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인어 : 만드는 망나니
발키리가 추락했다.
레플리의 죽음과 동시에 모두가 언령에서 풀려났다.
신성국민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슬픔, 분노, 공포, 혼란, 기쁨.
그만큼 색욕이 벨라누스국에 미쳤던 영향은 지대했다.
하지만 괜찮다.
신성국에는 새로운 태양이 있으니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메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심하고 있던 그녀는 낯선 감촉이 느껴지자 정신이 돌아왔는지 화들짝 놀랐다.
“뭐해? 네가 보살펴야 할 이들이다.”
내 말을 알아들은 메리안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전면에 나섰다.
“여러분, 저는 성녀 메리안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얇았지만 묘한 호소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신성력이 이목을 끌었다.
“오늘은 집으로 귀가하세요.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벨라누스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리더쉽이 부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하실에서 구출된 여인에 대한 해명부터 시작해서 어째서 기존 성녀가 황혼교의 대간부였는지, 이를 알고도 묵인했거나 협력한 내부인사는 없었는지, 교황은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홀로니움 대신전을 뒤집어놨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는 메리안에게 목숨을 빚졌다.
성역을 통해 색욕과의 전투에서 굳건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많은 의혹을 꾹꾹 눌러담고 차분하게 해산했다.
신전에 복귀하자마자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요한부터 만났다.
“헤논, 네 말을 믿지 않아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것부터 보십시오.”
요한에게 건넨 건 과거 색욕의 밑에서 일했을 때 입수했던 명단이었다.
명단에는 황혼교에 협력했던 신성국 내부 인사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일반 병사부터 시작해서 성기사, 주교, 대주교까지 다양한 직책을 본 요한이 침음을 흘렸다.
“신성국은 사실상 망국이었구나.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었는지···세븐 스타라는 이름이 참으로 부끄러워.”
“지금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시지요. 벨라누스에게 선택받은 메리안도 있으니까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힘을 내십시오.”
위로의 말을 전하자 요한이 고개를 떨궜다.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너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를 오해하고 죽이려 했는데, 너는 도리어 성녀를 찾아주고 이 나라를 지옥에서 건져냈구나.”
“저 또한 제 이익을 위해서 했던 일입니다. 크게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으마. 지금부터 너는 요한의 친구라 불러도 된다.
고든의 아들이자 카리나의 피후견인이자 톰의 후배이자 요한의 친구인가.
어째 세븐 스타들이 죄다 나를 좋아한다.
아무튼 마스터급 고수와 친해져서 손해볼 건 없으니 좋은 일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명단에 적힌 버러지들을 처단하고 메리안님과 정식으로 인사할 계획이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저는 교황 성하를 뵐 생각입니다.”
정확히는 교황의 예배 드리는 곳에 있을 황금가지를 찾아야 한다.
“알겠다. 나도 정리가 끝나는대로 성하를 뵐 테니 먼저 인사드리거라.”
요한과 헤어지고 날듯이 예배실로 뛰었다.
전에 봤던 화려한 대문이 나타났다.
이번엔 앞을 막는 성기사가 없으니 자유롭게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바깥과 달리 안쪽은 소박했다.
딱히 성물도 없었고 텅 빈 예배실이다.
교황님은 어디 계시는 걸까.
“?”
가운데에 검은색 관이 보였다.
이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관짝을 열었더니 새하얀 옷을 입은 백골이 누워있었다.
태양 문양 목걸이가 목에 걸려 있다.
아무래도 저 시체가 교황인 듯 싶었다.
“참 요지경이군.”
색욕은 교황을 죽여놓고 십 년 동안 폐관기도를 드린다 둘러댔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고지식한 요한에게 문을 지키게 해서 모두의 출입을 엄금했겠지.
‘교황이 죽었으니 앞으로는 메리안이 벨라누스교를 이끌겠군.’
어린 소녀 혼자 힘들겠지만, 요한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은 나중에.
우선은 황금가지부터 수색하자.
천마에게 위치를 물었다.
