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유적 : 세계수 망나니
코코는 자기를 낳아준 카일을 어머니로, 키워준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는 듯했다.
졸지에 애 딸린 아빠가 되어버렸지만 기분은 좋았다. 코코 같은 귀여운 아이라면 몇 명이라도 더 맡아줄 수 있었다.
인제 와서 부정하는 것도 이상하다. 저 나이가 얼마나 예민할 때인데. 아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의기소침하는 나이다. 나라도 아빠 노릇 해줘야지.
언어로 의사소통하니 무척 편리했다. 그전에도 눈빛으로 웬만한 말은 다 알아들었지만, 이제는 보다 심층적인 대화가 가능해졌다.
“코코, 몸 크기를 줄이는 스킬 있어?”
아무리 봐도 코코는 현재 너무 크다. 집채만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 저대로 다니면 너무 시선을 끈다. 그렇다고 매일 아공간에 넣어두기도 애매하고.
“작아질 수 있다뀨! 야얍!!”
슈슈슈슉!!
코코가 성룡으로 진화하기 전에 어린 드래곤으로 변화했다. 내 어깨에 안착하니 크기가 딱 맞는다.
“나 잘했냐뀨?”
“그래. 잘했다.”
“헤헷!”
볼을 좌우로 쫙 늘린 다음 마구 문대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나도 옛날에 술 취한 아버지가 수염 난 턱으로 얼굴 비비면 질색했으니까.
코코도 성장했으니 이제 동료를 찾으러 갈 시간이다. 아직도 어인족을 대피시키느라 정신없는 듯하다.
그렇게 이동하려는데···
“우웩! 우웨에엑!!”
옆에 있던 코코가 난데없이 구역질하는 게 아닌가! 성룡으로 자라고 나서 무슨 부작용이라도 생긴 걸까.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차에,
“웩! 퉤!”
마지막으로 짧게 구역질을 하던 코코가 작은 은구슬을 뱉어냈다. 신령한 기운이 자연스럽게 구슬을 감쌌다. 한눈에 봐도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코코야, 이건···”
“여의주다뀨! 성룡과 고룡으로 진화할 때마다 드래곤은 여의주를 품는다뀨!”
드래곤이 여의주를 품는다니. 처음 듣는 지식이었다. 놀랄 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코코가 뱉어낸 여의주를 나에게 내밀었다.
“드래곤은 자기가 성장한 증표인 여의주를 부모에게 전해주는 풍습이 있다뀨! 엄마가 없으니 아빠가 대신 가져달라뀨!”
이게 웬 굴러들어온 떡일까.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여의주를 받았다.
“아빠는 네가 어엿한 용이 되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뿌듯하구나.”
“뀨우우!! 아빠 먹으라뀨! 도움 될거다뀨!”
코코의 말대로 여의주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 가부좌를 틀었다. 맹렬한 기운이 신체 내부를 휘저었다.
카일의 후손답게 코코의 여의주도 용혈과 흡사한 기운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존에 있던 용혈과 무난하게 하나가 되었다.
기운이 센 용혈이 다른 기운을 억누르며 날뛸까봐 걱정했으나 괜한 기우였다.
단전에는 인어왕의 보주가 대해와 같은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보주가 지닌 에너지가 워낙 거대해서 미처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마나 각성도 현황.]
[혼합률 현황]
[초록마나 각성도 50%] [↑0.0%]
[푸른마나 각성도 52%] [↑1.0%]
[용혈 각성도 50%] [↑0.0%]
[혼합률 50%] [↑0.0%]
보다시피 삼원마나 각성수치를 전부 절반 이상으로 채웠고, 푸른마나의 각성도는 마스터에 오른 이후로 약간이나마 증가했다.
이유는 단전 구석에 똬리를 튼 인어왕의 보주에 내포된 에너지를 녹여내서다.
마치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아이처럼 심법운행을 할 때마다 조금씩 푸른마나 각성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다룰 수 있는 푸른마나의 총량이 점점 많아질 예정.
그래서인지 용혈도 함부로 까불지 않았다. 단전 한구석에 자리 잡고 조금씩 에너지를 흘렸다. 그래도 워낙 큰 에너지원이라 용혈 각성도가 소폭 증가했다.
[마나 각성도 현황.]
[혼합률 현황]
[초록마나 각성도 50%] [↑0.0%]
[푸른마나 각성도 52%] [↑1.0%]
[용혈 각성도 56%] [↑3.0%]
[혼합률 50%] [↑0.0%]
용혈 또한 시간이 들여 녹여내면 알아서 각성도가 증가하겠지.
초록마나 각성도야 드루이드인 나에게는 가장 올리기 쉬운 수치고, 혼합률은 천마심법이라는 희대의 개사기 심공을 운용하니 역시나 걱정 없다.
몸의 내부 상황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질 테니 고무적인 일이었다.
번쩍!
눈을 떴다.
주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시온과 캠벨, 오르네오 현자님, 일리나까지. 명상에 잠겨있는 동안 볼일을 끝내고 나에게 왔나보다.
“역시! 부단장이 해낼 줄 알았어!”
