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인어 : 욕봤던 망나니
현자와의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지도에 표시된 곳 위주로 돌며 기억 속 장소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오르네오 공작이 우리와 동행한 것이다.
“어째서 따라오십니까?”
“허허헛!! 기록 속에서만 존재하던 해저도시의 입구가 드러났네. 이걸 어떻게 참고 넘긴단 말인가?”
과연 지식광인가.
궁금한 건 참고 못 넘기는 성격이다.
“게다가 무조건 가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네. 바로 ‘인어왕의 보주’ 때문이지.”
인어왕의 보주.
오르네오의 설명에 따르면 해저도시에는 어인족이 사는데, 종족 전체가 대대로 지켜오던 보물이란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그 안에 내포된 힘 또한 어마어마하다고.
“자네는 내가 물의 원소술사임을 알고 있겠지. 직접 싸워봤으니 말일세.”
“물론입니다.”
“인어왕의 보주는 태초의 물로 만들어진 귀물일세. 만약 보주에 담긴 힘을 조금이라도 나눠 받는다면 어떤 발전을 이룰지 상상조차 안 가는군.”
보물을 생각하는 오르네오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내 목적은 황금가지니까.
현자와는 원하는 물건이 달랐다.
“나를 일행으로 받아주겠나? 늙긴 했어도 요리도 잘하고 짐도 잘 드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세븐스타는 존재 자체만으로 든든하니까.
그리고 오르네오는 이것저것 아는 게 참 많은 영감님이었다.
다니는 내내 입이 쉬질 않았는데, 라디오를 듣는 기분이었다.
“캠벨이라 했나? 허허! 기골이 장대하구먼. 뭐? 술을 좋아한다고? 내가 안 마셔본 술이 없네. 오죽하면 각 지방에 특산주를 모아 셀러까지 만들었을까. 나중에 초대하겠네. 와서 마셔보게나.”
“시온이라고? 대단한 여인이군. 젊은 나이에 이 정도 무력이라니. 심지어 하녀의 신분으로 말이야. 이건 비밀인데, 칼론 제국에는 세계 최고의 여고수가 있네. 자네와 머리색도 비슷하지.”
금방 우리 사이에 녹아들었다.
캠벨은 영감님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시온도 나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지도에 마크된 장소는 총 12곳.
그중 일곱 군데를 체크했다.
아쉽게도 모두 허탕이었다.
이제 여덟째를 탐색할 차례였다.
시온과 캠벨은 수련하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
패시브 스킬로 피로를 회복한 나는 자청해서 불침번을 섰다.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모닥불 사이를 뒤적이고 있을 때, 오르네오 영감님이 슬쩍 옆자리에 앉았다.
“잠이 안 오십니까?”
“원래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야.”
둘 다 말이 없었다.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 숨 막히는 정적을 몰아냈다.
“같이 여행하면서 쭉 지켜봤는데, 자네는 잠을 거의 안 자더군. 관련된 체력회복 스킬이 있나?”
“그렇습니다.”
“드루이드 계열 쪽 스킬이겠지.”
“예.”
딱히 숨길 것도 없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는 태연할 수 없었다.
“자네는 헤논 로이드인가?”
아주 잠깐이지만 모닥불을 뒤지던 나뭇가지 끝이 멈추었다. 그것만으로도 현자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실종되었다 알려진 악마살해자가 여기에 있었군.”
“어떻게 알았습니까?”
“위장크림부터 이상했네. 톰이 즐겨 사용했던 물건이거든. 또한 젊은 나이에 자네 정도의 초고수는 흔치 않아. 선택지를 지우다 보니 금방 답이 나왔네.”
오르네오의 눈동자는 매우 깊었다.
오리발을 내밀려다가 포기했다.
하찮은 수가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제가 헤논 로이드입니다.”
그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황혼교의 음모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황금가지를 찾으러 여행한다는 사실을.
모든 이야기를 경청한 오르네오는 나에게 크게 감명받은 모양이었다.
“허허···부끄럽구먼.”
“무엇이 말입니까?”
“이제 약관이 된 젊은이는 대륙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데, 현자라 불리는 늙은이는 지식욕에 취해 우물 안 개구리 행세를 했으니 말이야.”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닐세. 세븐 스타는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지. 그만큼의 책임이 있는 법일세. 이를 망각하면 안 되는 법이거늘.”
현자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번 여행이 끝나더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탑을 찾아오게. 자네에 한해서는 무조건 시간을 내주겠네.”
“감사합니다.”
그의 손은 주름졌지만 온기가 흘렀다.
따뜻한 손이었다.
* * *
여덟 번째 장소 탐색.
