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67화 (167/200)

20장 혈통 : 회상한 망나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나만큼 정신 나간 망나니도 없다.

대륙에서 제일 강한 나라의 황궁에서 건국 시조의 허물을 약점 잡아 후손까지 모욕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딱히 양심의 가책이 들거나 복수가 두렵진 않았다.

가책을 느끼기에는 상대가 먼저 혈통을 운운하며 패드립을 날렸고,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이미 너무 강해졌다.

실력과 명분에서 오는 여유로운 태도가 상대를 더 자극했던 걸까. 알렉스 황태자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어디까지나 초대황제가 그랬다는 말입니다. 태자께서 그러셨다는 말이 아니라요.”

“무슨 소리지? 방금 자네가 나에게도 잔혹성과 비정함이 남아있다고 했잖는가?”

“초대황제처럼 형을 죽였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의미 없는 헛소리입니다. 가벼운 가정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줄은 몰랐군요.”

형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초대황제. 마찬가지로 형을 죽이고 자리를 뺏은 알렉스 황태자. 사람이라면 제 발 저린 게 당연하다.

“크흠흠, 아무튼 비극은 초대황제에서 끝난 일이야.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제국의 찬란한 위용을 이어나가고 있네.”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다니. 어림없지. 불편해하는 화제를 더욱 쑤셔서 도마 위에 올린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혹여라도 피를 못 속여서 후대에도 동생이 형을 죽이고 잡아떼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걱정했습니다. 물론 태자님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지요. 안 그렇습니까?”

또 한 번 존속살해를 언급하자 알렉스가 죽일 듯이 나를 노려봤다.

지금 녀석은 속으로 생각 중이다.

내가 레이놀드 암살사건을 알아서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데 우연히 지뢰만 밟는 건지.

꽤 아리송하겠지. 내가 일부러 놀리는 줄도 모르고.

결국 알렉스는 고민을 포기하고 나를 위협하는 가장 최하책을 선택했다.

“그대는 이곳이 어딘지 망각했나? 무려 대 칼론 제국의 황궁이다. 여태껏 자네를 지켜줬던 알량한 소문이 여기까지 통할 거라 착각하면 오산이야.”

소문이 나를 지켜준다라···

다른 사람처럼 알렉스 또한 내가 쌓아온 업적을 평가절하하고 자기 아래로 취급한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나에게는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태도다.

방심 한 번에 골로 가는 세상이다. 상대를 높게 봐도 모자랄 판에, 어째서 얕잡아 볼까.

상식적으로 한 사람에게 악마살해자와 성 파괴자, 황혼의 대적자와 새로운 세븐 스타라는 명함이 줄줄이 붙었으면 조금은 긴장하는 게 도리 아닐까.

알렉스 황태자도 그렇고, 주위 호위기사도 그렇고. 무조건 시비를 걸면 자기가 이길 거라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있다.

‘황가라는 이름값이 저들의 객관적인 안목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마치 조건 반사 같은 현상이다. 주변에서 보여주는 황가에 대한 존경, 두려움이 마약처럼 놈들의 신경계를 마비시켰다.

모든 사람이 황가의 위엄에 굴종할 거라 쉽게 재단했겠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실상 나는 전혀 쫄지도, 위축되지도 않았으니까.

“태자님이야말로 뭔가를 착각하고 계십니다만.”

“뭐라?”

“대륙의 별이 우습게 보이십니까?”

고오오오오

단전에서 삼원마나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숨 막힐 듯한 중압감이 황태자와 호위기사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내 기세를 정면으로 마주한 알렉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문으로는 소드 유저라 들었는데, 이 정도 기운을 마주했으면 대충 견적은 나올 거다.

그러나 황태자는 몰라도 이를 지키는 호위기사의 자존심까지 내리누르기엔 살짝 부족했나 보다.

거한 하나가 나오더니 알렉스에게 부복했다.

“태자 저하, 허락만 해주신다면 황실의 존엄을 무시한 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나이다!!”

캠벨과 비슷한 거구에 황실 호위기사 출신이라니. 딱 봐도 엘리트로 승승장구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케이스다.

몸짓 하나하나에 가오가 잔뜩 묻어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근육 덩어리. 뇌까지 근육이 아니라면 다행이려만.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알렉스는 호승심을 불태우는 호위기사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한발 물러서서 구경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무력시위를 허락받은 호위기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검을 겨누었다.

“로이드 백작, 최근 명성은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소. 그 고강한 검을 한 번 견식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굳이 상대하지 않고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무서워서 싸움을 피했다는 헛소문을 온 대륙에 퍼트리겠지.

