스 기사단장의 분개한 목소리.

알렉스는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홱 돌려 빠져나갔다.

마침 근처에 전투마가 세워져 있었다. 병사가 들고 있던 말고삐를 확 챈 다음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질주했다.

“어엇?”

“잡아! 잡아라!”

“모두 비켜!”

황태자를 체포하라는 황제.

길을 열라는 황태자.

군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감히 누가 황태자에게 화살을 겨누겠는가. 당황한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알렉스의 도주를 방관했다. 그 사이에 알렉스는 입구를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한편, 알렉스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줬던 검은 기사들은 모조리 한스 기사단장에게 제압당했다.

검은 기사들의 무력 자체는 황실 호위기사를 넘어설 정도로 강했지만, 대륙제일검인 한스는 손쉽게 부숴버렸다.

“어디 그 잘난 얼굴 좀 보자.”

투구를 벗기고 복면을 찢어버린 한스가 침음을 삼켰다. 복면 속에 가려진 얼굴은 피부 한 점 없는 새하얀 백골이었다.

“데스···나이트?”

놈은 언데드였다.

“이놈이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구나.”

황제의 탄식.

알렉스의 유죄는 이미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 * *

멜브스 대평원 서방향.

제임스 공작의 군영.

황제 진영과 사막 왕국 진영과 마찬가지로 십만 대군이 늘어서 있다.

제임스는 제국의 실권자답게 황제와 엇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자신의 군영을 내려다보던 제임스 공작은 지난 황혼교 간부회의를 회상했다.

‘마왕님의 부활이 1년 남았다.’

황혼교주의 선언.

이십년 전 최후의 전투 때도 활약했던 제임스다. 그가 지휘하던 언데드 군단은 마왕군의 상당한 전력을 차지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적군을 물어뜯던 좀비와 구울 떼거리와, 그들에게 죽은 병사들이 벌떡 몸을 일으켜 한때 아군이었던 동료를 공격하던 아비규환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시체가 계속 나오는 전쟁터는 그를 위해 준비된 무대였다. 리치킹인 그는 이곳에서만큼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의 죽음을 관찰하며 삶을 실감하는 언데드 지휘관. 그것이 제임스 공작이자 오만의 본질이었다.

그동안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며 제국의 공작을 연기했다. 그래도 묵묵히 참으며 역할을 수행했다. 다시 한 번 대전쟁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달콤한 과실을 수확할 때가 도래했다.

교주의 말에 따르면 바알의 부활까지 1년, 혹은 그보다 짧을 수도 있단다. 그전까지 오만이 해야할 일은 분명하다.

‘대륙을 전화(戰火)로 뒤덮는다.’

사막 왕국과의 전쟁이 그 첫단추였다.

이를 위해 오만은 그동안 꼭꼭 숨겨뒀던 샌디 황후 암살범을 사막왕에게 보냈다.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주술사를 가진 사막왕이 군사를 일으키리라 기대하면서.

역시나 대로한 가젤을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다.

결국 작금의 상황은 그가 설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전쟁을 통해 언데드를 양산하여 제국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 이후 봉인을 풀고 나온 바알의 재림으로 인한 대륙의 멸망. 깔끔한 계획이다.

드디어 제임스란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만으로 돌아올 때였다.

“응?”

멀리서 한 기의 말이 부리나케 진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휘날리는 백발 머리카락. 알렉스 황태자였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혈육을 해친 멍청이.

알렉스에 대한 오만의 평가였다.

원래 오만의 계획은 조종하기 쉬운 알렉스를 황제로 세운 후 팽창 정책으로 대륙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려 했다.

어차피 알렉스의 라이프 베슬을 쥐고 있으니 딴생각을 하거나 뒤통수를 칠 염려도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찝찝해서라도 거절했을 텐데, 기어이 황좌를 노리겠다고 스스로 개목줄을 채워가며 형을 죽였으니, 혹시 황제의 자격이란 멍청함 지수로 정해지는 게 아닐까.

어쨌든 이전에는 저놈이 필요해서 탐욕이란 감투까지 씌워가며 대간부로 세웠으나, 마왕의 도래가 1년 남은 시점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 저놈은 애물단지.

쓸모 없는 쓰레기였다.

“공작! 나 좀 도와주시오! 흑야의 천한 잡것들이 우리 뒤통수를 쳤소! 황제가 레이놀드 사건의 진실을 알았단 말이오!”

“진정하시지요.”

“어떻게 진정하게 생겼소! 이러다간 공작까지 엮일 수 있어요. 흑야의 마스터가 간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태의 배신이라···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그녀는 예측 불허의 정신 상태를 지녔으니.

사실 대간부 중에서 교주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 건 거인족 분노 정도일까.

나머지는 각자 사정으로 간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당장 오만인 자신만 해도 개인의 희열감을 채우고자 마왕을 따랐으니. 누가 언제 배신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여자가 대놓고 뒤통수를 칠 줄이야.

“흠···그분께서 오시는 마당에 아무래도 괜찮겠지.”

“괜찮다? 지금 제정신이오? 나 다음엔 공작 당신이오! 내가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면 당신이라고 무사할 것 같소?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입니다!”

시끄럽다. 조금 많이 시끄럽다. 가만히만 있었어도 일 년은 더 살았을 텐데. 역시 멍청이는 어쩔 수 없나.

“이봐, 알렉스.”

“뭐? 알렉스? 당신 미쳤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니. 설마 내가 너 같은 병신과 그 정도로 중요한 관계를 맺었겠느냐?”

“뭐···라?”

“때가 잔뜩 낀 엄지발톱. 없으면 조금 불편하지만 사는 데는 지장 없는. 너는 나에게 딱 그 정도 되는 존재다.”