비슷한 장소만 여러 군데 조사하다 보니 이제는 수평선만 봐도 어지러웠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백사장 위를 천천히 걸었다.
파도 소리가 고막을 시원하게 울렸다.
가끔씩 날아오른 갈매기가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무릎까지 푹푹 들어가는 모래를 헤칠 즈음에 캠벨이 볼멘소리를 터트렸다.
“운도 더럽게 없네. 열두 군데 중에 여덟째면 벌써 절반 이상인데, 또 허탕이라니!”
“그만 좀 투덜대세요. 누구보다 답답해하실 분은 도련님입니다. 어차피 당신은 저녁 메뉴만 맛있으면 뭘 하든 좋지 않습니까?”
“하녀가 또 까칠하네. 용가리만 안 커졌어도 진작 검으로 혼내줬을 텐데.”
“코코가 없어도 당신은 저한테 안 됩니다.”
“지금 당장 해볼래?”
“좋습니다.”
시온과 캠벨이 또 싸우려 한다.
옆에서 듣던 오르네오가 끼어들었다.
“궁금한 게 있네. 저번부터 자꾸 코코를 언급하던데, 혹시 나 말고 일행이 또 있나?”
둘이 동시에 합죽이가 되었다.
곤란해하는 것 같길래 아공간에서 코코를 꺼내주었다.
“뀨우!!”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오르네오님에게 다 밝혔다.”
드래곤을 본 현자는 뒤집어졌다.
안 그래도 연세가 많으신데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닌지 순간 걱정했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오르네오가 손을 뻗어 코코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코코는 선악을 판별하는 직감을 타고났다.
오르네오에게서 풍기는 선한 기운을 느끼고는 오히려 머리를 갖다 대며 손길을 즐겼다.
“자네와 같이 있으면 놀랄 일이 계속 일어나는군.”
“다들 그 소리를 하더군요.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다녀도 될 것 같습니다.”
“설마···”
“예. 이곳이 우리가 찾던 장소입니다.”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 드문드문 자란 야자수. 모래알을 머금은 파도.
멀린의 기억으로부터 자그마치 일천 년이 지난 장소이건만, 여전히 변함없이 똑같았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단체 이속 버프를 걸었다.
바람이 발목에 감기자 오르네오가 신기해했다.
빠른 속도로 해변가를 가로질렀다.
그 결과, 반나절 만에 눈물모양 바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로구먼!!”
“처음 보는 모양의 돌입니다.”
“부단장, 바다 아래로 길이 생길까?”
“해보면 알겠지.”
지체할 것 없다.
곧바로 바위에 푸른마나를 주입했다.
푸른색 기운이 꿀렁거리며 바위 중심부에 모여들었다.
얼마나 주입했을까.
우르릉 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시작됐다! 기운을 계속 불어넣게!”
쩍 갈라진 땅이 단물을 흡수하듯 눈물모양 바위가 푸른마나를 쪽쪽 빨아먹었다.
다행인 점은 푸른마나가 꽤 남았달까.
저번에 색욕과의 전투에서 깨달음을 얻고 각성도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눈물바위는 푸른마나를 배 터지게 흡수하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식사를 멈추었다.
“자네 말이 맞았어···”
고개를 들었다.
수면 위에 그려진 커다란 소용돌이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기억으로 볼 때와 실제 모습은 천지차이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센 소용돌이는 공포 그 자체였다.
“여길 들어가야 한다고?”
캠벨의 질린 목소리.
새파랗게 질린 낯빛이었다.
시온조차 그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
“부단장, 잘못 안 게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자. 뭔가 착오가 있었을···영감님!!”
“나 먼저 가겠네. 흐허허허허!!!”
새로운 발견에 흥분을 참지 못한 오르네오가 소용돌이에 몸을 던졌다.
바닥까지 빨려 들어간 그는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에라이! 영감님 같이 좀 갑시다!”
캠벨도 몸을 던졌고.
“도련님, 먼저 가겠습니다.”
시온도 몸을 던졌다.
이제 내 차례.
“어째 평범한 경우가 없군.”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마지막 기억은 나를 덮쳐오는 새하얀 물보라였다.
* * *
번쩍.
눈을 떴다.
이곳은 어디인가.
생전 처음보는 기괴한 식생이었다.
바닥에는 축축하게 젖은 흙이 깔려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찍어 먹어보았다.
“퉤!”
흙에 염장을 했나.
미친 듯이 짰다.
이런 소금땅에서 식물이 자란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염분을 거를 능력이 있는 동식물만이 이곳에서 살아남겠지.
근처를 배회하며 수색했다.
가까운 거리에 시온과 오르네오가 기절한 채 엎드려 있었다.
다가가서 몸을 흔들어 깨웠다.
“시온, 일어나라.”
