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38화 (138/200)

17장 가짜 : 인사한 망나니

어두운 밤.

창문을 통해서 홀로니움 대신전을 나왔다.

날 감시하는 멍청이들은 방문만 바라보고 있을 테니 알리바이는 완벽히 확보한 상태.

후드를 뒤집어쓴 채 신성국 지붕을 타넘으며 질주했다.

아래쪽에서는 경계병이 횃불을 들고 순시를 돌았다.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내 실력이 워낙 뛰어난 데다가, 야심한 시각에 웬 미친놈이 지붕을 타고 넘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한참을 움직이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료와 미리 준비해둔 안가였다.

마찬가지로 지붕 위에는 시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옷에 펄럭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은 밤에도 눈에 띄었다.

“오셨습니까.”

시온이 짧막하게 인사한다.

바로 용건부터 물었다.

“메리안은?”

“잘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성녀는 많이 유명해졌나?”

“직접 보시지요.”

시온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갔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내부는 텅텅 비어있다.

시온이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벽 한쪽이 팽그르르 돌면서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이쪽입니다.”

놀랍게도 안가는 지하토굴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참을 이동했더니 널찍한 공동이 나왔다.

이곳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밝게 빛나는 발광석을 기준으로 둥글게 둘러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성녀 메리안을 위한 비밀집회입니다.”

벌써 이만큼 추종자가 생겼다니.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기를 바랬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만큼 현 신성국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성녀 레플리에게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단 이야기겠지.

“?”

그런데 보다 보니까 조금 이상했다.

보통은 빛이 있으면 그쪽을 향해서 무릎을 꿇는데, 여기는 반대로 빛을 등지고 무릎을 꿇었다.

한마디로 모두가 바깥쪽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는 모양새였다.

“기도 방향이 이상한데?”

“올바른 방향입니다. 메리안은 그림자 성녀입니다. 이들에게 화려한 빛은 가짜일 뿐. 그러니 빛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고 기도를 올리는 중이죠.”

정말 진심이구나.

이들은 메리안을 사랑하고 메리안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열성 신도들이었다.

“사람 모으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림자 성녀 작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시온에게 홀로니움 대신전의 상황에 대해서 최대한 상세히 설명했다.

“현재 홀로니움은 레플리의 개인 궁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크림슨이라는 성기사가 총괄 업무를 맡고 있지. 그러니까 우리는 크림슨을 먼저 해치워야 한다.”

원래는 레플리를 곧장 자르려 했었다.

암살각도 여러 번 쟀다.

하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 도무지 파악이 안 됐기 때문이다.

신성력을 흡수한 반지로 가짜 성녀 행세를 한다는 건 안다.

문제는 그것만 빼면 너무나 평범하고 힘없는 여인이란 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황혼의 대간부 색욕이고, 내가 알기로 대간부 자리는 아무나 주지 않는다.

상당한 무력이나 특수능력이 있으니 칠대사도에 임명되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녀는 일단 제쳐두고 아랫사람인 크림슨부터 없애자는 게 내 계획이었다.

겸사겸사 크림슨의 자리를 내가 꿰찬 다음 색욕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도련님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시온의 질문에 씩 웃으며 답했다.

“별것 없어. 딱 하루만 성녀인 척하자.”

이른바 시온의 일일 성녀 체험기.

메리안을 대신해서 그녀가 성녀가 되면 끝이었다.

* * *

시온과의 밀담을 나눈 며칠 후.

나는 레플리의 호출을 받았다.

그녀가 나를 왜 불렀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예배당에 도착하니 크림슨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레플리는 특유의 가식적인 여유조차 못 부릴 만큼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칸 대주교.”

“네.”

“내가 당신을 왜 대주교로 임명했더라?”

“그림자 성녀를 잡기 위해서죠.”

“맞아. 그런데 오늘 소식이 들어왔어. 그림자 성녀의 추종자들이 이미 대규모 조직을 운영 중이고, 그 수가 일천을 훌쩍 넘는다던데?”