나중에 이를 일일이 해명하느니 지금 눈높이 교육을 실시해주는 게 속편하다.

“괜찮겠는가? 당신에게 상당히 충격일 수도 있어.”

도발이 아니다. 진짜로 녀석을 걱정하는 마음에 사실을 말했을 뿐. 그러나 호위기사 놈은 내가 건방을 떤다고 여겼는지 얼굴이 꾸깃해졌다.

“시골 촌뜨기가 검 좀 쓴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아는군. 미안하지만 제국 황실은 전대륙에서 괴물이란 괴물은 싸그리 모아놓은 곳이다. 이참에 망신 한 번 당하고 가거라.”

나와 호위기사가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슬쩍 오르네오 영감님을 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뒷감당은 할 테니 마음껏 날뛰라는 신호다.

사실 피래미 상대로 날뛸 것도 없었다. 천마검조차 사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짝다리를 짚자 상대의 눈가가 좁아졌다.

“뭐하고 있나? 자세를 잡고 검을 뽑아라.”

“준비는 끝났다.”

“···뭐라?”

“준비 끝났다고. 편할 때 들어와.”

알렉스 황자를 포함해서 모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무표정인 사람은 내 전심전력을 아는 오르네오 영감님 하나였다.

“···대련 중엔 어떤 불상사도 일어날 수 있는 법이지. 만약 오늘 ‘실수’로 팔다리가 잘려도 자업자득이오!”

호위기사의 신형이 쏘아졌다. 딱봐도 그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 노리는 곳은 손목. 이참에 내 오른손을 날려서 검을 못 들게 할 셈이다.

그의 얼굴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검도 안 뽑고 삐딱한 자세로 있는 내가 절대 반응하지 못할 거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너무 느려터졌는걸.

소드마스터로 오르면서 동체시력부터 시작해서 신체 스펙이 차원이 달라졌다.

심지어 최상급 드루이드의 직감은 천마게이션을 쓰지 않고도 상대의 공격이 어디로 날아올지 예고했다.

[크리스탈 컨트롤]

[자이언트 크리스탈]

거대 주먹을 형성하는 자이언트 스킬.

대형 몬스터나 괴수와 싸울 때 주로 사용했으나, 세밀한 컨트롤만 뒷받침된다면 필요한 부위에만 얇게 덮어씌울 수 있다.

최상급 드루이드가 되고 자이언트 스킬 숙련도가 오르면서 가능해진 기교다.

손바닥을 덮은 크리스탈에 삼원마나를 이용해 오러를 살짝 넣어주자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장갑이 완성되었다.

까앙!!

둔탁한 쇳소리. 당연히 상대의 손을 잘라낼 줄 알았던 호위기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마나를 가득 먹은 그의 검이···허무하게도 맨손에 잡혀있었기에.

“말도 안 돼!”

“나와 검을 맞댄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더군. 놀랍겠지만 말이 된다.”

“이이익!!”

호위기사가 안간힘을 쓰며 검을 빼내려고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바위에 끼인 듯 꼼짝 않는 검을 보며 그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어갔다.

“멍청한 놈! 뭘 하고 있느냐! 상대가 맨손으로 검을 잡고 있잖아. 당장 손을 날려버려!”

이를 지켜보던 알렉스 황태자가 답답한 마음에 고함을 지른다.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호위기사가 멍청해 보이겠지. 맨손인 사람에게 검이 잡힌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보는 것과 막상 당하는 것은 다르다. 식은땀을 호위기사는 점점 ‘벽’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소드마스터?”

뽀각!!

마침내 검날의 내구성이 다했다. 내 손바닥을 덮은 오러 크리스탈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일부러 칼날이 부러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살짝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부러진 검날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알렉스 쪽으로 날아갔다.

“황태자 저하!!”

스핏!!

호위기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알렉스의 옆을 스쳤다.

그의 하얀 피부에 옅은 혈선이 그려지며 핏방울이 살짝 맺혔다. 치밀하게 계산된 일타이피다.

“이것참, 저하께서 다치실 뻔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말은 사과한다 하지만 고개는 뻣뻣하고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이다. 힘으로 정의를 증명한 자의 여유였다.

반면에 알렉스의 얼굴은 이 이상 빨개질 수 없었다.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그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놈! 황실기사란 놈이 자기 검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하나?”

“너무 그를 나무라지 마시지요. 소드익스퍼트가 마스터 앞에서 별수 있겠습니까?”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진정한 알렉스.

녀석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등을 홱 돌린다.

“운이 좋으셨군. 다음에 또 봅시다.”