-관 앞에 있는 나무함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천마의 말대로 관 앞에는 나무함이 놓여있었다.
목함을 열었더니 교황의 개인 물품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고, 고대하던 네 번째 황금가지가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발했다.
[황금가지를 발견하셨습니다.]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세계수의 시험을 치르시겠습니까?]
[Y/N]
역시나 시험을 치러야 하는구나.
지난번 동부 대산림의 경우가 특이 케이스였다.
[세계수의 시험에 응답하셨습니다.]
[시험을 돌입합니다.]
스파아앗!!
빛이 퍼졌다.
* * *
깊고 울창한 숲.
후드를 쓴 남성이 걷는다.
이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일천년 전 드루이드 멀린이다.
여태껏 황금가지의 시험은 멀린의 기억을 토대로 치러졌다.
첫번째 시험은 트롤에게서 탈출하는 과정이었고, 두번째 시험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이었다.
두번째 시험에서는 안타깝게도 멀린의 친모가 사망했다.
세번째 시험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생략됐으나, 멀린의 기억은 재생됐다.
기억 속 멀린은 인간에게 노예로 팔려서 갖은 고초를 당하고 치가 떨리는 수모를 당했다.
지켜보는 내가 괴로울 정도였다.
네번째 시험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그동안은 시간의 흐름대로 기억을 보여줬다.
이를 토대로 따져보면 지금 시점은 멀린이 노예생활을 하고 난 다음일 터.
마침 저쪽에 시냇물을 발견했다.
양손을 모아 목을 축이고 물에 비친 멀린의 모습을 살폈다.
‘나이 좀 먹었네.’
짙은 턱수염과 우묵한 눈빛.
미간에 새겨진 내천 자와 입가 주변의 팔자 주름.
순수하고 용기 있던 아이는 사라지고 남성미 짙은 사내가 남아있었다.
볼일을 본 멀린은 다시 걸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마을.
‘아! 멀린이 살았던 마을이군.’
첫번째와 두번째 시험 당시 잠깐 봤던 곳이라 기억에 남았다.
어째서 멀린은 이곳에 다시 왔을까.
별로 좋은 기억은 없을 텐데.
심지어 마을의 촌장격인 대장로에게 어머니가 죽지 않았던가.
‘설마···’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된다.
멀린이 손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골렘이 일어선다.
크리스탈 골렘까지 섞여 있었다.
“모두 죽여라.”
엘프 마을.
한때 그의 근본이었던 장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순간에.
멀린의 공격은 항거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았다.
드루이드가 이토록 무서운 존재였던가.
도망도 소용없었다.
라이프 컨트롤로 시야를 훤히 밝혀놨다.
테이밍 수준이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작은 생쥐는 당연하고 들개와 멧돼지, 사냥매와 맹수까지 조종했다.
엘프에게 보금자리였던 숲이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남은 잔해 속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대장로 뿐이었다.
비틀대며 엉금엉금 기어나온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정확히는 멀린과 서로 응시했다.
“할 말 없습니까?”
멀린이 먼저 입을 뗀다.
“미안하다든지,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든지, 옆에서 다른 사람이 부추겼다든지, 뭐 그런 변명 있잖습니까?”
캬악! 퉷!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은 대장로가 자조적으로 킬킬댔다.
“후회되긴 하는구나.”
“저희 어머니 말씀입니까?”
“흐흐흐···그럴 리가. 너 같은 말종 반푼이를 확실히 죽이지 않고 살아날 여지를 남겨뒀다는 후회가···.커헉!!”
퍼석!!
대장로의 머리를 밟고 터트렸다.
비로소 멀린은 자유를 찾았다.
허무함 속 자유였지만 말이다.
[첫번째 시험-드루이드의 기억Ⅰ을 클리어했습니다.]
[두번째 시험-드루이드의 기억Ⅱ를 회상합니다.]
이번에도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솨아아아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곱게 빚은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드문드문 보이는 열대나무들.
모래알을 머금은 물보라가 발목을 적셨다.
‘여긴 어디지?’