쾅!

레플리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단상을 발로 걷어찼다.

“당신 이러면 재미없어. 알아? 자리를 줬으면 밥값을 하란 말이야!!”

뾰족한 고음이 귀를 아프게 했다.

참으로 듣기 싫은 목소리.

일부러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저도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소문으로는 예배실에서 꼼짝도 안 한다던데?”

“누구에게 들은 소문입니까?”

“······”

보나마나 크림슨에게 들었겠지.

온종일 나에게 눈을 붙여놨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나를 감시했다고 말하긴 민망했는지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성과를 얻었는지 들어나 볼까? 정보 좀 풀어봐. 만약 여태껏 한 게 없다면 당신을 신성국에서 쫓아내겠어.”

“그림자 성녀의 비밀 집회 장소와 일시를 알아냈습니다.”

“!!!”

레플리와 크림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크림슨이 놀란 눈치였다.

“허풍도 정도껏 쳐야지! 그동안 우리 쪽에서 그 정보를 알아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크림슨은 내 말을 거짓으로 치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리안의 추종자들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데다가 입이 무거웠다.

혹여나 잡히더라도 스스로 혀를 깨물어 죽을 정도로 독했으니, 도무지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부자가 아니라면 절대 못 얻을 정보를 얻었단다.

크림슨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난 내부자가 맞는걸.

지금부터는 살살 구슬릴 차례다.

“정보는 제 불알 두 쪽을 걸고 100% 확실합니다. 저에게는 벨라누스님보다 소중한 불알이죠.”

“저런 천박한 놈! 너 같은 게 대주교라니!”

“그쪽 크림소스인지 크림샐러드인지 너 같은 놈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아나?”

“크림슨이다!!”

“대신전에서 파견한 사제나 주교, 병사들은 딱 티가 난다. 너희가 아무리 스파이로 위장하고 싶어도 귀티가 줄줄 흐른단 말이다.”

“호오? 계속 얘기해 봐요.”

성녀가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우린 모험가. 밑바닥 출신이 수두룩하다. 때로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임무일 때도 있지. 내가 얻은 정보는 휘하 모험가들이 수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적 수뇌부에게서 얻은 고급 정보다.”

이렇게 포장하니 그럴싸하다.

성녀도 솔깃한 게 믿는 분위기다.

심지어 크림슨마저도.

“좋아요. 당신을 한 번 더 믿어보죠. 비밀집회 장소를 알았다니 크림슨과 함께 그곳을 덮치세요. 그림자 성녀를 생포하고 불가피하다면 죽이세요.”

예상대로 성녀는 자신의 수족인 크림슨을 딸려 보낸다.

“성녀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그림자 성녀는 혼자 잡고 싶군요. 크림슨을 작전에서 배제해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널 뭘 믿고 단독 작전을 보내?”

“조용히 해라. 성녀님과 내가 대화 중이잖나.”

“그러니까 네가 뭔데···”

“크림슨, 입 닥쳐.”

결국 레플리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크림슨 자존심 건드리기 성공.

“좋아요. 믿을 때는 확실히 밀어줘야죠. 혼자 다녀오세요. 대신에 반드시 그림자 성녀를 잡아야 합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 *

색욕과의 대화를 마치고 내 전용 예배실로 돌아왔다.

지금쯤 크림슨은 초조함과 불안감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니겠지.

그동안 대신전에 기거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크림슨은 색욕에게 집착적인 수준으로 충성심을 보인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림자 성녀는 원래 크림슨의 임무였는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내가 해결사로 왔다.

그로서는 함께든 단독이든 무조건 잡고 싶을 터.

나는 그 심리를 철저히 이용하기로 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사람을 호출하자 젊은 사제가 모습을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대주교님.”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이 쪽지를 적힌 주소지에 전달해라.”

“예.”

사제가 사라졌다.

