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45화 (145/200)

18장 인어 : 찾아간 망나니

신성국에서 평생 살라.

메리안의 제안이었다.

“헤논님의 사정은 알고 있어요. 황혼교의 위협 때문에 모험가로 위장하셨죠. 이참에 새로운 신분으로 신성국에 정착하시면 어떨까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레플리가 헤논님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죠. 다른 건 다 잘못했어도 그 행동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계속 추기경으로 활동하시다가 교황 자리에 오르세요. 그리고 저와 함께 신성국을 이끌어요.”

어째 제안이 색욕과 비슷한데.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한다.”

“어째서죠?”

“나는 황혼교가 두려워서 신분을 숨긴 게 아니다. 황혼교를 부수려고 신분을 숨겼지.”

“황혼교를···부순다고요?”

메리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만큼 황혼이란 단어에 내포된 근원적인 두려움은 상당했다.

무려 마왕 바알의 직속 단체였으니 말이다.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 있을까요? 신성국에서 저와 같이 살아요. 훨씬 편하고 행복할 거예요.”

이건 메리안을 탓할 게 아니다.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일반인이 아닌걸.

바알은 언젠가 깨어난다.

황혼교는 그에 맞춰 준동할 테고.

폐허가 된 세상에서 주인공 시온은 홀로 맞서 싸워야 한다.

나 홀로 이러한 미래를 알고 있으니 시온을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제안은 고맙다. 마음만 받지.”

“어째서인가요. 무엇을 더 드려야 신성국에 머무실 건가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엇보다 나는 벨라누스를 믿지 않아. 벨라누스님도 내가 교황이 되는 걸 원치 않을 게다.”

메리안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성녀답게 벨라누스와 실시간 교신하는 중이다.

잠시 후에 눈을 뜬 그녀의 표정은 아쉬움 그 자체였다.

“정말이네요. 벨라누스님이 헤논님을 놓아주래요.”

“음.”

“그래도 괜찮아요. 헤논님은 여전히 벨라누스교의 추기경이니까요. 언젠가 꼭 돌아오셔야 해요. 기다릴게요.”

이후 그녀는 벨라누스가 언급한 유용한 정보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벨라누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원하는 물건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가장 큰 나라에서 가장 목마른 자를 만나라.’

“저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헤헤헤.”

“괜찮다. 큰 도움이 되었어. 고맙다.”

본래 신탁은 죄다 두루뭉술하다.

그래도 대강은 알아들었다.

원하는 물건이란 ‘황금가지’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내 진짜 목적을 알아챈 걸 보니 신이 맞긴한가 보다.

가장 큰 나라도 알 것 같았다. 아르니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는 명실상부 칼론 제국이다.

남은 건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목마른 자인데···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우선은 알아낸 장소로 이동한 다음, 애매모호한 부분을 조사하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군.’

칼론 제국 수도 오스딘.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고 밝은 도시.

그곳으로 가야할 차례였다.

* * *

아르니아 중남부.

버려진 폐허.

황혼의 대간부들이 집결했다.

분위기는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참석한 자들은 오직 다섯뿐.

분노, 식탐, 오만, 나태, 교주.

질투, 색욕, 탐욕 자리가 텅 비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황혼교주의 말이었다.

“칠대사도라는 자들이 벌써 셋이나 당했다. 너희가 내 생각보다 약했나? 아니면 상대가 강했던 걸까.”

나태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색욕을 죽인 자는 모험가 칸입니다. 최근 갈라나흐에서 숲지기를 잡고 오리할콘 모험가로 승급했습니다. 이후 신성국으로 넘어간 후 색욕의 정체를 밝히고 처단했습니다.”

콰아앙!

교주가 주먹을 내리쳤다.

회의장 탁자에 균열이 갔다.

“어디서 자꾸 이런 놈들이 튀어나오는 거야. 헤논을 잡아서 한숨 돌렸는데 또 귀찮은 녀석이 등장했어.”

가만히 듣고 있던 분노의 제안.

“교주시여, 이번 기회에 결원도 보충할 겸 칸이란 놈을 포섭하시지요. 색욕을 단독으로 잡았으면 무력은 증명된 셈. 게다가 모험가라고 하니 조건만 맞으면 우리 쪽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식탐의 반박.