저 멍청한 표정을 보라.

마음이 바뀌었다.

원래는 시체 조각도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깜찍하게 구울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푸욱!!

섬뜩한 파열음.

알렉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심장이 파괴된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어째서······”

“이걸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네가 멍청이라는 증거다.”

알렉스의 숨이 다하고.

뒤에 대기하던 흑색 기사가 다가왔다.

“주인이여, 움직이십니까?”

“그래.”

오만이 허공에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흑색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기운에 닿은 병사는 겉면을 감싸던 인간의 피부가 녹아내리며 숨겨져 있던 본체가 드러났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구울, 백색 뼈다귀로만 이루어진 스켈레톤, 혹은 징그러운 외형의 키메라. 데스나이트와 리치 같은 상위급 언데드까지.

그렇다.

오만이 데려온 십만 군대는 전원 죽은 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거라! 가증스러운 빛의 창조물을 어둠으로 끌어내려라. 해가 진 후에 대평원에 남은 생명은 없어야 할 것이야.”

시커먼 대군세가 황제의 진영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를 지켜보는 오만의 텅 빈 동공 속에는 푸른 귀화가 일렁거렸다. 기다리던 축제, 카니발의 시작이었다.

* * *

멜브스 대평원 끝자락에는 언덕이 하나 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유일한 언덕이라 대평원이 한눈에 보이는 그런 장소.

그 끝자락에서 나는 동료들과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었다. 파헬과 나태도 함께였다.

사막왕의 비호를 받아낸 뒤, 황제에게 답서를 받았다. 답서에는 알렉스 황태자를 포박하고 그 죄를 묻겠다 적혀있었다.

황제가 올바른 결정을 내린 건 다행이다만. 과연 알렉스가 승복할까? 거기에는 살짝 회의적이었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는지.

황제 진영에서 튀어나온 알렉스 황태자가 말을 타고 제임스 공작 진영으로 달렸다. 그 모습이 마치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러 가는 유치원생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 공작의 군대가 황제 쪽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누가 봐도 좋은 의도로 다가가는 건 아니었다.

[라이프 컨트롤]

[시야공유]

쥐를 풀어서 좀 더 선명히 보았다.

시야공유를 통해 공유된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군대가 아닌 언데드 군단. 가장 선봉에 선 말 탄 시체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알렉스 황태자였다.

“결국 저질렀군.”

생쥐의 눈으로 본 장면을 일행과 공유했다. 가장 놀란 반응을 보인 건 역시나 오르네오였다.

“뭐라? 그러면 지금 제임스 공작이 폐하를 노린다는 말인가?”

“폐하뿐만 아니라 대평원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노린다고 봐야겠지요. 그는 네크로맨서 리치니까요.”

말하는 와중에도 황제군의 서쪽 진영은 이미 와해 중이었다.

평범한 인간과의 전투도 무서운 마당에 상대가 죽지도 않는 언데드다. 죽음에서 돌아온 존재들은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심지어 언데드에게 목숨을 잃는 아군은 전부 적군이 되어버린다.

한때의 동료가 덜렁대는 목과 잘린 팔다리로 덤벼드는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이었다.

오만은 이때만을 노렸던 게 분명했다.

대평원 전투에서 승리하면 무려 육십만에 가까운 언데드 대군이 생긴다.

여기서 제국의 심장인 오스딘 시티까지는 겨우 삼일 거리. 만일 수십만 언데드 군단이 오스딘 시티 수백만 거주민을 학살하게 된다면?

수백만, 혹은 그 이상의 언데드 제국이 탄생하리라. 대륙 멸망의 시초였다.

“저기 보십시오!!”

시온이 가리킨 곳은 사막 왕국군의 진영이었다.

장엄한 뿔피리 소리가 울리며 사막 왕국군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목표는 제임스 공작, 즉 오만이었다.

사막왕 가젤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러면 사전에 그를 포섭한 행동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회라고 여긴 사막왕은 황제를 쳤겠지. 그리고는 뒤늦게 언데드 군단을 발견해서 황제와 같이 공멸했으리라.

하지만 내가 던진 돌로 인해 사막왕은 제임스 쪽으로 칼을 겨누었다. 그 덕분에 좋다고 황제 진영을 공략하던 언데드 군단은 옆구리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간신히 균형을 맞췄다.

절대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시간을 우리 편이 아니기에.

죽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적군은 늘고 아군은 줄어든다. 게다가 언데드는 지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으니. 결국 오만을 처치해야만 끝나는 전쟁이었다.

“현자님은 황제군을 도와 언데드의 공세를 막는데 집중해주십시오.”

“알겠네.”

시온과 캠벨, 라칸과 에이든, 아멜리아까지. 내 동료를 전부 오르네오에게 맡겼다.

파헬은 가젤의 편에 서서 사막 왕국군을 지원한단다. 이번 기회에 삼촌을 돕고 관계를 쌓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나태도 파헬과 함께하겠다 선언했다. 이쯤 되면 오만도 그녀의 배신을 눈치챘을 터.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헤논,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오르네오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스태프를 휘두르는 오만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설마 부단장 혼자서 오만을 죽이려고? 절대 무리야.”

캠벨의 걱정.

“괜찮아. 혼자가 아니니까.”

아공간에서 대기하던 친구를 꺼냈다. 거대한 성룡의 본체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전설 속 존재의 등장이었다.

캬오오오오!!!!

용의 포효에 대지가 떨리고 공기가 흔들렸다. 강대한 존재감을 느낀 언데드와 인간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타앗!

땅을 박차고 코코의 등에 올라탔다. 날개짓으로 허공에 떠오르자 모두의 얼굴이 작아졌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