쪽지에는 비밀집회 장소와 일시를 적어놨다.

물론 거짓으로 꾸며낸 정보다.

하지만 젊은 사제는 쪽지내용을 철석같이 믿고서 부리나케 크림슨에게 갈 것이다.

애초에 사제는 크림슨이 심어놓은 심복이었으니 말이다.

“아저씨들이 낚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래서인가? 손맛이 기가 막히네.”

낚시바늘에 미끼를 끼워서 강물에 뿌렸다.

남은 건 눈먼 물고기가 미끼를 덥석 물기를 바랄 뿐이다.

* * *

[다가오는 보름날.

신성국 동쪽 21-4 3층 주택.

집회는 오후 9시부터.

10시에 모여서 덮친다.]

크림슨은 쪽지에 적힌 정보를 보고 희열감에 부르르 떨었다.

“확실하지?”

“그렇습니다.”

“좋아. 열 시에 덮친다고? 우리는 그보다 30분 일찍 모여서 그림자 성녀를 잡는다.”

일이 풀려도 이렇게 잘 풀릴 수가 있을까.

크림슨은 벌써부터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다.

칸의 정보를 이용해 적들을 일망타진한 다음, 공로를 인정받아 눈엣가시인 칸을 신성국에서 쫓아내는 그림을.

‘멍청한 놈. 마지막에 실수했구나.’

설령 이 쪽지가 거짓 정보라도 상관없었다.

칸에게는 계속해서 감시를 붙여둘 예정이고, 만에 하나 이상 행동을 보일 경우 즉시 그에 맞춰 움직일 테니까.

“병사를 모아라. 성기사도 불러. 황혼교도로만 토벌대를 구성한다.”

“알겠습니다. 바알님께 영광을.”

“바알님께 영광을.”

보름날은 순식간에 왔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크림슨은 토벌대의 면면을 살폈다.

자신을 포함해서 익스퍼트의 고수만 자그마치 다섯이었다.

이 토벌대가 지는 건 말이 안 됐다.

심지어 전원 황혼 출신이니 보안성도 완벽하다.

“모두 이동한다.”

“명을 따릅니다.”

쪽지에 적힌 21구역 네 번째 저택을 둘러쌌다.

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다.

“문 열어.”

데려온 사람 중에 열쇠공이 있었다.

잠깐 꿈쩍거리자 쉽게 문이 열렸다.

토벌대가 주택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습니다!”

“빈집입니다!”

정보가 잘못되었나.

칸이 역으로 자신을 속인 걸까.

잠시 고민하던 크림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밀 집회는 최소 수백 명은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있어야 한다. 일단은 이곳을 샅샅이 수색해라. 뭐가 나올지도 모른다.”

5분 가량 수색.

어떤 기사가 무심코 벽을 밀었더니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이곳에 통로가 있습니다!”

“여기였군!”

정보가 맞았다.

크림슨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선두에 선 그가 최대한 발걸음을 죽이며 토굴을 지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드넓은 공동이 드러났다.

그는 목적지에 왔음을 직감했다.

공동 가운데에는 대형 발광석이 어두운 굴을 환하게 밝혔고 그쪽을 바라보는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 여자가 그림자 성녀구나.’

성녀 옆에는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남자가 보였는데, 칸이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실종됐다던 헤논 로이드로 추정됐다.

집회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 의심되긴 했으나, 뭐가 어찌 됐든 이런 토굴에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니까 잡아보면 무슨 소득이라도 나오겠지.

“꼼짝 마라! 너희는 포위되었다.”

크림슨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기사와 병사들이 두 남녀를 둘러쌌다.

“그림자 성녀냐?”

“그렇습니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의 고갯짓에 크림슨은 너무 좋아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대신전에서 나온 심문관이다. 다 끝났다. 순순히 협조한다면 최대한 신사적으로 대해주지.”

옆에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키가 어마무시하게 크고 체구 또한 무지막지했다.