먼저 다가온 건 캠벨이었다. 녀석이 검댕이 가득 묻은 몸으로 나를 꽉 껴안았다. 어째 문어에게 싸웠을 때보다 훨씬 더러워졌다.
“사람들 대피시키느라 욕보셨습니다. 현자님.”
“아닐세. 아무리 그래도 저 괴수를 홀로 싸워 쓰러트린 자네만 할까.”
“시온도 고생했다.”
“도련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훈훈하게 공치사를 나누던 도중, 가장 뒤에 있던 일리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서럽게 오열했다.
“흐흑···흐흐흑···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좋을지···감사합니다···당신으로 인해 어인족은 구원받았어요.”
너무 띄워줘도 부담스럽다. 얼굴을 긁적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제 이익을 위해···”
“구원자시여!!!”
내 말을 끊은 일리나가 무릎으로 걸어오더니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크라켄과 마주하기 직전까지 불안했습니다. 약간은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었죠.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대도?”
“아아! 당장 왕궁을 복원할 때 헤논님의 동상을 중심에 세워야겠습니다.”
평생의 숙원을 풀어줘서일까. 가문의 바람을 이루어줘서일까. 속 썩이던 걱정거리가 한꺼번에 해결돼서일까. 일리나는 거의 광적으로 나를 모셨다.
뭐, 호의적인 태도가 나쁠 건 없다. 이참에 요구사항을 말하기도 편하고 말이다.
“총리님, 저희가 서로 계약을 나눈 사안이 있었죠. 크라켄이 잡혔으니 거기에 관련해서 계산을 좀 해야지 않겠습니까?”
“내 정신 좀 봐. 저를 따라와 주세요.”
해마차를 타고 저번에 방문했던 그녀의 자택으로 향했다.
왕궁과는 거리가 있는 탓에 다행히도 이곳은 멀쩡했다.
기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해양식물과 알록달록한 물고기로 꾸며진 정원을 지나 일리나의 서재로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구원자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왕가의 보물이 제 개인 재산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고작 문어대가리 잡은 걸로 기둥뿌리 뽑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선 현자님에게 드릴 보물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일리나가 꺼낸 건 작은 함이었다. 뚜껑이 열리자 안에는 푸른 빛을 발하는 귀걸이가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장신구였다.
“인어공주의 눈물이라는 보물입니다. 인어왕의 보주에는 못 미치지만, 이것 또한 저희 왕가에서 대대로 보관하는 귀물이니 아무쪼록 만족하셨으면 좋겠군요.”
오르네오 영감님은 이미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무 좋았는지 귀걸이를 만지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정말 내가 가져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허허, 이 보물만으로 내가 해저도시에 내려온 목적은 넘칠 만큼 달성했네.”
아무래도 보물 자체가 물을 다루는 오르네오 영감님과 잘 어울렸다.
특히나 인어공주의 눈물은 저번 리앙 암시장에서 얻었던 인어의 눈물보다 상위호환 아이템이니 효과도 확실할 터.
게다가 평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현자님이라 푸른색 귀걸이가 의외로 잘 어울리기도 했다.
시온과 캠벨도 각각 선물을 받았다.
시온은 팔찌를 받았는데, 불의의 일격을 맞을 경우 워터실드가 작동되는 아티팩트였다. 쿨타임은 하루. 몸이 약한 암살자인 그녀에게 딱 어울렸다.
캠벨에게는 고대 해양생물의 비늘로 만들어진 단단한 갑주가 주어졌다. 원래도 어인족 평균 신장이었던 캠벨의 몸에 딱 맞았다. 전위에 서는 그에게 방어력은 목숨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역시나 적절한 아이템이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
드디어 다섯 번째 황금가지를 얻을 차례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두근댔다.
“지상에서 비롯된 물건이니 가져가 주시길 바랍니다.”
황홀한 황금빛이 출렁였다. 드루이드인 내 몸이 격하게 세계수의 파편을 원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모두를 물리고 조심스럽게 황금가지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가지에 닿자마자 예의 그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황금가지를 발견하셨습니다.]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세계수의 시험을 치르시겠습니까?]
[Y/N]
역시나 떴다.
이번엔 어떤 기억이 나올까.
망설이지 않고 예스를 눌렀다.
스팟!!
동시에 눈부신 빛이 나를 덮쳤다.
* * *
메마르다.
또한 건조하다.
‘이곳은 어디지?’
여기를 봐도 모래.
저기를 봐도 모래였다.
무자비한 땡볕이 일말의 수분을 날려버렸다. 지면이 상처 난 피부처럼 갈라졌고, 눈을 따갑게 하는 모래바람만이 시리게 불었다.
‘사막이구나.’
나는 여전히 멀린의 몸에 빙의해 있었다. 이 또한 그의 기억 중 일부. 어쨰서 그는 머나먼 험지를 방문했을까.
손등을 살펴보니 주름이 제법 잡혀있다. 이미 그는 중년에 접어들었다. 해저도시를 방문했을 때보다 더욱 시간이 흐른 셈이다.
멀린은 누군가의 어깨에 탄 채 이동 중이었다.
