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가짜 : 데려간 망나니
전투는 아주 싱거웠다.
패닉에 휩싸인 크림슨은 발악하며 나에게 달려들었으나,
[우드 컨트롤]
[스톤 컨트롤]
[윈드 컨트롤]
바닥에서 나무줄기가 치솟고, 사방에서 뾰족한 돌창이 쇄도하며, 거대한 골렘이 주먹을 내리친다.
게다가 시온과 캠벨도 이때다 싶어서 마나소드를 휘둘렀다.
맹렬한 공세 앞에 크림슨이 탈출할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커헉···”
결국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 꿇은 크림슨.
나머지 익스퍼트 고수는 일찌감치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행방불명됐다는 헤논 로이드가 본교가 애타게 찾던 드루이드였다니. 네놈은 내가 바알님을 모신다는 사실도, 레플리님께서 색욕이라는 사실도 모조리 알고 있었구나.”
피가 섞인 가리침을 뱉어낸 크림슨이 킬킬대며 웃었다.
“완전히 당했군. 하지만 너는 색욕님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실로 두려운 분. 네놈은 사람 잘못 건드렸다.”
“왜 악당들은 자기가 져놓고도 이렇게 당당한지. 아무튼 색욕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줘야겠다.”
“흐흐흐, 웃기는 놈이군. 너희는 내 입에서 단 하나의 정보 쪼가리도 얻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고문을 받다 보면 뭐라도 떠오르는 게 있을 거야.”
크림슨을 공들여 작업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북부식 고문 서비스는 손님을 대만족시킨다.
뼈를 잘게 부수고 근육을 결대로 잘랐다가 이어붙이고 손발톱을 수시로 찔러댔더니 어찌나 좋아하는지 게거품을 물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결국 크림슨은 고작 삼십분 만에 백기를 들었다.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쇼···”
“색욕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말하라니까? 안식은 그때야 찾아온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그녀가 인간이 아닌 상위의 존재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존재인지까지 말하고 가자.”
“제발!! 나도 모른다고!!”
크림슨은 한 시간 정도 추가시간을 즐기다가 숨이 끊어졌다.
솔직히 유용한 정보는 많이 없었다.
놈이 색욕 밑에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짓을 했는지만 실컷 알게되었다.
색욕에 대한 정보는 처음에 뱉은 말이 끝이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라는 정도.
‘레베카처럼 뱀파이어일까? 아니면 웨어울프 쪽? 또 다른 악마?’
지금으로서는 베일에 쌓여있다.
우선은 움직이기로 했다.
시온과 캠벨에게 뒷정리를 맡겼다.
크림슨의 목을 잘라 보자기에 씌웠다.
“시온, 캠벨, 메리안을 잘 보살피고 있어라. 그림자 성녀 영향력도 계속 키워. 때가 되면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겠다.”
명령을 내리고 홀로니움 대신전으로 돌아왔다.
복귀하자마자 레플리를 찾았다.
똑똑똑
“들어와.”
흥분 어린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내가 그림자 성녀를 사냥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원하던 선물이 아닐 텐데.
“그림자 성녀는 잡았어?”
색욕의 물음에 가져온 보자기를 탁자 위에 던졌다.
툭. 데구르르르.
보자기가 펴지면서 뜬 눈으로 죽은 크림슨의 흉한 머리통이 레플리의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이가 없군요. 부하 관리 똑바로 못 합니까?”
여기서 필살기를 써준다.
이른바 적반하장으로 화내기.
“무슨 헛소리야. 그림자 성녀는?”
“놓쳤습니다. 집회 장소를 덮쳤더니 이미 죄다 도망갔고 이놈 시체만 있더군요.”
“뭐라고?”
“크림슨 이 모지리 새끼가 공을 독식하려고 선수를 쳤단 말입니다. 그래놓고는 잡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으아아아아아!!!!”
뾰족한 고음과 내지르며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던 레플리가 크림슨의 머리통을 축구공 차듯이 뻥 차버렸다.
히스테릭한 모습이 여러모로 성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대체 너는 제대로 하는 게 뭐야?”
“화나는 건 납니다. 왜 성녀님이 화를 내십니까? 수개월 간 공들인 작전이 성녀님 직속 부하 때문에 수포가 되었습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정보 관리를 똑바로 못해서 그런 거지.”
“적도 아니고 아군한테 정보 좀 노출된 게 잘못입니까? 애초에 성녀님이 그놈한테 목줄만 제대로 채워놨어도 진작 해결됐을 일입니다.”
나와 레플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부딪쳤다.
레플리는 예배실 벽에 금이 갈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내뿜었다.
[자정작용]
[상태이상 완전면역]
물론 압박감을 느끼는 일 따윈 없었다.
기 싸움은 장기간 팽팽히 이어졌다.