“현자님, 일어나시죠.”
둘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오르네오는 나처럼 주변을 훑어보며 눈을 빛냈다.
시온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눈치챘다.
“캠벨은 어디 갔습니까?”
코코는 아공간에 넣어서 나와 함께다.
오르네오와 시온도 근처였다.
캠벨만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다른 곳에 떨어진 걸까.
“먹을 입이 줄었군요. 잘된 일입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일단 더 찾아보자.”
숲 전체를 뒤졌다.
오르네오는 그 사이에 몇몇 과일과 버섯을 채집했다.
그의 말로는 아무리 식생이 특이해도 식용 식물은 다 정해져 있단다.
몇 시간 후 오르네오는 배가 아프다며 설사를 하러 갔다.
어차피 아공간 주머니에 십 년 치 음식을 담아왔으니 식량 걱정은 없다.
캠벨만 찾으면 되는데···
챙! 챙!
저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고함도 함께였다.
“도련님.”
“그래.”
그곳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캠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낯선 모습의 어인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
“■■■■■■■■!!”
“■■■■■■■.”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말해!”
어인족은 독특한 언어를 구사했다.
알아듣진 못하지만 성난 몸짓으로 파악하건대 절대 우호적이진 않았다.
옆에서 오르네오가 말했다.
“캠벨을 죽이고 고기를 먹겠다는군.”
“저 말을 알아들으십니까?”
“고대어와 해안지방 방언이 좀 뒤섞인 것 같은데···대강 의미는 알아듣겠네.”
어쨌든 캠벨을 구해줘야 한다.
포위망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
[우드 레인]
나무로 된 고드름이 쏟아내렸다.
갑자기 퍼부어진 일격에 방심했던 어인족 전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했다.
몇몇 전사들이 황급히 방패를 하늘로 쳐올렸다.
그 바람에 약점이 훤히 노출되었다.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이 틈을 노리고 상대의 전신을 속박했다.
“완벽해.”
다 차려놓은 밥상이다.
오르네오의 물대포가 이들을 휩쓸었다.
멀리 날아간 어인족 전사가 나무에 부딪치고 기절했다.
남은 전사들은 시온의 몫이었다.
물도마뱀 발걸음과 거미 다리 콤보에 뒷목을 가격당한 이들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부단장! 구하러 와줬구나!”
반가움도 잠시.
저 멀리서 훨씬 더 많은 전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은 넘어 보였다.
“이걸 어쩌지?”
“모두 죽일까요?”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낯선 땅에 들어오자마자 대학살을 저질러야 할까.
어쨌든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침입자일 텐데.
“일단 자리를 피한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라이프 컨트롤]
[시야공유]
발목에 바람을 휘감았다.
시야공유까지 곁들였다.
주변 지형이 선명해졌다.
마치 황금가지 두번째 시험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멀린의 몸속에 들어가 엘프족의 추격을 따돌렸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드루이드로서, 그리고 검사로서 더욱 발전했으니 훨씬 도주가 용이했다.
포위망 이곳저곳을 휘저었다.
어쩔 수 없을 경우엔 기절시키고 나아갔다.
적들도 상당히 끈질겼다.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해서 확실하게 잡으려 했다.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저러지?”
“모르겠다.”
“인간 고기에 환장한 놈들 같습니다.”
꽤 많이 이동했더니 절벽을 만났다.
깎아지른 듯한 경사도다.
마침 맞은편도 절벽.
낡은 다리가 두 절벽을 연결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다리 건너에도 어인족이 한가득이다.
앞뒤로 포위된 셈이다.
캠벨이 바스타드 소드를 앞세웠다.
“젠장! 이렇게 된 것 다 죽여버리자고.”
“아니다. 자세히 봐라.”
흥분한 캠벨을 제지했다.
“우릴 쫓아오는 어인족과 다리 너머에 있는 어인족의 복색이 다르다. 저 둘은 다른 부족이야.”
오르네오가 옆에서 거들었다.
“헤논의 말이 맞네. 다리부터 건너보세. 그래도 적이 공격한다면 그때는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해보세나.”
날듯이 다리를 건넜다.
나무다리의 바닥 부분이 아니라 손잡이 부분을 밟고 뛰는 묘기를 보였다.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던 어인족은 예상대로 다리를 기준으로 주춤했다.
건너편에 사뿐히 착지.
나와 캠벨, 오르네오와 시온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맞은편에 있던 어인족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공격하는 줄 알고 검을 들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를 그냥 지나쳤다.
“???”
새롭게 마주친 어인족은 기존에 우리를 쫓던 난폭한 어인족 전사들에게 창날을 세웠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두 부족이 살벌하게 대치했다.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놀랍게도 어인족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욕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