그 누군가는 엄청난 신장을 자랑했다. 트롤과 오우거에 비교하기도 미안한 수준이고, 전설의 괴수였던 이무기와 맞먹을 정도였다.
쿵! 쿵! 쿵!
지축이 울릴 때마다 모래가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그가 거인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인이여, 사막에 온 이유를 알려다오.”
거인은 멀린을 은인이라 불렀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멀린.
“조금 더 가면 저절로 알게 된다.”
얼마나 걸었을까.
탁 트인 모래 평원이 나타났다.
그곳에 수많은 군대가 정렬해있었다. 거의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봐서일까. 개미떼처럼 우글대는 인간의 머릿수가 참으로 장관이었다.
가장 앞에 있던 무인이 낙타를 타고 앞으로 나섰다. 터번을 써서 눈만 보였으나 들고 있던 초승달 칼날의 샴쉬르에선 시퍼런 예기가 뿜어졌다.
“저주받은 존재여. 여기까지다. 너는 너무 많은 죄를 쌓았다. 네가 가는 곳마다 대학살과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니, 오늘로서 불길한 연쇄를 끊으리라.”
사령관으로 보이는 자가 칼을 앞으로 내밀자 대군이 천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반면에 멀린과 거인은 침착했다.
“은인이여, 저들이 목적인가.”
“그래. 저 버러지들을 모조리 처치해라. 세상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니.”
[시험을 시작합니다.]
[클리어 조건을 공개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세요]
이번에는 첫번째라는 수식어가 안 붙었다. 한 가지 시험만 통과하면 끝이란 의미. 하지만 시험 종목이 만만치 않았다.
‘수만 대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라···’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드루이드는 다수를 상대하기 최적화된 직업이고, 유일한 약점인 본신의 무력은 거인이 커버해주고 있으니까.
발전된 스킬을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우선 골렘부터.’
[우드 컨트롤]
[크리스탈 컨트롤]
[골렘 소환]
쿠콰콰콰콰!!!
분수처럼 쏟아지는 모래를 헤치고 골렘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멀린인가. 소환할 수 있는 골렘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우드 골렘은 무려 일백 기, 크리스탈 골렘은 스무 기다. 골렘으로 하나의 군단을 만든 것이다.
‘잔혹하군.’
중세시대 병사에게 현대식 전차부대를 들이대면 이러할까. 쿵쿵대며 달려든 골렘이 보병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끄아아악!!”
“살려줘!”
“괴물, 괴물이다아앗!!”
원래 내 성격에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면 거부감을 느끼겠으나 다행히도 이건 기억의 재생이었다.
오히려 나는 멀린이 실제로 이런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악스러웠다.
[우드 컨트롤]
[강화된 바인드]
[크리스탈 컨트롤]
[크리스탈 레인]
골렘은 시작일 뿐. 뿌연 모랫바닥을 뚫고 올라온 나무 뿌리가 아나콘다처럼 병사들의 몸을 옥죄었다. 속박된 병사는 여지없이 사지가 부러져 절명했다.
크리스탈 레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정비. 수많은 병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변수는 없어 보였다.
이대로 시험도 끝나나 싶었는데,
“모두 나를 따르라!!”
아까 멀린에게 말을 걸었던 사막 전사의 검에서 붉은 오러가 치솟았다. 동시에 다른 검사 두 명에게서도 오러가 발견되었다. 무려 소드마스터만 셋이다.
‘이건 좀 의외인데?’’
놀랄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저 멀리서 약 백여 명의 낙타부대가 맹렬하게 달려왔다. 전원 터번을 두르고 샴쉬르를 패용했는데, 풍기는 기세가 심상찮았다.
알고보니 이들은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정예병은 마나소드로 나무뿌리를 끊어내고 골렘을 우선적으로 공략했다.
소드마스터와 소드익스퍼트의 협공. 가장 먼저 무너진 건 우드 골렘이었다. 이 밖에도 하나둘씩 골렘이 침묵했다.
마침내 첫번째 크리스탈 골렘이 부서지자 온 사막에 함성이 울려퍼졌다.
“와아아아아!!!!”
과연 쉬운 시험은 없다는 건가. 헤논 본체라면 나도 오러소드를 뽑아 상대했을 텐데. 아쉽게도 멀린은 드루이드 스킬만 쓸 수 있다.
나를 태우고 있는 거인족도 강해 보이긴 했으나 숫자 앞에 장사 없는 법. 만약 골렘이 모두 다운되고 몰이사냥 당하면 쓰러질 게 분명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찰나, 묵묵히 서 있던 거인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인이여, 상황이 불리하다. 세계수를 소환해라.”
세계수를 소환하라고?
멀린에게 그런 엄청난 스킬이 있나?
잠시 눈을 감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세계수 소환.’
스파앗!!
눈부신 빛과 함께 사막의 바닥을 뚫고 거대한 나무가 위용을 드러냈다. 콧속으로 청량한 기운이 들어왔다. 메마른 대지가 실시간으로 푸른 녹원으로 변화했다.
기적을 목도했다.
눈앞에 있는 나무는 진짜 세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