밀고 당기는 무형의 줄다리기 끝에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레플리였다.
“후우······좋아. 이번 일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성녀의 질문.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어떻게 하긴요. 저희 계약은 끝입니다. 임무에 실패하면 대주교 자리에서 해임한다 하셨잖습니까? 잘 됐군요. 이참에 신성국을 뜨겠습니다.”
슬쩍 발을 빼는 척을 해준다.
그러자 색욕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레플리 입장에서는 열 받겠지.
그림자 성녀도 멀쩡한 마당에 그동안 똥받이 해줬던 크림슨도 죽었으니까.
설상가상으로 그림자 성녀 건을 전담하던 나까지 나가면 성녀는 편하게 부릴 사람이 없어진다.
다른 놈을 대신해서 쓸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익스퍼트의 고수 크림슨이나 오리하르콘 모험가 같은 고급 인재를 대체할 인재는 단연코 없었다.
유능한 임원이었던 난 이 점을 노리고 사직서를 냈고, 회사가 텅텅 비어버릴 위기에 처한 색욕 사장님이 나를 붙잡으리라 확신했다.
“어딜 도망가. 하던 일은 끝까지 매듭짓고 가야지.”
“크림슨 놈을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권한이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여기서 일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전권을 주십시오.”
“전권 줬잖아.”
“전권을 받은 사람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핵심 정보를 빼돌림 당한답니까? 허울뿐인 전권입니다.”
이제 핵심이다.
분개하는 톤을 유지하며 요구사항을 말했다.
“제2의 크림슨, 제3의 크림슨이 등장하면 이 같은 일은 또다시 일어날 겁니다. 차라리 크림슨이 하던 일까지 저에게 일임해주시지요.”
크림슨은 그동안 황혼교도로서 색욕의 더러운 뒤처리를 맡아왔다.
한마디로 진짜 내부자였던 셈.
반면에 나는 겉으로만 대주교 자리를 꿰찼지, 사실상 외부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나를 진짜 내부자로 받아들이라 요구한 것이다.
“흐음.”
색욕의 고민이 깊어졌다.
왜냐하면 내가 크림슨을 대신하려면 필연적으로 지하실 관리를 맡겨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색욕이라는 사실을 밝혀야하기 때문.
정확히 내가 노리는 바였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말씀하시지요.”
“황혼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드디어 본론이구나.
나를 황혼교도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이다.
“글쎄요? 마왕 추종하는 미친놈 집단 아닙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황혼교가 나쁘다고 생각하나?”
사상검증인가.
이걸 통과해야 진짜 내부자가 된다.
미리 준비해둔 답변을 꺼냈다.
“저는 모험가입니다. 저에게 나쁜 건 계약사항을 어기거나 임무를 방해하는 놈들입니다.”
“철저하게 계약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하죠. 세간의 평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나한테 보상 주는 놈이 좋은 놈이지. 성녀님에겐 조금 자극적인 발언이려나? 원래 세상사가 다 그런 법입니다.”
미끼는 던졌다.
먹잇감을 물기만을 기다린다.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저는 이쯤에서 손 떼렵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쿨하게 나가는 척.
붙잡아라. 제발 붙잡아라.
속으로 바라던 차에.
“잠깐.”
역시나구나.
걸음을 멈추었다.
“용건이 남았습니까? 혹시라도 강제로 붙잡거나 보복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마시지요. 오리하르콘은 그리 만만한 등급패가 아닙니다.”
“아니다. 그보다 이걸 봐라.”
색욕이 뒤로 돌더니 어깨 섶을 살짝 내렸다.
그러자 등 쪽이 훤히 노출되면서 맨 살갗이 드러났다.
날갯죽지 쪽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칠망성에 가운데에 붉은 눈.
익숙한 문양이었다.
“갑자기 뭐죠? 이해하기 힘들군요.”
“등에 새겨진 문양 보이나?”
“장님이 아니니 보입니다만.”
“황혼의 일원이라는 표식이다.”
드디어 공개했군.
여기서 반응이 중요하다.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태연함을 유지한다.
“그렇군요.”
“지나치게 침착하군. 무려 성녀가 황혼의 일원이라는데.”
“아까 크림슨의 시체를 살펴봤습니다. 놈의 몸에도 성녀님과 똑같은 문신이 있더군요. 그래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능청스러운 태도.
“아쉽게 됐습니다. 원래 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고발해서 한몫 챙기려고 했는데, 성녀님 쪽에서 먼저 공개할 줄이야. 이러면 코가 꿰여버렸군요.”
선악에 대한 구분보다 본능에 충실한 면모를 지속적으로 노출했다.
“내 뒤통수를 치려 했다?”
“상스러운 표현이군요. 그보다는 좋은 이직 기회가 있었다고 칩시다. 어쨌든 물거품이 됐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색욕이 팔짱을 끼고 날 노려본다.