두고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하나 없던데. 결국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하고 휑하니 떠나버렸다.

휑한 공터에 나와 오르네오 영감님만 남았다. 영감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야 황태자를 싫어했으니 시원하긴 했다만, 자네는 괜히 옆에 있다가 초면에 미운털이 박혀버렸구먼. 미안하게 됐네.”

현재 오르네오는 알렉스가 황혼에 가입하고 나태의 손을 빌려 레이놀드 전 황태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원래는 말해주려 했으나, 아직까지는 영감님을 완전히 믿기 힘들었다. 진실을 알게된 그가 난리를 치다가 괜히 황혼의 이목을 끌 수도 있고.

어차피 알렉스 황태자와 나는 적대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참에 영감님께 점수나 따자.

“괜찮습니다. 현자님의 적이라면 저에게도 적이지요. 게다가 제가 어디가서 맞고 다닐 사람입니까? 마음 쓰지 마십시오.”

“자네···”

영감님이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크흠, 조금 찔리는데.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보다 어서 이동하시지요. 알아볼 게 많습니다.”

샌디 황후의 거처에 들어왔다.

방치된지 오래라 덜렁거리는 문짝. 창문도 깨진 곳이 많았다. 벽에는 이끼가 서리거나 금이 가 있었다. 천장에서는 찍찍대며 쥐가 돌아다녔다.

화려함의 끝을 달리는 황궁 내부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참 세월 무상이지.”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오르네오 영감님이 침실로 나를 안내했다.

침실도 다른 곳과 비슷했다.

십년은 족히 안 빨아서 낡고 헤져버린 이불보와 반쯤 걸레짝이 된 커튼, 문고리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천장에 거미줄이 잔뜩이었고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썩 올라왔다.

“이런 곳에서 정말 진실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샌디 황후가 소문대로 아이를 낳다가 산통으로 죽은 거였으면 좋겠네. 사막왕의 주장대로 암살당했다면 나는 정말이지···”

“영감님, 집중하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알겠네.”

[라이프 컨트롤]

[기억회상]

돌로 이루어진 벽에 손을 짚고 기억회상을 시전했다.

최상급으로 승급하고 처음으로 쓴 기억회상이었는데, 확실히 별을 하나 더 획득해서인지 기억을 훑는 속도라든지 필름의 해상도가 더 진해졌다.

약 십수년 전 쯤으로 가니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침실이 어느새 화사하고 따뜻한 기운을 풍기는 여성의 방으로 변모해 있었다.

침대에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저 여자가 사막왕 가젤의 동생이자 과거 1황후였던 샌디인 모양이군.’

치렁치렁한 흑발과 건강하게 탄 갈색 피부가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토파즈를 박아넣은 듯한 샛노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배는 남산만하게 불러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산달이었다. 지금 당장 아이가 뛰쳐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인은 연신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만한 부분이었다.

‘일단은 넘기자. 원하는 부분은 뒤에 있으니.’

빨리감기로 기억을 넘겼다. 아까 봤던 기억으로부터 약 일주일 후, 천장에 달린 끈을 잡은 샌디가 진통을 겪고 있었다. 산파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그녀를 응원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황후님!”

식은땀을 후드득 흘리던 샌디가 이를 악물고 기어코 태아를 낳아냈다. “응애”하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아이는 황실의 핏줄답게 하얀 머리카락을 물려받았다. 대신 샛노란 눈동자와 갈색 피부는 분명한 사막 쪽 혈통이었다.

비록 기억 속 장면의 재생이지만 절로 박수가 나왔다. 출산 장면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이제 산모는 쉬고 산파가 아이를 돌보면 되었는데······

“에르파 언니,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요.”

“무슨 소립니까! 같이 베르누스 왕국으로 가셔야죠!”

“저까지 가면 아이까지 같이 죽어요. 둘 중 하나라도 살려면 이 방법 뿐이에요.”

“아아···황후님···흐흑···”

이게 무슨 소리일까. 왜 산모는 산파에게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라 하고 산파는 비통하게 울고 있을까.

“어서요. 적이 오기 전에 달아나요. 지금도 늦은 감이 있어요.”

“황후님···저는···”

“빨리!!”

땀에 젖은 산모가 소리치자 그제야 산파가 움직였다. 창문에 미리 설치한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직전, 산파가 샌디에게 물었다.

“황후님, 적어도 어미로서 아이의 이름은 지어주시지요.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서글픈 표정으로 손을 흔들던 샌디가 눈물 어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파헬. 저 아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파헬 폰 아울슐만츠 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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