“나는 반대야. 그래 봐야 인간일 텐데, 강해봤자지. 이제는 진짜 강한 놈들로 칠대사도를 채워야 해.”

교주는 턱을 손에 괴고 경청했다.

그러다가 오만 쪽을 바라보았다.

“오만, 평소와 달리 조용하군. 네가 이럴 때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닌데 말이야.”

“눈치채셨군요. 식탐과 분노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싶군요.”

모두의 이목이 오만에게 집중됐다.

“강한 자를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하나, 그자가 본교에 충성하란 법은 없습니다. 애초에 그만한 초강자를 끌어들이기도 어렵고요.”

“계속 말해라.”

“사실 강자에 집착하지 않아도 본교의 세력은 충분히 대륙을 뒤흔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신의 무력보다는 그자의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고 싶군요.”

오만이 후드를 벗으며 씩 웃었다.

리치인 그는 피부와 근육이 사라지고 두개골만 남았기에 미소가 괴상했다.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빙빙 그리던 그가 본론을 꺼냈다.

“교주님과 사도 분들께 차기 탐욕의 좌를 추천하겠습니다.”

“설마 새로운 멤버를 데려왔다는 건가?”

“맞습니다. 지금 회의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낯선 자를 데려와!!”

분노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폭사되었으나, 옆에서 황혼교주의 손을 내젓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오만은 생각이 깊다. 아무나 데려오진 않았겠지. 네가 생각하는 새로운 탐욕이 누군지 보고 싶다.”

“네. 바로 대령하지요.”

오만이 손짓하자 대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쿵!

열린 곳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찰랑이는 하얀 머리카락.

유전으로 물려받은 백발이라 윤기가 넘쳐흘렀다.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튜닉을 입었고 재질 또한 범상치 않았다.

심지어 드래곤 문양이 들어간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참고로 드래곤은 칼론 제국의 상징이며, 오직 황가의 일원만이 드래곤 문양이 들어간 장신구를 찰 수 있었다.

제국 뒷골목을 꽉 잡고 있는 나태가 사내의 신원을 바로 알아보았다.

“알렉스 황자로군. 제국의 2황자입니다.”

강대한 제국의 황자가 나타났건만 황혼의 간부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만큼 이곳에 모여있는 이들의 면면 또한 만만치 않다는 방증.

황자도 이를 알고 있는 듯 먼저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소개드리지요. 제국의 2황자, 알렉스 폰 아울슐만츠 칼론입니다.”

오만이 옆에서 거들었다.

“어떻습니까? 인간치고는 무력도 준수한 편이고 황자면 향후 본교가 대륙을 호령할 때 유용한 인재가 되어줄 겁니다.”

옆에 있던 나태의 한마디.

“현재 제국은 레이놀드 황태자 아래로 단결 중이다. 알렉스 황자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 빛 좋은 개살구다.”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대황혼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황자 알렉스가 본심을 꺼냈다.

“저는 황제가 되고 싶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현재 황태자인 레이놀드가 있는데 2황자가 황좌를 탐낸다.

한마디로 형을 제끼고 본인이 대륙의 일인자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분노가 노발대발했다.

“네놈! 이곳이 인력 사무소인줄 아느냐. 감히 우리에게 부탁을 하려고 와?”

“그만.”

황혼교주가 분노를 만류했다.

“너는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물론입니다. 마왕 바알을 추종하는 위대하신 분들 아닙니까? 부디 도와만 주신다면 제국과 황혼교는 좋은 관계가 될 겁니다.”

“······그래?”

드르륵

의자를 끌고 일어난 교주가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두 존재의 눈맞춤.

알렉스는 몇 살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황혼교주의 무면(無面)에서 근원적인 공포심을 느꼈다.

숨이 차고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헉···헉···”

“나는 인간의 야망을 믿는다. 너의 꿈이 사실이라면, 황혼교에 어울리는 인재겠지.”

교주가 알렉스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버둥거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호흡이 가빠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커허헉···”

“허나 태도가 잘못됐어. 우리는 악마추종자다. 나는 그들의 수장이고. 애초에 협력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네가 우리를 전혀 모른다는 증거다.”

“무, 무슨 말입니까···?”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충성을 맹세하고 제국을 갖다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는 말이다.”

교주가 힘을 빼자 알렉스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겨우 호흡을 찾은 그의 귀에 대고 황혼교주가 속삭였다.