“전권을 주면 그림자 성녀를 해결해 줄 거야?”
“그건 벌써 옛일이죠. 앞으로 평생 신성국에 종신해야 할 텐데, 더 높은 몸값을 원합니다.”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면 상대의 의심을 산다. 이럴 바에는 탐욕의 화신으로 비치는 게 낫다. 그래야 상대가 나를 욕심에 절여진 단순한 놈으로 여긴다.
“뭘 원하는데.”
“저번에 말씀하셨죠. 대주교는 차기 교황 후보를 겸한다고요.”
“설마 교황이라도 되겠다는 거냐?”
“당연하죠. 그리고···”
말끝을 늘어트리며 성녀를 위아래로 훑는다.
“여기에 더해서 세상에 하나뿐인 성녀가 제 여자가 된다면 충분할 것 같군요.”
물론 색욕에겐 일말의 욕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지하실을 구경한 뒤로는 눈앞에 있는 년은 그저 화장 뒤집어쓴 괴물이었다.
그럼에도 연기는 프로답게 해야 하는 법.
지금만큼은 권력과 여자에 눈이 멀어버린 모험가 역할에 충실한다.
“미친놈.”
아무래도 노림수가 제대로 통한 듯했다. 욕설을 내뱉는 색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지어졌으니.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본 것 같네. 역시 넌 황혼 쪽이 어울려.”
색욕이 손가락 끝으로 내 가슴을 살살 만지는데 무심코 주먹이 나가려던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지금부터 너는 신성국 추기경이야.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를 기쁘게 할수록 네가 원하는 보상도 빨리 움켜쥘 거다.”
색욕의 수족이 되는데 성공했다.
이제 그녀를 함정에 몰아넣으면 끝이었다.
* * *
칸 추기경.
이름만 들어도 간지가 흐른다.
명함이 두터워진 만큼 권력도 강화되었다.
더 이상 감시하는 눈길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감시자를 심었다.
색욕에게 명단을 받았다.
명단에는 현재 벨라누스 신성국에서 활동하는 황혼교도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단순한 평민부터 사제, 성기사, 주교까지.
모든 분야에 구석구석 퍼져서 신성국을 좀 먹고 있었다.
지하실 관리도 도맡았다.
갇힌 여인들을 풀어주고 싶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대신에 쓸데없는 폭력이나 희롱은 금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또한 마도구 반지를 통해 신성력을 채취하고 색욕에게 전달하는 역할은 내가 전담했다.
그림자 성녀에 대한 추적도 재개되었다.
물론 번번이 허탕을 쳤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게, 작전 책임자인 나부터가 메리안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내부 정보를 시온에게 전달했으니 진전이 될 리가 없다.
현재 나는 교황의 예배실 앞이다.
다시 방문한 이유는 성기사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여전히 문앞을 지키고 있었다.
의식주를 이곳에서 해결하며 24시간 수문장 역할을 하니 충신도 이런 충신이 없다.
“좋은 아침이네. 추기경.”
그래도 추기경쯤 되니 먼저 인사해주는구나.
“교황 성하를 만나고 싶군요.”
“여전히 안 되네. 절대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성녀님의 엄명이 있었거든.”
“추기경인 저도 말입니까?”
“당연하지. 성녀님 본인이 와도 나는 이곳을 막고 있을 걸세.”
부마간택식부터 느낀 건데, 진짜 벽창호도 이런 벽창호가 없다. 사람 답답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그래도 세븐 스타에 마스터급 고수니 설득해야겠지. 색욕을 끝장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퍼즐 조각이니까. 또한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안쪽에 있는 황금가지도 얻을 수 있다.
슬슬 혀에 시동을 걸어볼까.
“요한님, 혹시 그림자 성녀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모를 수가 있나. 요새 안팎으로 난리잖나.”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고할 가치도 없지. 진짜 성녀는 레플리님이시다.”
꽉 막힌 요한이라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유명해진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림자 성녀를 잡아야 하는 추기경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군.”
“혹시나 그림자 성녀가 진짜 성녀고 레플리님이 가짜 성녀면 그때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요한은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어째서 내게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모르겠군. 방금의 발언은 못 들은 셈 치겠네.”
“요한님과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별로 가고 싶지 않네.”
“바깥으로 나가자는 게 아닙니다. 대신전에 있는 장소입니다. 아주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지요.”
요한도 미련할 뿐 천성 자체는 착한지라 이런 부탁에 약했다.
“고작 십분입니다. 그조차도 안됩니까?”
“흐음···”
턱에 손을 괴던 요한이 이내 승낙했다.
“딱 십분일세.”
십분이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를 데리고 창고로 향했다.
목적지는 바로 지하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