멀린은 묵묵히 움직였다.
손에 잡힌 주름으로 볼 때 엘프 마을 파괴로부터 시간이 더 흐른 듯했다.
그때도 강했는데 지금의 멀린은 이미 괴물 수준 강자라는 게 느껴졌다.
백사장을 따라 한참 걸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순례는 노을이 질 때쯤에야 끝났다.
그는 바위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모양이 특이하게 생긴 돌덩이였다.
굳이 묘사하자면 쉼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
‘뭘 하려는 걸까?’
눈물방울 바위를 앞에 둔 멀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푸른 빛을 발하는 보석.
그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고 익숙했다.
리앙에서 봤던 인어의 눈물이었다.
‘일천 년 전에도 인어의 눈물이 있었다고?’
멀린은 인어의 눈물을 바위에 갖다 댔다.
그러자 보석에서 나온 푸른빛이 바위로 흘렀다!
바위는 아이가 이유식을 먹듯 푸른 마나를 꿀떡꿀떡 삼켰다.
이후에 일어난 현상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했다.
쿠구구구궁···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떨렸다.
눈물 모양 바위는 그저 입구였다.
중요한 건 그 앞에 바다였다.
수면 위에 그려진 소용돌이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멀린은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다.
‘미쳤나?’
거센 물살에 휩싸였다.
뱅글뱅글 돌며 호흡이 막혀왔다.
이대로 죽는 걸까···
두려움이 몰려올 즈음에, 바닥에 발이 닿았다.
심해에는 물이 없었다.
‘놀랍군.’
순수하게 감탄했다.
수면 아래에는 거대 도시가 숨어있었다.
도시의 거주민은 특별했다.
이들은 상상 속 인어처럼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물고기였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평범한 인간처럼 두 다리로 변태하여 이족보행했다.
대신에 관자놀이 쪽에 지느러미가 붙어있거나 옆구리 쪽에 돋아난 비늘로 어인족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
어인족의 언어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멀린도 굳이 대화를 시도하진 않았다.
그저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드루이드의 힘은 바다 아래에서도 강력했다.
그는 원하는 게 있어 보였다.
막아서는 어인족을 학살하며 안으로 진입했다.
사원으로 짐작되는 장소에 방문했다.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음침한 기운이 풍기는 문이 나타났다.
노란색 부적이 다닥다닥 붙은 밧줄이 입구를 빈틈없이 조이고 있었다.
“■■■■!!!”
어인들의 언어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저들은 봉인진이 풀리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멀린은 처음부터 봉인이 목적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저 너머에 갇힌 존재는 너희 같은 미물이 다룰만한 놈이 아니다.”
바인드로 소환된 날카로운 나무 가시가 밧줄을 잘라버렸다.
안쪽에서부터 부는 검은색 바람이 사원을 뒤흔들었다.
어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
이후 어둠 속에서 괴기스러운 생명체가 나타났다.
‘거대 문어?’
빨판 달린 여덟 개의 다리.
선홍빛의 매끈한 피부.
금방이라도 먹물을 뿜을 것 같은 기다란 코.
그 아래 위치한 쭉 찢어진 입.
입을 벌리자 안쪽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수도 없이 박혀있었다.
“전설의 괴수 크라켄이여. 그대는 나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멸하지 않겠는가.”
저 문어 대가리가 크라켄이었구나.
솔직히 말하면 징그러운 외형이었다.
놈은 멀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기다랗고 두꺼운 다리로 어인족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산채로 씹혀 죽는 소리가 섬뜩했다.
“배···고···파···”
“바다 위에는 네가 좋아하는 먹이가 한가득 있다. 나와 같이 올라가자.”
“배···고···프다고!!!”
흉포한 문어가 멀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서울 법한 순간에도 멀린은 여유로운 태도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본능이 이성를 억누르고 있군. 아무래도 위아래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겠어.”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시험을 시작합니다.]
[클리어 조건을 공개합니다.]
[크라켄을 제압하세요.]
아무래도 이번 시험은 타코야끼 만들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