‘헤논 로이드가 원래 이랬나?’

들리는 소문으로 키가 크다고 듣긴 했는데.

이건 커도 너무 크지 않는가.

2m가 훌쩍 넘어 보였고 얼굴은 무슨 오우거가 따로 없었다.

‘혹시 악마살해자가 아니라 악마 그 자체 아닐까? 면상만 보면 그냥 악마인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마침 그림자 성녀가 후드를 벗었다.

풍성한 보라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미녀였다.

“유명해질 만하군. 미모로 순진한 신성국민을 홀리고 다녔나?”

“글쎄요.”

“뭐, 상관없지. 포박하라.”

병사 둘이 밧줄을 들고 성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거한이 칼을 뽑아들지 않을까 경계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장대한 체구의 사내는 양손을 들어올려 방관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으니까.

안심한 병사가 성녀에게 가까워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걱! 서걱!

눈 깜빡할 새였다.

그림자 성녀의 손이 빛살처럼 번뜩였고.

병사 둘의 목에 혈선이 그어졌다.

“커헉!”

“크허억!”

순식간에 절명한 병사가 털썩 쓰러진다.

“굳이 편한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로 가겠다니. 참으로 멍청하군.”

크림슨은 말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방금 성녀가 보여준 움직임은 단순히 하루이틀 수련한다고 되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전부 공격해!!”

넓은 공동에서 치열한 대혈투가 벌어졌다.

익스퍼트 기사 다섯과 일반 병사 서른이 두 남녀와 치열하게 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슨은 경악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무슨 그림자 성녀가 이리 세단 말인가.

게다가 헤논 로이드 또한 악마살해자답게 혼자서 익스퍼트 여럿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두 남녀는 등을 맞댄 채 서로의 사각을 방비하며 팽팽하게 싸움을 전개했다.

마치 오랫동안 호흡을 마쳐온 베테랑 전사들 같았다.

결국 30분간 이어진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헉! 헉! 헉!”

“제기랄!”

육두문자가 나왔다.

혈투 끝에 일반 병사가 모조리 죽었다.

남은 사람은 익스퍼트 다섯뿐이었다.

상대는 여전히 둘.

다소 지쳤다지만 여력이 있어 보였다.

‘이거 잘못하다간 생포는커녕 도망도 못 치겠어.’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뒤쪽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짝!

“대단해. 아주 인상적인 전투였어.”

뒤를 돌아본 크림슨이 안심했다.

오리하르콘 모험가 칸이 당도한 것이다.

항상 밉상인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리 반가워 보이는지.

“잘 오셨습니다. 그림자 성녀가 생각보다 강합니다. 그래도 거의 힘을 빼놨으니 같이 마무리하시지요.”

크림슨이 외쳤으나 칸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왜?”

“제가 당신의 정보를 훔친 것 때문에 화나셨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시지요.”

급한 건 크림슨이다.

일단은 죄송하다는 말부터 갈겼다.

그럼에도 칸은 꼼짝 않는다.

“정말 속 좁은 사내군요. 이후에 합당한 사과와 그에 따른 보상을···”

“아니야. 난 화나지 않았어.”

“그러면 어째서 움직이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저들이 내 적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리둥절한 크림슨.

“정확히 말하자면 저들은 나와 같은 편이고, 네가 내 적이다.”

눈앞의 사내는 난데없이 손수건을 꺼내더니 얼굴에 대고 박박 문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악할 일이 벌어진다.

칸의 얼굴이 흘러내리면서 다른 얼굴로 변하는 게 아닌가!

까무잡잡한 피부에 턱수염 난 선 굵은 외모의 사내는 사라지고, 대신에 새하얀 피부에 요요한 녹안을 지닌 미남자가 나타났다.

“너는···대체 누구냐?”

정신이 혼미해진 크림슨의 물음에 사내가 답한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하지. 반갑다. 엘든 왕국의 자작, 헤논 로이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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