“네 충성을 보여라...”

갈등하던 알렉스가 황혼교주의 낡은 후드 끝자락을 손으로 잡고 입을 맞췄다.

“마왕 바알님을 신봉하고···교주님께 충성을 바칩니다.”

“아주 좋아.”

박수를 친 교주가 오만을 바라보았다.

“오만, 생자에 대한 부분 리치화가 가능한가?”

“아직 불안정합니다만, 한 명 정도면 얼추 될 것 같습니다.”

“좋아. 놈의 라이프베슬을 적출해서 나에게 넘겨라.”

“알겠습니다. 교주시여.”

라이프베슬은 곧 생명이 담긴 구술.

이로써 알렉스의 목숨줄은 황혼교주가 쥐게 되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알렉스를 내려다보며 교주가 씩 웃었다.

“황혼교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새로운 ‘탐욕’이여. 네가 원하는 대로 황태자를 죽여주마. 하지만 명심해라. 앞으로 네놈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가든, 결국 나의 권속일 뿐이니라.”

* * *

오스딘에 도착했다.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내심 기대했다.

“우와···엄청난데?”

옆에서 캠벨이 장탄성을 터트렸다.

일단 도시 규모 자체가 엄청났다.

인구도 무려 백만이란다.

한국의 광역시 수준이다.

문명의 발달 수준도 엘든 왕국이나 신성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복층 건물이 빼곡히 늘어섰고, 마차가 다닐만한 벽돌길이 온 도시에 잘 닦여있었다.

도로가 제법 넓었는데 마차가 워낙 많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듯했다.

사람들도 특이했다.

가지각색 머리색깔이 인상적이었다.

문명의 집합소답게 다른 곳보다 광대나 음유시인, 예술가가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하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점일까.

하수도조차 없어서 똥물을 힌즈 호수에 갖다 버리던 로이드 후작령, 골목길에 오물이 묻어있던 폰타노, 조금만 나가면 몬스터 배설물이 발견되던 갈라나흐.

그런 도시에 비해서 이곳은 하수구도 있었고 지하수도도 있었다.

시민들은 정해진 곳에 오물을 갖다버렸기에 도시 전체가 외관상으로 상당히 청결하고 깨끗했다.

“역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촌스러운 티를 팍팍 내는군요.”

시온은 저번에 검을 배우려고 오스딘에 방문했기 때문에 이곳 지리에 나름 익숙했다.

현재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도 시온이었다.

“그래봐야 너도 시골 출신이잖아.”

“이제 도시여자입니다.”

“생긴 것부터가 촌년···커헉!”

옆구리를 얻어맞은 켐벨이 꺽꺽댄다.

“도련님은 별로 안 놀라시는군요.”

“예전에 더 큰 도시를 본 적이 있다.”

“아르니아 대륙에 오스딘보다 큰 도시가 있습니까?”

“꿈에서 봤다.”

“······”

당장 서울만 해도 인구 천만 도시니까.

물론 캠벨과 시온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신탁대로 가장 큰 도시에 왔다.

이제는 황금가지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

도대체 가장 낮은 곳은 어디고 가장 목마른 자는 누구일까.

우선 천마게이션부터 작동했다.

-황금가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오스딘에는 없단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호외요! 호외!”

소년 여럿이 건물에서 튀어나오더니 종잇조각을 뿌렸다.

오스딘에는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언론사도 있단다.

전단지처럼 생긴 신문을 집어서 글자를 읽었다.

적힌 내용은 단 한 줄이지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레이놀드 황태자 사망>

제국의 차기 황제가 서거했다.

소식을 접한 제국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촤르륵 탁! 탁!

가정집은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주점 또한 영업을 종료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활기찼던 도시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병사들까지 우르르 나와서 도로를 통제했다.

“타이밍이 이상하게 됐군.”

황금가지를 찾아야 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동료들도 이런 내 사정을 알고 있다.

고심하던 시온이 넌지시 말했다.

“도련님, 꺼림칙하지만 한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나태를 만나보시지요. 제국에서 뭔가를 찾거나 알아보려면 그편이 가장 빠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나태는 한때 나를 죽이려던 여자인데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니.

세상일이 참 요지경이다.

“좋다. 안내해라.”

나태를 만나 신탁에 관련된 힌트에 대해 알아본다.

겸사겸사 지금 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파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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